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사냥 대회 전, 황실의 숲에서 난도질된 신관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또 무슨 일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우연일 리 없었다.
“또 시체라도 발견되었나?”
리카르디스의 말투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라헤안시는 숨이 탁 트이는 후련한 기분에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 이번 신관은 목이 잘렸어! 머리는 아직 발견 못했어!”
대신관이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너무나도 해맑게 했다.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눈이 탁자 언저리를 떠돌았다. 리카르디스가 아래를 내려다본 채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 탁, 탁 두드렸다.
“대신전에서 사라진 신관은 있었고?”
“응, 어제 바로 사라졌다네, 대충 사망 추정 시간이 나왔는데 그때랑 비슷하다 하더라고. 보니까 뭐로 쑤셨는지 배가 뚫려서 너덜거리고 팔다리 여기저기 부러져 있고, 어우. 머리는 대체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고.”
“신관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는데 이걸 덮어?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건국일이 코앞인걸. 폐하께서 이 시기에 나쁜 얘기가 도는 걸 두고 볼 위인인감 어디.”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그놈의 권위는 더럽게 귀중히 여기는 작자였다.
신관이 또 죽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신관 살인 사건의 배경에 디에즈나 검은달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디에즈는 혹은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단순한 원한이라면 고작 두 명의 피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의해서? 5황자의 탈을 쓰고 있는 강한 무언가와 검은달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고작 신관 두 명의 죽음으로 이뤄 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와사삭, 와작.
경박하게 쿠키를 씹는 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라헤안시가 시시덕거리면서 잇세리온이랑 얘기 중이었다.
“형님이 먼저 로젤린 경에게 사과했나?”
“…….”
정확히는 라헤안시 혼자 떠들고 있었고 잇세리온은 묵비권을 행사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라헤안시가 아차 하며 눈치를 다시 살살 봤다.
“헤헤, 형, 소식 잘 물어 왔지?”
“……그래 뭐, 고생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 베르움이 밤새도록 카드 게임을 연구하고 있다는 둥, 버려진 정원을 공사할 예정이었는데,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이 부서져 있어서 어린 신관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는 둥. 하카브 왕자가 대신전에 들러서 구경하고 갔는데, 진짜 잘생겼다는 둥, 아니 그래도 형이 훨씬 더 잘생겼으니까 걱정 말라는 둥. 9할 정도가 라헤안시의 쓰잘머리 없는 잡담이었다.
로젤린 경의 머릿결이 좋아서 부러운데, 비법이 뭔지 알려 달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리카르디스의 눈썹의 위치가 살짝 높아졌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을 치료했을 때.”
“으응?”
“별다른 점은 못 느꼈고?”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마인이잖아. 성력을 쓸 때 특별한 점은 못 느꼈냐고.”
“아, 뭐 약간 성력이 새는 듯이 이상하더라, 마인이라 그런가 봐!”
리카르디스가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래? 마인이라 그렇다고?”
라헤안시의 등 뒤로 식은땀을 뻘뻘 흘렀다. 이 형이 미쳤나, 숨기고 있던 거 아녔어?
“그으…… 렇지 않을까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종착지는 맞은편 소파였다.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의 옆에 붙어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라헤안시가 몸을 굳히며 눈만 굴렸다.
“내 동생, 라헤안시…….”
서두가 불길했다. 이 형이 진짜 왜, 왜, 왜 이래.
“아직 이리저리 재 보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빼다간 정작 손을 얹어야 할 때를 놓친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라헤안시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라헤안시가 끽, 하며 목 졸리는 소리를 냈다. 흘끗 옆으로 돌아간 라헤안시의 눈동자가 리카르디스와 딱 맞부딪쳤다. 역광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목숨을 걸어 보기 좋은 때가 아니더냐. 이 전란의 한 가운데. 도박사가 손 놓고 있으려고?”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로젤린 경에 대해 특별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으면 다시 찾아오거라. 이제 나가. 일해야 된다.”
말을 마친 리카르디스가 일어서서 집무 탁자로 돌아갔다. 라헤안시는 뻣뻣하게 굳어 집무실을 나섰다. 정문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베르움이 열어 주는 마차 문을 유령같이 지나쳤다. 안에 들어와 털썩 앉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헤안시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으흐헤히호……. 무서운 형님일세…….”
자신이 로젤린의 이상을 알아챌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니. 라헤안시가 아는 리카르디스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와 같은 도박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로젤린이 일반적인 마인과 다르다는 얘기를 자신이 발설하지 않으리라, 확신을 가진 것이다.
라헤안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좀 반골같이 굴기는 했지.’
거기에다가 뭔 사건만 터지면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고 있었으니. 자신의 마음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향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정보일 뿐,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섣부르게 터트렸다가는 얻는 것도 없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라헤안시가 그 결과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걱정하는 일은 ‘죽기밖에’가 아니라 ‘얻는 것도 없이’였다.
