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리카르디스는 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원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흘렸다.
“로젤린.”
“예.”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눈썹 끝이 아래로 처지는 모양에서 그녀의 감정을 읽어 냈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방황하며 손마디로 제 입술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언젠가부터 그녀를 로젤린이라 불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야 ‘로젤린 경’이라 불렀으나, 단둘이 있을 때는 높은 비율로 그녀의 이름만.
이번 일로 자신이 화를 내며 ‘로젤린 경’이라 불린 일이 서운했던 것이리라. 고작 이름 한번 불렸을 뿐인데 로젤린은 행복하게 웃었다. 케이크 한 판을 받았을 때보다, 새로 보는 음식이 가득 채워진 만찬장을 볼 때보다도.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음식보다 나은 취급을 받았다는 일에 그렇게 기뻐했다는 사실은 조금 나중에 자각했지만, 지금은 얼굴에 열이 올라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마지막이 우는 모습이라 그랬던 걸까. 욕실에 있는 내내 의기소침하게 눈치 보는 모습만 봐서 그랬을까. 로젤린이 웃는 모습이…….
방황하던 시선이 맞았다. 리카르디스는 당황했다. 따뜻한 온도, 장미 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코끝을 맴돌았다. 욕조 안에 오래 있어서인지 그녀의 피부가 불그스레하게 변해 있었다. 장미 꽃잎이 그녀의 흰 셔츠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흐릿한 수증기가 그녀의 모습을 아른아른하게 만들었다. 아까 전 그녀를 안고 있었을 때의 감각이 손끝에 새겨지듯 떠올랐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귓가가 홧홧해지며,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했다.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난다. 진짜 큰일 나. 비록 그녀가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악 소리쳤다.
“페르벨강! 젠장!”
쾅!
욕실의 벽 한쪽에서 르원이 튀어나왔다. 그 빠른 등장에서 르원이 미리 비밀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튀어나온 르원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흉흉하게 하고 검을 뽑은 르원이 입을 다물고 욕실 내부를 훑었다. 그는 이내 미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른 욕조, 장미 꽃잎, 남자와 여자. 그리고 호위 기사까지. 아니, 명백히 한 명의 존재가 이질적이잖아. 대체 왜 부르신 거야.
“페르벨강을 드시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24시간 중 하필 지금 이때에? 잠시도 미룰 수 없을 만큼이나?”
“아니, 새 옷을 들고 와! 로젤린 경이 입을 것으로!”
리카르디스는 붉어진 얼굴로 성질냈다. 르원은 그제야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장미꽃잎이 큰일을 하고 있구나.
* * *
로젤린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깜빡 졸다 눈을 뜨니 리카르디스가 앞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생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화가 풀렸다던 리카르디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확 좁혔다. 그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뭐 그런 건가?”
리카르디스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서 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평소에 나에게 불만이 많았나 본데. 때를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걸 보니.”
“에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젤린은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잠자코 듣던 중,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제 몸을 향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헐렁하지만 문제없는데.
“급해 보이기에 일단 집히는 대로 들고 온 겁니다! 이 밤중에 여성복을 무슨 수로 구합니까. 시녀들의 옷도 맞지 않을 것이 빤한 데다가 로젤린 경이 전하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근신 기간에 몰래 빠져나온 걸 들키면 안 되니, 경의 옷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리카르디스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욕실 안에서는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로젤린은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며 자신의 옷자락을 잡았다.
“벗겠습니다!”
“아니!”
“안 돼, 경!”
리카르디스와 르원이 소리 높여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로젤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에게 소근거렸다. 거, 보십시오. 눈치 보지 않습니까. 이런 씨, 여성복도 구비 해 두지 않고 뭐 하나 대체. 아니? 이 전하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여성복이 필요한 나날을 보낸 적이나 있으십니까?
멀리 떨어져서 소곤거리며 다투고 있었지만, 로젤린은 모든 대화를 한 음절 한 음절 똑똑히 들었다.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본데…… 혹시 여성복을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걸까! 역시 우리 전하. 배려심이 남다르시다! 로젤린은 다시 나서서 의견을 피력했다.
