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53화 (153/220)

153화.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확실하나,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는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했다. 누가 뭐라 해도 검은달에서 간부씩이나 되던 이가 아니던가.

디에즈와 그녀의 존재는 마력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으나, 그들의 행보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숨을 죽이고 일라베니아에 칼을 겨눈다. 오랜 시간을, 인내한다.

“케틀린.”

“부르지 마, 정들어.”

“너는…… 일라베니아의 마인으로서, 일라베니아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지?”

케틀린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어릴 때는 똑똑했는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라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케틀린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욕을 들으면 기뻐하는 그런 부류였나……. 흠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간미 있어 보이긴 하는데,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네. 미안한데 좀 멀리 떨어져.”

이 여자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이나 해, 값은 치르고 갈 테니.”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으나 나름 흥미가 동했다. 케틀린이 이곳에 갇힌 수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심정이나 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달의 간부에게 누가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이유가 뭔가요? 어떤 심정에 저지른 것이죠?’ 따위를 누가 묻겠는가. 동료는 또 누가 있나, 다른 2차 계획이 있나, 검은달의 권력 구조는? 우두머리의 이름은? 규모는? 필요한 정보만 얻기 원했을 뿐이었다.

검은달과 일라베니아의 이러한 대치 구조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달이 일라베니아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일라베니아도 그러하다. 그 당연한 일에 굳이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덕에 리카르디스가 처음이었다. 의외로 순순하게 대답해 준 것은, 그녀의 변덕에 가까웠다.

“일라베니아인이, 타국의 그 폐쇄적인 집단의 간부가 되었다는 의미를, 너는 알까.”

리카르디스는 케틀린의 질문이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느껴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본 적은?”

그녀의 하얗게 비어 버린 눈이 좁은 감옥을 훑었다.

“하루만 있어도 끔찍한 공간에 수년을 갇혀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제 일신의 안녕 따위 상관없이, 제 몸이 닿을 미래는 산산조각 나는 것뿐이리라 예감하면서도 결코 누그러지지 않는, 악의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 생각해?”

“너의 분노는 황실만을 향하는 것인가?”

“리카르디스. 아니란 걸 알고 있구나.”

알고 있었다. 검은달은 황실뿐 아니라, 국경에 근접한 영지나 마을을 몰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죄 없는 이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무슨 죄가 있었을까? 이델라브힘의 빛을 가리고 불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기라도 했나. 개소리하지 말고. 아니란 걸 알잖아. 나는 똑같이 되돌려 주려 할 뿐이야. 왜,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용서해야 할 것 같아? 나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아, 이델라브힘께서는 어찌나 자애로우신지. 뭐든 용서하라 하시네. 네가 얼마나 괴로웠건, 힘들었건, 피부가 화염에 지져지는 고통과, 숨을 말라붙게 하는 까만 연기 속에 죽어 가더라도, 용서해. 뭘 하려 해 봤자 내가 그 나쁜 사람과 같이 나쁘게 될 뿐이며, 용서야말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아 주신다고. 용서해. 용서하라 그래.”

웃음을 머금고 얘기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 빛 아래의 모든 이들이 내 자식이다. 이델라브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그렇게도 적혀 있었지. 그래. 나 또한 이델라브힘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용서해. 내 모든 것을. 너희들이 얼마나 괴롭건, 힘들건! 산채로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끼더라도! 그리 불타 죽은 시체마저 희롱당하는 것을 네 아이들이 본다 해도! 용서해! 나를 용서해! 너희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녀는 격분해 철창에 쾅 달라붙었다. 손을 뻗어 리카르디스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한 발짝 멀어진 상태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달려왔다. 창대 끝으로 밀려난 여자가 넘어졌다.

리카르디스가 만류하자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서 콜록거렸다. 케틀린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안광이 기이하게 밝았다.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죽인다. 갓난아이를 죽이고, 노인도 죽이겠다. 칼로 찔러 죽이고 찢어서 죽일 것이다. 굶겨서 죽이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뜯어내어 고통에 발버둥 치게 하다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고, 물에 빠트리고, 불에 태우겠다. 너희들이 오랜 세월 망각하던 고통을, 뼈에 하나하나 새겨지도록.”

여자가 기어와 철창을 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도록.”

그녀가 덜덜 떨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철창에 손을 뻗었다. 하얀 빛이 그녀의 다친 손을 떠돌았다.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자 케틀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더러운 것에 닿은 듯 연신 제 손을 옷자락에 닦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거친 손놀림이었다.

