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54화 (154/220)

154화.

리카르디스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돌아오자마자 서류부터 처리하려 드는 그의 뒤에서 잇세리온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전하, 침실에 들지 않으신지 벌써 삼 일째입니다.”

어지간하면 무시하겠건만, 잇세리온이 너무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쓰러질 것 같은 건 잇세리온 쪽이었다. 더불어 르원도 허리에 팔을 얹고는 짐짓 혼내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안 그래도 없는 피곤 있는 피곤 다 끌어안고 사시는 분이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지켜보는 저희들 마음도 이해를 해 주셔야지요.”

“알았다. 알았다.”

두 형제의 공격에 리카르디스는 두 손 들어 항복했다. 아무래도 예전 겨울석류 자작가에서 지낼 때 자신을 길러 준 이들이다 보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두통이 지끈거려 와인을 마시고 소파에서 잠시 눈을 감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잇세리온이 침대가 주인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매일매일 새 시트로 갈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아냐며 대성통곡을 하는 통에, 오늘은 침실로 들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니, 시트를 가는 건 시녀의 몫이 아니던가. 거짓말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물을 받아 두었으니, 씻고 침실로 드시지요.”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대한 욕조에는 장미 꽃잎이 빽빽하게 떠 있었다. 이거 하지 말라니까 진짜…… 다음 날 장미 향 엄청 난다니깐…….

뜨겁지 않은 온도가 기분 좋았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퍼서 세수했다. 온기가 몸에 스며들어 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대어 머리를 뒤로 젖혔다. 따듯한 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디에즈와 케틀린.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과 신경전을 벌였던 피곤한 하루였다. 눈을 감아 까만 시야 위로 로젤린이 떠올랐다. 울던 모습이 마지막이라 신경 쓰였다. 잘 지내고 있을지.

“으아악! 이런, 씨……!”

리카르디스는 눈을 떴다가 높은 천장에 팔다리를 쫙 벌려 매달려 있는 로젤린과 눈이 딱 마주쳤다. 기겁해서 욕할 뻔했다. 로젤린이 슬그머니 그의 경악 어린 시선을 피했다.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붉히며 제 가슴을 가렸다.

아랫부분이야 장미 꽃잎으로 다 가려져 있어도, 잠깐, 들어 올 때부터 봤을 거 아냐. 리카르디스가 서슬 퍼런 음색으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나.”

로젤린이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모기만 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안 봤을 리가 있나! 리카르디스가 분개하려던 차, 밖에서 르원이 급하게 그를 부르며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리카르디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다. 잠깐 미끄러졌을 뿐이다.”

“예. 아, 전하 어떤 와인을 드시겠다 하셨지요?”

암호였다. 여기서 페르벨강이라고 했다가는 르원이 떠난 척, 했다가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올 것이다.

“더거.”

“……다른 걸 드시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더거. 더거 17년산! 나는 더거 17년산이 좋다! 맛도 좋고 향도 좋아! 떫은 게 딱 내 취향이야!”

이상 무. 이상 무! 이상 없다고! 리카르디스가 성내자 르원이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가 후, 한숨 쉬고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내려와. 그 뜻을 읽은 로젤린이 머뭇거리며 이동했다.

반들반들, 매끄러운 벽에 습기가 맺혀 있는데도 차근차근 잘 내려왔다. 그러다 거의 다 와서는 삐끗하고 미끄러졌다. 리카르디스가 기겁하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 로젤린이 떨어졌다. 출렁, 욕조 안의 물이 흔들리며 장미꽃이 춤을 췄다.

눈이 딱 마주쳤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어 꼬질꼬질했다. 대체 어딜 통해 온 건지 감도 안 잡혔다. 꼬질꼬질한 로젤린이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안고 고민하다가 찝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옷, 젖었나?”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덩이와 등 부분이 축축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녀를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안 젖었다면 밖으로 바로 건져 내면 될 테지만, 젖은 채로 오래 밖에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것인가.

로젤린은 따듯한 온기와 향긋한 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 살짝 물을 휘저었다. 장미 꽃잎이 울렁거리며 퍼져 나갔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러다간, 보인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손을 딱 잡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로젤린 경. 방 밖으로 걸음 하나 벗어나지 말라 했을 텐데.”