“치마는 불편해서, 바지가 좋습니다. 좀 헐렁헐렁하지만 잘 묶어 뒀습니다!”
“그렇군…….”
리카르디스는 자신은 매우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그리고 전하의 냄새가 나서 전 좋습니다.”
리카르디스의 숨이 잠깐 멈췄다. 르원이 웃음기를 누르기 위해 입가를 꾹 눌렀다.
“괜찮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르원!”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르원이 음흉한 미소를 걸고 리카르디스를 쳐다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소파 위의 쿠션을 그에게 던졌다. 르원이 슬쩍 피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침 문밖에 딱 달라붙어 염탐 중이던 잇세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이 형이 왜 이래, 진짜. 촌스럽게.”
“이 자식, 르원. 너는 너무 방임주의야!”
잇세리온은 방 안에 있겠다고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으나, 르원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질질 끌려가며 반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작아졌다. 그리고 뚝. 끊겼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는 문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이걸 어쩌면…….
“전하?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 많았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염탐했다. 흰 셔츠는 그녀의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크고 헐렁했던 터라, 셔츠를 입었다기보다 파묻혀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그에 더해 바지 밑단을 몇 번 접어 올려 가느다란 발목이 보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입고 있는 옷이 전부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가슴 안쪽부터 기묘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달콤한 향이 묘한 분위기의 형성에 힘을 싣고 있었다.
‘……달콤한 향?’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향초 여러 개로 장식된 테이블에는 푸짐한 안주와 와인, 잔이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럴 시간이 있었어?’
자리를 깔다 못해 조명해 놓은 느낌에 도리어 무언가가 한풀 꺾였다. 좀 우습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욕실에서부터 계속되었던 당황을 걷어 내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기왕 차려 놓은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그가 병을 들자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마실 생각도 하지 마. 환자가 어딜.”
“……다 나았습니다.”
“어림도 없다.”
리카르디스는 딱 잘라 말하며 포크로 소시지를 찍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펴고선 행복하게 받아먹었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의 와인 안주라 하면, 치즈나 과일같이 간단한 목록이 주를 이뤄야 할 테지만, 테이블 위는 만찬장을 축소한 듯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로젤린의 기호에 맞춘 것이 분명했다. 르원, 그 남자. 정말로 치밀했다. 누가 잇세리온 동생 아니라고 할까 봐.
며칠간 칼릭스, 레이몬드를 통해 로젤린이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노라 보고를 받았던 참이라, 그녀가 음식에 무서운 열정을 불태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눈길을 주는 접시를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로젤린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잔의 수만큼 취기가 돌았다.
로젤린이 상급 기사 카일로를 해임하라며 청탁을 넣고 있을 때, 밖에서 음악 소리가 실려 왔다. 어디에서든 연회가 계속되고 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로젤린이 쫑긋 귀를 세우며 노래를 듣더니 화색을 지었다.
“아는 노래입니다.”
“유명한 곡이다.”
“춤을 출 때 항상 이 곡으로 연습합니다.”
“춤도 출 줄…… 알겠군. 곧 무도회니.”
“예, 종류에 따라 다 익혀 두었습니다. 예법 선생님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붙여 준 예법 선생은 가을안개 백작, 스타스 단장의 첫째 누이로, 그의 성미와 똑 닮아 있어 무엇이든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는 얘기이리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어떤 춤도 출 줄 몰라 그녀가 경악하며 찾아왔었는데. 정말 여러모로 재주가 대단했다.
“대신, 파트너가 못한다거나, 보다 뛰어나거나, 합이 잘 맞지 않는다거나, 여러 가지 경우가 있기에 직접 맞춰 봐야 한다고 했는데…….”
로젤린이 말을 흐리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안되면 다른 동료 기사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네스터 경이 해 준다고는 했었는데요.”
“지금 맞춰 보지.”
리카르디스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빛이 강하게 새어 드는 테라스 앞. 리카르디스는 하얗게 빛나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며 왼손을 들었다. 로젤린이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춤을 추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리카르디스는 티 나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마주 닿은 손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싼 오른손이 더욱 문제였다. 손에 헐렁한 셔츠가 감기더니 가느다란 허리가 천 한 겹을 두고 닿았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잠시 시간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