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57화 (157/220)

157화.

그의 경직은 곧 풀리게 되었다. 로젤린이 흥얼거림과 동시에 리카르디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아니 세상에.

‘무슨…….’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완벽하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로 춤을 잘 췄다. 리카르디스는 한 걸음 떨어져 달빛 아래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실수로 그녀의 발을 밟고 말았다.

로젤린은 잠시 움찔했지만 물 흐르듯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리카르디스는 괜히 멋쩍어 흠흠 하는 소리를 냈다.

“……안 아프나?”

“깃털 같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웠다. 깃털 같을 리가! 180을 넘는 근육덩어리 깃털이 어디 있어! 슬쩍 발밑을 보니, 심지어 그녀는 맨발이었다.

“신발은 어디 두었나.”

“젖어서 르원 경이 뺏어 갔습니다. 실내화는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양과 형태이기에, 벗었습니다. 방해됩니다.”

대체 춤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깊은 건지. 리카르디스는 잠시 춤을 중단하고 신발을 벗었다. 또 그녀의 발을 밟는 불상사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리카르디스는 살짝살짝 스치는 온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맨손을 잡는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닿을 리 없는 맨발, 그 살갗이 서로 부드럽게 스치니 온 감각이 발로 쏠리는 것 같았다. 로젤린도 간지러운지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손을 잡아 올려 그녀를 한 바퀴 돌렸다. 머리카락과 셔츠가 나풀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이 동작을 재밌어 하는 것 같다 생각해서 그녀를 두세 바퀴 더 돌렸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전하, 무도회에서 실수 하셔도 됩니다.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힘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가서 리카르디스는 차마 웃지 못했다. 춤 연습을 좀 해 둬야 할 듯했다. 로젤린이 무도회에 한가득 펼쳐질 음식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꿈과 희망이 넘쳐 나는 공간이었던가 그곳이? 빛나고 아름다운 선율 속 사람들이 웃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녀는 그 극소수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으나……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남들과 똑같이, 웃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을 꽉 잡은 후, 자리에 멈춰 섰다. 로젤린도 그의 행동에 거스르지 않고 멈췄다.

“로젤린.”

“예, 전하.”

“무도회를 기대하는 중 미안하다만…… 좀 지켜 줘야겠다.”

“네, 걱정 마십시오!”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리카르디스가 쓰게 웃었다.

“나 말고.”

로젤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황제 폐하.”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시, 싫…… 싫은……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좀 위험한 상황인 듯하다. 황제 폐하가 죽든 말든 나랑 아무 상관이 없고, 사실 빨리 죽었으면 좋을 것 같은 인물 중 한 명이지만, 지금은 곤란해. 지금 폐하가 돌아가셨다간 일라베니아는 십중팔구 내전이 터지고 그 틈을 타서 발타가 쳐들어올 거다. 아니면 엘피디오 그 멍청한 놈이 발타를 끌어들여서 나를 치려고 하거나.”

로젤린이 마구 손짓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다. 안될 것 같은 이유를 꺼내고 싶은데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걸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입가의 호선이 뒤집혀져서 안쓰러웠다.

“평생 그러라는 게 아니라, 무도회 때에만. 황제 폐하를 둘러싼 호위는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성기사를 포함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오십여 명이 곁을 항상 지킨다. 일상적으로 금강석 성내에 있을 때 죽이는 건 힘들 테니, 그 호위망이 얕아졌을 때. 다가오는 건국제의 무도회가 적기라 보고 있다. 사실 그대뿐 아니라,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해 여러 가문이 폐하를 지키고 있을 거라,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아, 그 정도라면…….”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춤을 출 시간이 있을까요?”

“근처에서 황제 폐하를 예의 주시하면서 잠깐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전하, 춤을 출 때는 그렇게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음악과 파트너,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를 조절해야 하는 일종의…… 예술인 것이죠.”

아주 예술인이 다 되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그러면 못 추겠군. 아쉽게 되었어.”

“……그렇지만 저는 희대의 천재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인 만큼, 폐하를 지켜보며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수식어를 달고 있었는지는 또 처음 알았군. 어찌되었건 유능해, 역시 내 기사야.”

