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58화 (158/220)

158화.

“과거의 누이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제 누이이기는 하거든요.”

“그래그래, 아주 우애가 두터워 보기 좋다. 아무튼, 상상해 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너희 어머니가 네 누이의 심장에 칼을 꽂고 있는 거지.”

상상만으로도 기가 막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감히 상상도, 가정도 할 수 없었다.

“너라면 그걸 봤을 때 어쩔 것 같냐.”

“…말리…… 겠지요.”

“그리고?”

그리고?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뭘 어떻게 할까. 왜 죽이려 했느냐 물어봐? 어머니와 대치하고, 싸워? 자신은 뭘, 어떻게 해야…… 혼란스러워하는 칼릭스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런 거야.”

그런 거였다. 칼릭스는 마카롱이 말하고자 한 바를 이해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조차. 마카롱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였던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후 칼릭스는 다른 점을 조명했다. 마카롱이 그들의 상황을 다른 무엇도 아닌 로젤린, 에델바이스, 칼릭스 혈연관계인 세 사람에 비유했다는 사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마카롱에게 디에즈, 그의 존재란 무엇인가.

디에즈가 드러낼 때까지 마카롱은 그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 존재들. 그 종족끼리 공유하는 어떤 깊은 관계와 감정이 있다고 봐야 마땅했다. 로젤린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가 어디서 왔는지도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5황자는 왜 누이를 찔렀나.’

깊은 곳에 잠재된 본능 같은 호의를 짓눌러 뭉개 버리고, 비틀어 쳐내 버릴 강한 악의가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칼릭스는 그 악의가 로젤린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칼날이 로젤린의 심장을 가르려 했다 하더라도.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제 누이의 말대로 죽이고자 했다면 기회는 많았다. 이보다도 더 좋은 기회들이. 그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벼랑 끝까지 몰리고 나서야 터트렸다. 칼릭스는 디에즈가 로젤린을 해친 일련의 과정에서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해쳐야 했는가? 왜 반드시 해야만 했는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동안 우정을 쌓아 온 로젤린이 아닌, 언제고 그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2황자의 충실한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가 방해가 되었던 것이리라.

디에즈의 알수 없는 분노는 리카르디스를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기야, 검은달과 손잡고 리카르디스를 죽이고자 수십 수백 번 암살 시도를 한 사람은 엘피디오지만 그 뒤에 디에즈가 있었으니. 리카르디스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디에즈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디에즈는 왜 리카르디스를 죽이고자 하는가? 그 악의는 어디서?

칼릭스가 아는 한, 리카르디스와 디에즈 간의 큰 갈등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디에즈’가 아닌, 지금의 디에즈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더욱 깊고 오래된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왔던.

생각해 보니 마카롱도 인간이고 황실이고 기분 나빠서 한 공기 마시고 살 바에 차라리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겠다는 말을, 독수리의 모습으로 간간이 하고는 했다. 종이 달라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부감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마카롱도 디에즈와 같은 감정을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본인의 성정이 유난스럽게 신경질적인 줄 알았는데…….

“뭘 봐. 콩만 한 게 확 씨…….”

이렇게.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뭔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마카롱 또한 그 악의에 잠식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디에즈가 그랬듯, 제 누이의 가슴에 칼을 꽂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로젤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마카롱님.”

마카롱이 발을 까딱이며 계속하라는 뜻을 전했다.

“제가, 마카롱님에게…… 검을 들지 않아도, 됩니까?”

마카롱이 으하하 하며 웃었다. 웃음이 끊기는 마디마디마다 몸을 꿈틀꿈틀 떨어 대는데 약간 미친 사람 같았다.

“아, 웃긴 놈일세. 들라고 하면 들고, 들지 말라 하면 들지 않을 거냐?”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마카롱이 말했다.

“아까 내가 너의 이해를 돕는다 하고 말했잖아.”

칼릭스는 마카롱의 말을 다시 돌이켜 생각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로젤린을 찌르고 있었다. 그랬을 때 나는 어쩔 것인가.

‘아…….’

칼릭스는 마카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을 다름 아닌 칼릭스, 자신에게 빗대지 않았던가. 사고를 못할 만큼 당황하다, 굳어 버렸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런 나는 결국 어쩌겠어.”

