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잇세리온은 리카르디스의 넓은 등을 보며 아련한 감상에 잠겼다. 그렇게 어리고 작은 아이였는데…….
“그게 언제였지요. 전하께서 겨울석류 자작가에 오신 지가…….”
잠깐. 지금…… 지금 그걸 하는 거야? 지금? 갑자기?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잇세리온은 작고 어렸던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하나하나의 형용사에 어울리는 추억들을 꺼내어 말했다. 본디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었으나, 잇세리온은 그 미화된 추억을 더 갈고닦아 아름답게 포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자신을 형아라 부르던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르원을 실은 짐마차 백 개가 있어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며 행복해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의 나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잇세리온을 뒤로,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슬쩍 내려 로젤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는 잇세리온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에게 그런 과거가! 잇세리온 비서관님을 형아라고 불렀대! 사탕이 녹아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먹다가 남겨 뒀대! 선물 받은 망아지가 너무 좋아서 마구간에 가서 몰래 자다가 들켰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귀담아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했다.
누구는 가슴 졸이며 한 사람을 숨기고 있건만, 다른 누구는 즐겨도 너무 즐기고 있었다. 얄미웠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로젤린은 꼬집히면서도 즐거운지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손길이 닿은 곳의 그을음이 닦여지는 것을 보고, 물기 젖은 손으로 그녀를 대충 세수시켰다. 어휴 꼬질꼬질.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잇세리온의 말이 끊겼다. 리카르디스는 황급하게 해명했다.
“감동적인 얘기였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그렇지요. 그렇게 어리고 약한 분이셨는데. 언제 이렇게 자라셨는지…… 감개무량합니다.”
잇세리온이 일장 연설하던 추억들이 다 흘러간 가운데, 약하다는 말이 남아 리카르디스를 웃게 했다.
“그래. 많이도 약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잇세리온이 그의 등을 가만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최근 리카르디스가 병적일 정도로 일에 매달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 필사적임에 잇세리온은 언제나 가슴을 졸였다. 열중한다는 것은, 온 신경과 마음을 다 쏟는다는 것이었다. 지치지 않을 리 없다. 잇세리온은 그가 조금이나마 편해지길 바랐다.
“전하. 전하께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고, 그만큼의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잃는 것도 많았다.”
“손에 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잃은 것에 비하면 미약할 것이다.”
“앞을 보지 않으시면, 나아가실 수 없으십니다.”
“나아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다.”
전하……. 잇세리온의 약한 목소리가 욕실을 떠돌았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숨죽이고 안겨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흰 셔츠가 젖어 살결이 비쳤다. 그녀의 등에 아프게 새겨진 흉터가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그녀의 흉터를 덧그렸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내가 불안해 보였나, 잇세리온.”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리란 것도 안다. 나를 옆에서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지 않나. 그때 눈물 콧물 흘리던 어린아이가, 지금까지도 눈물 콧물 흘리고 있으니 어지간히 답답한 게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쩌겠나.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약한 사람인 것을.”
“전하…….”
“애달프다는 듯 부르지 마라. 객관적 사실을 짚었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쌓여 있는 껍데기에 배불러 하다가는 엘피디오 꼴이 나겠지. 그 본인은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으니 상관은 없겠다마는.”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이 바람 빠지는 듯 웃는 소리를 들었다. 품 안에 따뜻한 것이 가득 안겨 있었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았다.
“가혹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잇세리온. 단 한 순간도 안주할 수 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하물며 그 엘피디오도 칼릭스 경에게 집적거리고 있지 않나. 그러니 걱정 마라. 내가 약하다는 걸 아는 것은,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괴로워 보일지언정, 그건 나아가리라 내가 마음먹었다는 것이니.”
“가시는 길에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전하.”
툭하면 울고 통곡하는 잇세리온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고맙다.”
물론 이 말에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실신할 것처럼 우는 잇세리온을 르원이 데리고 나갔다.
욕실에는 맺힌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로젤린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장미꽃잎을 가리가리 찢고 있었다.
“……저도, 가시는 길에 언제나 함께 있겠습니다.”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말 안 듣는 사람은 안 데려간다.”
“예?”
“말 안 듣는 아이는 내가 전쟁터에서 구를 때 평온하게 성안에서 하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케이크와 호화로운 음식도 먹고 저녁에는 푹신한 깃털 베개를 베고 숙면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틀었다. 짚을 곳이 없었는지 장미 꽃잎 사이로 나와 있는 리카르디스의 무릎에 제 손을 지탱했다. 순식간이라 리카르디스는 딱히 막지도 못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리카르디스가 숨을 들이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눈썹을 찌푸린 채 애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찰싹 치며, 제 무릎을 수면 아래로 잽싸게 숨겼다.
“내 몸에 손…… 끝 하나 대지 마라. 진짜, 농담 아니다. 이 위험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리고 거리가 너무 가깝다. 떨어져라. 더. 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더. 좋아. 딱 적절하다.”
로젤린이 엉금엉금 기어, 욕조의 반대편 끝에 도달하자 리카르디스는 앓던 이 빠진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로젤린은 아까의 항변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 멀리서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말 잘 듣겠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겠습니다. 정말로요.”
하지 말라, 안된다고 말한 그 수많은 나날이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정말 신빙성이라고는 없고, 신뢰라고는 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그 신빙성 없는 말 이후, 계속해서 자신을 왜 그가 가는 길에 데리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장점을 말했다. 강하고, 암살자 잘 잡고, 사냥 잘하고, 길 잘 찾고,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열성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웃겼다. 피와 독, 비명과 저주가 가득한 길이 뭐가 좋다고 함께 가려고 저러는지. 저가 좋아하는 갖은 맛있는 것과 평온한 일상을 두고 어디라고 가려고 하는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미소를 걸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케틀린에게서 갖은 저주를 받고 왔기 때문일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종류의 분노를 가지고 있는 디에즈와 로젤린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 맹목. 이 충성. 호의적인 감정들.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굳어져 선명한 것들. 그런 것들이 로젤린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낸 것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그대가 다칠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약해 그대를 지킬 힘이 없어서야. 답답하고 화가 났다. 자신을 향해야 마땅한 분노를 그대에게 터트렸다. 잘못한 것은, 내 쪽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로젤린 경. 내가 너무 치졸했다. 스스로를 탓하지 못해, 그 화살을 그대에게 돌렸어.”
로젤린이 눈을 깜박거리며 제 입술을 매만졌다. 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마구 고민하던 그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모두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화나지 않으신 게 맞습니까?”
그런 계산이었던 듯했다. 자신을 향했던 부조리한 분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칼날이 도사리는 한 가운데, 폭풍의 눈, 기름 머금은 장작에 곧 떨어질 불꽃의 존재를 알면서도. 뭐가 웃기다고 이렇게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지. 리카르디스는 아하하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그대가 나야겠지.”
“아, 저는 치졸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용서했다면서 사람 공격할 건 다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 그 대범함을…… 본받도록 노력하겠다. 어찌 되었건,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은 아니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라. 뭐든 들어주겠다.”
뭐든 들어주겠다.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눈빛이 흡사 맹수처럼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내뱉자마자 제 말을 철회하고 싶어졌다. 덫에 걸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아냐, 그건……. 그건 혼나…….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거야! 리카르디스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로젤린이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던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일은…… 아니다, 사람이 한 입으로는 두말할 수 없지. 뭐가 필요하나, 경.”
입꼬리가 씰룩 씰룩 떨렸지만, 리카르디스는 각오했다. 넓은 욕탕,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뚫고,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