하지만 제 형,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사건은 급격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큰 것과 큰 것이 부딪쳐 그사이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라헤안시는 곧 그 소용돌이에 뛰어들 때가 오리란 걸 알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달래고 있는데 옆에서 베르움이 울컥 화를 냈다. 요즘 카드 게임에서 자주 지더니 성미가 까다로워졌다.
“또 혼나셨습니까 대신관님? 제발 행실 좀 똑바로 하세요! 제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놈이! 오늘은 아무 짓도 안 했거든? 편들어 주는 건 내 양심상 바라지도 않는다만, 누명을 씌우지는 말아야지!”
라헤안시는 창밖으로 제 신발을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질 낸 후, 시시각각 멀어지는 신발을 주우러 갔다.
18
짝짝짝짝짝…….
방 안을 울리는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들, 큰뿔산양 후작가의 하녀들, 그리고 클로에까지. 모두 감명 깊은 표정으로 박수쳤다. 그 옆에서 레티시아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듯한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이 어찌나 완벽한 작품이란 말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우십니다, 로젤린 경. 정말로요.”
“고맙습니다, 레티시아 경.”
클로에는 지난날의 악몽을 잠깐 떠올렸는지 눈물을 글썽이더니 손수건으로 톡톡 눈물을 훔쳐 냈다.
“로젤린 경, 한 번만 제자리에서 돌아 볼래요?”
로젤린이 빙그르르 돌았다. 하얗게 빛나는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클로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남작 부인, 정말….”
“예, 제 인생의 역작입니다! 제 모든 기술과 인력을 동원한!”
로젤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경했다. 과거 로젤린의 어머니, 에델바이스가 사 준 드레스도 소매와 치맛자락이 풍성하고 반짝반짝해서 예쁘긴 했지만, 그녀의 안목으로도 지금의 드레스가 자신에게 훨씬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니었다. 몸의 선을 따라 딱 달라붙어 내려오는 드레스 라인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었으나 엉덩이 아래를 기점으로 뒤편으로 넓게 퍼졌다. 흰색의 천에는 레이스와 자수를 덧대었고, 반짝거리는 보석도 촘촘히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드레스의 상체 부분은 몸 안쪽을 감싼 불투명한 흰색 천 위로 레이스가 겹쳐져 있는 형태였다. 덕분에 가슴을 덮은 하얀색 천으로부터 하얀 꽃과 식물이 퍼져 나가며 자라나는 것같이 보였다. 그 레이스는 어깨와 쇄골을 넓게 드러내며, 팔을 꽉 감싸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겹쳐진 천이 없이 레이스로만 덮은 팔과 가슴 윗부분은 로젤린의 살결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로젤린이 신은 신발 또한 하얀색에 보석으로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대체 보석이 몇 개가 달린 것인지 모를 화려한 귀걸이를 장착한 상태였다.
“귀가 엄청 무겁습니다. 무기로 써도 될 것 같은데요.”
로젤린은 여차하면 귀걸이를 던져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클로에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케이크!”
“예?”
“그 귀걸이 한 쌍이면 케이크 860개 정도를 살 수 있어요, 로젤린 경!”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는 대체 귀에 뭘 걸고 있는 겁니까?”
860개의 케이크?
“로젤린 경도 참. 귀걸이를 걸고 있잖아요? 참고로 옷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까요. 먹다가 묻히고, 누구 패서 피 묻히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피는 잘 빠지지도 않아요.”
“먹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어쩜, 착하기도 하지.”
엄청난 결의가 느껴졌다. 클로에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움직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목각 인형에다가 드레스를 입혀 둔 것 같았다. 클로에가 호호 웃었다.
“무도회 드레스가 아니라 예복 같네요. 하얀색이라 그런가.”
건국제 무도회에서 흰색이 허용되는 것은 오직 황족의 피를 이은 자들과 그들의 파트너뿐이었다. 수백 중에 오십 명도 안 되는 숫자. 모르긴 몰라도 많은 자들의 이목이 쏠릴 게 분명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입은 드레스의 색뿐 아닌 많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을 테다.
“약간의 문제를 꼽자면…….”
지금 로젤린은 갓 태어난 동물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네 발로 기어 다닐 것 같았다.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엉덩이 넣고.”
클로에가 뒤로 쭉 빠져 있는 로젤린의 엉덩이를 밀었다.
“가슴 펴고. 턱은 살짝 아래로.”
클로에는 계속해서 로젤린의 턱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날개 뼈 중앙을 부드럽게 눌렀다. 평소에 보던 로젤린의 곧바른 자세였다.
“음, 좋아. 이렇게 다녀야 해요, 알겠죠 로젤린 경? 엉덩이 빼면 혼나요.”
클로에가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클로에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참을성도 없으셔라.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마중 나오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