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60화 (160/220)

160화.

로젤린은 조심조심 움직이다가 그녀의 말에 화색을 지었다. 로젤린이 급하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했다.

“저, 어디 이상한 곳은 없습니까?”

“그럼요.”

“예쁩니까?”

클로에가 새끼 고양이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쩜…… 귀엽기도 하지.

“세상에서 제일.”

클로에가 단언하는 말에 로젤린의 자신감이 상승했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도, 그녀의 하녀들도, 레티시아도, 클로에도, 모두 깜짝 놀라며 칭찬해 주지 않았나.

로젤린,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의 자신은 매우 심각하게 예뻤다. 이 정도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것이다! 로젤린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모습을 보고 클로에가 손짓했다. 문이 열렸다.

* * *

성을 둘러싼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병장기가 철컥, 덜그럭 소리를 울리는 바깥과 달리, 벽 하나를 두고 안쪽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춤을 추기도 하고,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황실 내에서 가장 넓은 파티 홀은 과장을 보태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 내, 무도회에 입장 가능한 단원들은 모두 참석한 상태였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 속 웃고 있는 그들은 연회를 즐기는 듯 보였으나, 그 누구의 눈에서도 방심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어떤 감미로운 음악도, 맛있는 음식도 기사들의 경계를 늦추지는 못했다.

아직 황제와 디에즈, 하카브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인기가 좋으십니다, 단장님.”

파르딕트가 음식 접시를 들고 스타스에게 접근했다. 인기가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기나 질투 같은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스타스에게 연이어 춤을 신청한 여자들이 스물이나 갓 넘었을까 싶은 어린 영애들이라 그런 듯했다. 스타스가 그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그러는 경은 인기가 없군.”

스타스도 파르딕트가 춤을 신청하고 거절당하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파르딕트가 껄껄 웃었다.

“수도 아가씨들의 취향은 아닌가 보죠. 알루웨에는 제가 한번 뜨면 난리가 납니다.”

“자네 가문 영지라고 날조하지 말게.”

“날조라니요, 제가 단장님을 한번 고래무덤에 초대해야겠습니다.”

툴툴거리던 파르딕트가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 위에 놓인 유리잔을 잡았다. 스타스가 그의 발을 꾹 밟았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우리가 놀러 왔나?’라는 뜻을 읽어 내고 파르딕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과 왕족이 드나드는 문은 1층, 황족과 그 파트너가 입장하는 곳은 2층으로 연회장 안의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2층 문이 열리면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든, 대화하든, 음식을 먹든, 밀회를 나누든 상관없이 그곳으로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빛이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하얀 옷을 입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는 황족들의 자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건 고귀함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2층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설원의 월계수,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강철발굽, 테레지아 브레헤 백작 영애 듭십니다!”

엘피디오였다. 인성과 상반되는 외모인 만큼이나 하얀 예복이 잘 어울렸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오는 아가씨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고고한 자태를 선보였다. 스타스는 직감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든 것이 황족의 입장이 아닌, 그 옆의 아가씨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파르딕트도 그 여자를 보고 커헉, 하는 소리를 냈다.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가 언제 풀려났습니까?”

스타스가 깜짝 놀라 그의 발을 다시 꾹 밟았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소리 낮추게.”

“아차, 아차. 예.”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 테레지아. 과거 리카르디스에게 하루에 청혼서 스무 장을 보내고, 그의 뒤를 몰래 염탐하고, 그의 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등……의 화려한 전적을 가진 아가씨였다.

이후, 참다못한 그녀의 아버지 강철발굽 백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별장에 처박았다더라, 그 별장에서 하루에 몇십 장씩 성전만 필사하고 있다더라, 소문만 무성하게 있었는데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테레지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조숙녀인 양 사랑스럽게 웃으며 엘피디오와 나란히 발맞춰 내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엘피디오를 둘러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세력이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였다. 엘피디오는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갖은 공을 세웠더라도, 지지 기반이 단단하니 불안감이 가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건, 정말 그렇군.”

외적으로 보기에는 둘 다 잘생기고 예쁘니 흠잡을 구석 없지만,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흠잡을 구석밖에 없다는 게 정말 잘 어울렸다. 강철발굽 백작이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그녀의 특이한 기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스는 돌아다니는 르원을 손짓해 불렀다.

“경계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예의 주시하라.”

“예. 단원들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르원에게 그 경계 대상이 누구라 꼬집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스타스는 거대한 커튼이 물결치는 뒤에서 르원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아직…… 모습을 안 보이시는군.”