로젤린이 은근히 기뻐하다가 아, 하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런데 누가 폐하를 노립니까?”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눈에 담고만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침묵을 의아해하며 바라보다, 들리지 않는 답을 알게 되었다.

* * *

거대하고 묵직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칼릭스는 제 탁자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부터 손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탁, 창틀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날짐승의 그림자가 인간의 형태로 바뀌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커튼을 뜯어내서 대충 몸에 둘렀다.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온 남자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마카롱…… 님…….”

칼릭스는 마카롱이 누운 맞은편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달싹거리기만 했다. 마카롱이 죽은 듯 눈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왜, 자신만만하게 지키네, 죽이네 할 때는 언제고 네 누이 찌른 놈을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고이 돌려 보냈느냐, 따지고 욕이라도 해 보려고?”

“……해도 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칼릭스는 제 얼굴을 쓸다가 턱을 만졌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난처한 상황에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욕을 해도 되는 상황입니까? 저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기실 그에 대한 원망이 아주 없을 수 없었으나, 그 사건의 당사자, 로젤린조차 하지 않는 원망을 자신이 무슨 수로? 게다가 제 누이를 다치게 한 5황자 디에즈를 고이 보내 준 자가, 마카롱이었다.

마카롱. 로젤린의 혈육이라도 되는 마냥 사사건건 트집 잡고 드잡이질해 대던 그였다. 그 모습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마카롱이 얼마나 능숙하게 연기를 펼치는지는 알고 있으나, 로젤린과 자신의 앞에서 보이는 행동과 말이 꾸며 낸 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칼릭스는 그런 생각에 남은 원망도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었으면, 원망하고 욕하고, 아니면 안 하려고?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되는 게 아닐 텐데.”

“제 착각이 아니면, 욕을 먹고 싶어 하시는 듯 보이는데. 제가 인상이 이래 보여도 욕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누이가 고운 말 바른말을 쓰라 했거든요. 대신 고운 말로 비꼬기는 잘하는데, 그거라도 어떻게 해 드리자면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카롱이 눈을 감은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디 해 보던가.”

“싫습니다. 욕은 못하지만, 심성이 삐뚤어져서 남이 해 달라는 걸 해 주는 성질 머리가 아닙니다.”

“……이게 이제 기어오르네…….”

칼릭스도 그제야 굳은 표정을 피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포도를 한 알씩 뜯어 관성적으로 입으로 넣고 있자니, 마카롱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로젤린은.”

“그 정도의 신성력이 닿으면 죽은 자도 살아날 겁니다.”

“꼴에 능력은 있어 가지고.”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꼴에 능력이 있다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를 가리키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신분이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는 저 시비. 저 적의. 며칠 행방불명된 사이 많은 심경의 변화를 거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기질은 어디 가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대체, 며칠 동안 어디서 뭘 하셨습니까. 누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마카롱이 자신을 떠날지, 혹시 디에즈처럼 자신을 미워하게 된 건지. 물어볼 당사자도 없으니 답도 얻을 수 없어 애먼 속만 끓였더랬다. 마카롱은 가만히 누운 채로 지친 듯 말을 흘렸다. 칼릭스는 귀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를…….”

“예.”

“나를 찾는 여행을…….”

“……… 말씀해 주기 싫으시면, 그렇다고 말을 하시면 될 텐데요.”

마카롱이 소파 위를 뒹굴며 낄낄댔다. 넓다고는 해도 소파 위. 그렇게 격하게 굴러 댔으니 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쿵. 떨어진 마카롱은 일어서려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다시 얌전히 누웠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포도를 담아 놓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칼릭스는 어이없어서 눈만 깜박였다. 떨어진 건 좀 고소했는데, 저렇게 미동 없이 누워 있으니 시체같이 보여 섬뜩했다.

“……아프십니까?”

“겁나게 마음이 아프다…… 저 달은 내 마음을 알까…….”

중년의 남성이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칼릭스가 짜증 부리지 못했던 이유는, 살짝 보이는 그의 옆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기 때문이었다. 마카롱은 엎드린 그대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해를 도와주자면…….”

“예.”

“진짜 로젤린. 지금 가짜 말고.”

“……가짜, 아니거든요.”

“우쭈쭈, 우리 애기 삐졌니.”

달래는 말투가 성의라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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