“질문의 값을 치른다 했다. 두면 썩어 들어 팔까지 잘라 내야 할 것이다.”

케틀린이 깔깔, 감옥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병사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네놈들의 주인에게 일러라. 황실에 병신 천치 머저리가 있다고! 이거 하나 못 죽이는 걸 보니 다들 똑같은 수준이겠지마는!”

그녀는 키득대며 웃다가 리카르디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되었건. 고맙게 되었다 리카르디스. 감옥 생활은 지루해서, 이따금 자극제가 필요하기 마련이거든. 그걸로 값을 치렀다 해 주마.”

리카르디스는 별다르게 말을 잇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정말로, 이들에 대해 잘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검은달과 일라베니아의 싸움은 그저 사상과 사상의 차이라 여겼다. 그러나 별개의 문제로 마인에게 이뤄진 모든 일들은 일라베니아의 업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검은달과 마인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만들었다. 누구는 업보라 부르고 누구는 운명이라 부를 것이었다. 덮쳐 오는 악의는 사납다. 과거 일라베니아가 그들에게 그랬듯이.

리카르디스는 다시 병사들을 저 멀리 물렸다. 그리고 얘기했다.

“그대는 그대의 일을 해라. 원한을 만든 자를 모두 죽여라. 칼로 찌르고, 산 채로 불에 태워라.”

“새로워. 오늘따라 유독 그렇단 말이지. 일라베니아의 황자가 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음, 어쨌거나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든다니, 그거 기쁜 얘기로군. 하지만 나는 그 원한이 닿지 않아야 할, 모든 것을 지키겠다. 그것이 일라베니아의 황자가 할 일이므로.”

리카르디스는 이 감옥에서는 보일 리 없는 밤하늘을 떠올렸다. 둥그런 달. 세상을 비추는, 또 하나의 빛이었다.

“신이 도와주시겠지.”

그가 몸을 돌려 떠나자 뒤에서 케틀린이 철창을 쿵쿵 쳤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신성 제국 놈들! 허구한 날 신 타령이야!”

리카르디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크게 말했다.

“이델라브힘이라 말 안 했다! 내 신이던 네 신이던, 누구에게든 도와 달라 빌어 봐야지!”

“얼굴값 하네. 어디서 양다리를 걸쳐!”

“상관없어! 나는 무신론자거든!”

케틀린의 귓가로 그가 계단을 따라 뚜벅뚜벅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휭하니 가 버렸다. 남은 케틀린은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예쁜이가 오늘따라 아주 새로웠다.

리카르디스가 감옥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르원이 잽싸게 뒤를 따랐다.

“뭐라 합니까. 또 예쁘다 했습니까?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르원. 내가 그대에게 칼을 주겠다. 상대는 어린아이다. 한 달이라면 몇 명이나 죽일 수 있겠나.”

“……글쎄요. 일 분에 한 명이면 한 시간에 육십 명 아닙니까. 일정이 너무 가혹하니, 반절로 줄여서 삼십 명이라고 치면 일주일에 대략 삼천 명 정도 죽일 수 있을까요? 쉬엄쉬엄해야 하니 한 달에 대략…… 만 명? 제법 죽일 수 있겠군요.”

리카르디스가 걸음을 뚝 멈춰 뒤돌아 그와 눈을 맞췄다.

“한 달에 만 명이라…… 그렇다면 전장에서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시간은?”

르원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하루면 충분하겠군요.”

“그렇겠지.”

리카르디스는 다시 월장석 성을 향해 걸었다.

그렇다. 디에즈는 인간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의 악의가 황실뿐 아닌,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에 서 있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디에즈는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사람들을 많이 죽였나. 역사가 증명했다. 전염병의 창궐과 전쟁이다. 그러나 신성력이 있는 한, 전염병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수그러들 터. 그리하여 남은 것이 전쟁이란 말이었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죽는 사상자는 늘어난다.

리카르디스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게 하카브가 일라베니아 내에 있을 때 일어날 리는 없으니, 그가 돌아간 후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전쟁은 단순히 일라베니아의 황좌로 걸어오는 길을 여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그 길 아래 깔린 시체들마저 목적으로 두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지하 감옥 깊은 곳에서 저주를 퍼붓는 여자의 소리처럼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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