그의 귓가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에 가려져 있는 스타스를 보지 못했기에, 그를 지척에 두고 그의 주인을 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마인 하나를 등에 업고는 기세등등하지 않소. 이러다간 폐하가 건국일을 선포하고 난 다음에야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타날는지도.”

“이번 파트너도 붉은수레바퀴라 합디다.”

“내, 참. 리카르디스 전하도 전하거니와, 붉은수레바퀴의 딸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있으면 물어라도 볼 것인데 허구한 날 변방에만 박혀 있으니 원!”

“어렸을 때부터 그 집 딸이 유난스럽지 않았습니까. 출신이고 뭐고 간에 얼굴이 반반하니 홀랑 넘어갔겠지요. 정신 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

“…….”

남자들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들은 그들의 진영에 붉은수레바퀴의 딸보다 유난스럽고, 미천한 출신이고 뭐고 간에 반반한 얼굴에 홀랑 넘어간,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또 다른 영애의 존재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심기 불편한 듯 크, 크흠 하며 애써 강철발굽의 테레지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일라베니아를 끌어갈 유력한 후보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들이 웃는 낯으로 엘피디오에게 접근했다. 스타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보았다. 음악이 두 번 정도 바뀌었을 때였을까.

여기저기, 왼쪽, 오른쪽, 뒤쪽. 서로를 향하거나 아슬하게 빗겨 나간 시선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살짝 위를 향해 있었기에,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무도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백작 영애 듭십니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위층을 바라보았다.

“……천사?”

아까 전에 천한 출신, 얼굴만 반반…… 운운했던 자의 목소리였다. 확 뒤바뀐 그의 태도를 그저 웃어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스타스가 그 남자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장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 건국일마다 단출한 차림새로 나타났던 리카르디스 또한 아름답고 손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고고한 한 송이의 꽃 같았으나……. 체스 게임의 승패로 장신구를 더하고 빼는 구질구질한 나날을 탈피한, 시녀들의 혼이 담긴 치장의 저력은 가히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아, 아름다워!”

사실 건국제에 황족들이 입는 하얀색 예복은 매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형태였다. 다른 이들처럼 색으로 승부할 수 없으니, 화려한 형태를 덧대고, 금실, 은실을 사용한 화려한 자수를 덧대고, 또 두르고.

촌스럽다거나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과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아주 적당히, 과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단정하여 어딘가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옷의 형태! 색은 고고하고, 형태는 단아하고, 장신구는 화려하게 띄워 주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마침표는, 얼굴로!

어린 아가씨들이 눈물지었다. 다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각을 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그런 환각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결 좋게 빛나는 은발, 몸의 선을 따라붙는 복식은 섬세한 자수로 인해 더욱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여러 개의 반지와 치장한 장신구들이 도리어 모자라 보일 정도의, 저 얼굴. 저, 몸. 완벽하다. 신이 빚은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

리카르디스가 살짝 뒤를 돌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다들 그 후광에 가려 그의 파트너를 깜빡 잊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이 공간 안에 리카르디스를 모르는 자는 있어도 로젤린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타국의 귀족들은 그녀를 소문으로만 들었다. 마인이고 되게 강하고 뭐, 검은달을 작신 밟아 주었고, 1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임에도 자신의 신념으로 2황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희한한 행보만큼이나 그녀의 외적인 부분도 많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수준이라는 평가였다. 매섭고, 날카롭게 쭉 찢어진 눈매도 눈매고, 체구도 아담한 맛이라고는 없이 길쭉하고 튼튼하고 탄탄하니 여기저기 보이는 어린 아가씨처럼 아기자기하고 풍성한 솜사탕 같은 드레스가 어울릴 리가 없었다.

‘음…….’

어?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아니 예상과는 달랐다.

리카르디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오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았다. 여러 조명이 비춘 피부는 진주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가운데,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입술은 과하게 붉지 않아 자연스러웠다.

계단의 뒤로 로젤린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스르륵 끌렸다. 몸의 선에 딱 달라붙다가 엉덩이 아래부터 퍼지는 드레스는 인어의 꼬리처럼 우아하게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다.

굴곡진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려 날카로운 눈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같이, 맹수의 눈과 같이 어딘가 장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어깨는 바르게 펴져 있고, 곧은 자세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고작 스물 조금 넘은 여자에게서 받을 만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 여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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