싸늘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그날의 뒷모습을 덜컥 떠올렸다. 어떤 감정, 애정 한 줌 읽어 낼 수 없는 사무적인 목소리. 언제나 아름답던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차가웠다. 지금처럼. 로젤린은 고개를 푹 떨궜다.

“고개를 숙이지 마라.”

“예?”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아래를 보면 어떻게 해! 장미꽃이 아무리 빽빽하게 떠다녀도 그렇지!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울컥했다. 고개도 내 마음대로 못 숙이나!

“……그렇게 숙이면…… 아무튼 깊은 사정이 있다. 나를 계속 봐라.”

로젤린은 다시 눈동자를 굴려 리카르디스를 쳐다보았다. 잔뜩 축 처진 시선이 닿자, 리카르디스는 한층 더 당황했다. 물에 빠진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눈을 보니, 가슴 안쪽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서,

“아니다, 저쪽. 약간 왼쪽에 저 문양 보이나, 경. 저걸 보고 있어라.”

똥개 훈련 시키듯 계속 말을 번복해 댈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의기소침해서 하라는 대로 그의 왼쪽 뒤,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에 눈을 고정했다. 서로에게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난 채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로젤린이 문양의 개수를 세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무탈하신지 걱정이 되어서…….”

한풀 꺾이다 못해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의 마음이 흔들렸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던 사람이,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지 않은가. 너무 화냈나? 사람이 좀 너무 화내긴 했지.

지금도 비록 명령을 어겼지만, 대화를 하겠다고 온 사람한테 너무 박하게 대한 게 아닌가 하고,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전하께서 주무실 때까지 숨어 있다가, 잠깐만 지켜보다 나가려 했습니다….”

“……세간에서 그런 그대의 행위를 뭐라 부르는지 아나, 경?”

“충정……?”

“범죄라 부른다. 하지 마. 오늘은 미수에 그쳤으니 봐주겠다.”

참고로, 리카르디스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고 싶어 했던 사람은 로젤린뿐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하루에도 수십 통씩 리카르디스에게 연서를 보냈던 귀한 집 아가씨로, 그녀와 로젤린의 공통점은 둘 다 실패했다는 점이고, 차이점이라면 잡혀갔느냐 잡혀가지 않았느냐로 갈렸다.

로젤린은 ‘범죄라 부른다’라는 말에 곁눈질로 리카르디스를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뭔가, 못 다한 말이 있는 듯, 사고 치고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 봐주시는 건…… 오늘만? 입니까?”

이 사람이 진짜…… 리카르디스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에 쌓아 온 행적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너무 빤히 보였다. 대체 몇 번이나 자는 얼굴을 보고 갔다는 얘기일까.

“그대 진짜…….”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잇세리온이 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리카르디스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무슨 일이냐!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걸 매우 싫어한다 정말로!”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사춘기 소년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워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나 진지한 목소리라 차마 싫다는 둥, 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로젤린은 왼쪽으로 가지도 오른쪽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당황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결의 어린 표정을 하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지금은 미끄러워 벽에 매달릴 수 없습니다! 대신 욕조 안에 들어가면 한 시간 정도는 잠수할 수 있으므로! 맡겨 주십시오!”

“……그거 굉장한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로젤린이 실제로 욕조로 잠수할 듯 머리를 물에 박으려 하자 리카르디스만 기겁했다. 아니, 들어가면은! 안되지! 들어가면, 안된다고!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채 겨우 제지했다. 난장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잇세리온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헉 숨을 들이쉬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 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로젤린의 등에 단단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몸을 돌린 채, 그대로 밀착해서 끌어안았다.

잇세리온이 욕실에 발을 들였을 때는 출렁거리는 붉은 장미꽃잎들 한가운데, 리카르디스가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로젤린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 로젤린이 전부 한 줄로 나란히 있었기에 잇세리온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저,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리카르디스의 자세가 어찌나 척추 건강에 좋을 것 같은지, 감탄할 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잇세리온. 이 근처는 물기로 젖어 있으니, 들어오지 말고 거기에서 편하게 얘기하도록 해.”

배려심이 철철 넘쳤다. 로젤린은 욕조에 입까지 담그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에 퍼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하나로 모아 그녀에게 넘겨줬다. 로젤린도 제 머리카락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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