로젤린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할 것이다.

“그런 거야.”

그런 거였다. 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나.

“기왕 감사할 거면 머리 숙여 절하는 쪽이 좋다. 한참 위에서 네 정수리를 보는 기분이 각별할 것 같아서.”

진짜 이 사람……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칼릭스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에서 실려 오는 소리였다.

까득, 까득…… 까드득…….

손톱 같은 날카로운 것이 단단한 무언가를 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칼릭스는 팔에 돋은 닭살을 슥슥 쓸며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마카롱도 몸을 돌려 눕고는 머리를 슬쩍 들었다.

까득…….

칼릭스의 목덜미에 소름이 잔뜩 돋은 그때, 열린 창문 틈으로 사람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칼릭스는 악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창문틀을 꽉 부여잡은 몇 초 후, 검은 인영이 칼릭스의 시야로 쑥 솟아났다. 어두운 밤이 배경이기도 했거니와, 그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에 칼릭스는 정말 식겁했다.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은 것은, 어떤 두려운 검날이라 할지라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가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로젤린과 칼릭스의 눈이 딱 맞았다.

“……누님?”

슬그머니 칼릭스의 눈치를 살피던 로젤린은 바닥에 누워 있는 마카롱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마카롱!”

로젤린이 창문을 훌쩍 넘어 우다다 달려왔다. 헐렁한 셔츠와 바지 차림새에 두 남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어떻게 봐도 남자의 옷이었다.

“너, 이…….”

“누님, 그 옷…….”

두 사람이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로젤린이 마카롱 위로 풀썩 엎어지며 그를 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꼭. 마카롱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디 갔었어.”

로젤린의 볼이 남자의 가슴에 꾹 눌렸다. 덕분에 한쪽 눈이 작아졌다. 마카롱이 그녀를 슬쩍 내려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모자란 자식이 귀엽다더니…….’

마카롱이 투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몸은 어때.”

“완전 좋아.”

“기분은 어때.”

“진짜 좋아.”

로젤린이 히히 웃었다. 마카롱이 눈썹을 찌푸린 채 슬쩍 미소 지었다.

“로젤린.”

“응.”

마카롱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지켜 줄게.”

로젤린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 * *

누구지?

“어서 와라, 라헤.”

이 녹아내릴 듯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

“저번에는 수고가 많았다. 덕분에 로젤린 경이 크게 호전되었어.”

눈을 휘며 웃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그 어떤 화공도 그려 내지 못할 고고한 아름다움이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야!’

저번 방문 때만 해도,

[이 자식,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서 이렇게 늦어! 부른 게 언제인데! 사냥 대회에서 한 것도 없으면서 피곤하다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나 했겠지! 이 굼벵이 같은 놈!]

이라는 말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던 인간이! 라헤, 저번에는 수고가 많았…… 따위의 치하와 함께 상냥한 목소리와 미소로 자신을 반기다니. 라헤안시는 코를 씰룩거리며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예에 형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아우가 아주 기쁩니다……. 가,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귀한 손님이 왔는데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 뭐라도 들겠니?”

라헤안시의 팔에 소름 돋았다. 이 형이 어디서 뭘 잘못 주워 먹었나 싶은 생각과 상반되게 말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에헤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라헤안시는 연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리카르디스가 손수 안내해 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금세 다과가 차려졌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내리깔고 온화한 표정으로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햇살이 반짝반짝 떠도는 가운데 느슨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의 분위기는 갓 구운 식빵 안쪽보다도 보드랍고 따스했다.

로젤린을 치료했다고 살갑게 대할 거였으면, 그 당일 날 이 소름 돋는 광경을 목도했으리라.

그는 직감적으로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사이에 불고 있던 냉랭한 겨울바람이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라헤안시는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서 내가 이 무슨 못 볼꼴을…….

“라헤.”

“예, 형님!”

기합이 바짝 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가 ‘녀석, 참 귀엽기도 하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급한 일이 있다면서.”

“아차.”

라헤안시는 비로소 본래 목적을 자각했다.

“또 신전 선에서 덮일 사건이라 형한테까지는 소식이 안 들어갈 거 같아서.”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숙이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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