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카일로가 제 팔뚝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내 방입니다! 들어오세요.”
카일로를 퍽 밀치고 로젤린이 다시 잽싸게 대답했다. 카일로가 얄밉게 웃었다. 살의가 솟구쳤다.
“교대 시간입니다.”
들어온 것은 상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꽃다발 하나, 과일 바구니 하나, 케이크와 샌드위치 바구니 하나를 든 채였다. 로젤린은 반색했고, 카일로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네스터 경. 경비 임무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이상할 정도로 극구 반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 파르딕트 경이 담이 왔다고 그래서요. 제가 3번 대리로!”
네스터는 로젤린을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로젤린도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에 걸린 음식 바구니부터 받아 내었다.
‘……레이몬드가 문제가 아니겠는데?’
저쪽은 활짝 열린 문이잖아. 열리다 못해 지나가면 꽃가루 뿌리면서 축하해 주는 문이라고. 이렇게 못 미더울 수가. 카일로는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비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까, 경?”
“하하, 농담도.”
농담 아니었다. 카일로는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전부 막으라 신신당부하며, 음식 바구니에서 케이크 하나를 꺼내 들고 도망가듯 퇴근했다. 로젤린이 그 뒤를 광분해서 쫓아갔다. 돌아온 로젤린의 입가와 손에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승리자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단장님이나 전하께 카일로 경 좀 해고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진짜 이상한 사람입니다!”
카일로야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것이었으나, 네스터가 보기에는 정말 정다울 뿐이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안 좋습니다!”
진노한 그녀를 달랜 것은 네스터가 들고 온 음식들이었다. 그녀는 먹으면서도 가끔 씩씩거렸지만 곧 평안을 되찾았다. 푸딩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쌉싸름한 캐러멜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분노도 사르르 녹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좋아졌…… 다 나았습니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 나았다고 하면 이 감금을 멈추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네스터는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그의 수줍음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리라 예상한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 남자, 눈치 없어. 평가가 더 떨어졌다.
“안 피곤하십니까, 네스터 경.”
“예,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짬짬이 자 두어서, 아침까지도 쌩쌩하게 버틸 수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제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마시죠!”
눈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로젤린은 분노했다. 때려치워, 다 때려쳐!
“나갈 겁니다.”
“예?”
“나갈 거라고.”
네스터가 당황해서 창문 앞을 가로막았다. 로젤린이 그를 번쩍 들어 침대에 던졌다. 네스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무에게도 안 들키면 문제없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대범하지를 못해서. 짜증나, 진짜.”
“엇, 로젤린 경!”
로젤린은 투덜거리면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로 네스터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로젤린은 벽을 타고, 풀쩍 뛰어내리며 높은 곳에서부터 빠르게 내려왔다. 마침 퇴근하던, 머리가 산발이 된 카일로가 벽을 타고 사삭 내려오는 로젤린을 목격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길을 마저 떠났다.
* * *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아름다운 대리석 위에서 사람들이 춤을 췄다. 음악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끈적하게 흐르며 파티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밝은 파티 홀과 대조되는 어둠이 내려앉은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 있었다. 그가 샴페인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연한 노란빛의 샴페인 속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뽀글뽀글, 터지는 기포 너머로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에 빠진 듯 일렁이던 인영이 점점 커졌다. 음악을 뚫고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날 즈음, 리카르디스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비어 버린 잔 너머로 디에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등지고, 그가 막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형님.”
“디에즈.”
“같은 황실 내에 있으면서도 너무 오래 못 뵌 것 같아서요.”
오 일 전 있었던 사냥 대회에서 잠깐 인사한 이후로 처음이니, ‘너무 오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황실 사람들끼리야 한두 달 못 보는 것쯤이야 일상이었다. 갖은 행사들로 인해 하루 걸러 하루 보고 있는 요즘이 도리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는 사냥 대회 후 사 일 동안 월장석 성내에서 벗어나지 않다가 오늘에야 파티에 참석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찾아오는 디에즈의 행동에서, 그 짧은 기간을 보다 길게 느꼈다는 말로부터 디에즈가 자신을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 오늘 다쳤던 악단의 수석 연주자가 돌아왔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형님?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디에즈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제가 듣기에는 다 그게 그거라서요. 다 똑같이 좋은데, 강철발굽 백작은 수석 연주자가 없는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다치는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맞장구를 치기는 했는데 이거야 원. 어릴 때부터 음악 쪽으로는 영 안 되더라니.”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반면,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 오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몸이 바짝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제 정체를 다 들켰음을 알 텐데도 바뀐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디에즈는 그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반 박자 늦게 흥얼, 흥얼. 되새기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디에즈가 지나가는 시종의 트레이에서 샴페인 두 잔을 들어서는 한 잔을 리카르디스에게 건넸다. 리카르디스가 디에즈의 손에서 잔을 건네받아 꼴깍 마셨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은요? 요즘 도통 보이지 않네요. 사냥 대회 이후로 보지 못했는데……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요?”
심장이었다. 진정 살의를 가져야만 내지를 수 있는 일격이었다. 그 행위를 직접 저지른 사람이 내뱉는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어떤 죄책감도, 그로 인해 제 비밀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조바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초조함을 숨길 수 있나? 어디 하나 모난 듯 툭 튀어나와야 정상이건만, 마치 그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의 미소는 뒤틀려 기괴해 보일 뿐이었다.
“타국의 인사가 많이 돌아다니는 기간이니.”
로젤린을 향한 눈과 귀가 많은 기간. 일부러 월장석 성 내부에만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얘기였으나, 디에즈는 그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군요, 사냥 대회 때 잠깐 마주쳤는데, 아직 못 다한 얘기가 많아서요. 조만간 한번 만나러 가려고요.”
달각, 샴페인을 다 비워 낸 디에즈가 잔을 테라스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안부 전해 주세요, 형님.”
디에즈가 등을 돌려 파티홀로 걸어 나갔다. 걸음을 멈춘 그가 다른 방향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등 돌린 얼굴을 볼 수 있을 리 없으나,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곧 디에즈의 멈췄던 발이 움직였다. 춤추는 인파 속 그가 녹아들었다.
테라스 안쪽의 양옆, 바깥쪽, 테라스 아래에 포진해 있던 기사들도 손잡이를 놓고 경계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테라스를 벗어나 밝은 공간 끄트머리에 발을 들였다. 디에즈가 잠시 멈춰 바라보았던 방향을 보니, 엘피디오와 대화하며 웃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목적이 단순히 황제의 자리에 머문다 생각했다. 그를 단순한 ‘디에즈’라고 여겼을 때.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는 디에즈를 벗어나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목적이 무엇일까.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하며, 황실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니 목적 또한 불분명해졌다. 리카르디스는 파티 홀을 벗어났다.
* * *
“좋아, 리카르디스. 귀찮지만 딱 한 번 얘기해 줄 테니 잘 들어. 하나.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그리고 둘.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네. 이런 시간에 숙녀를 찾는 신사가 대체 어디 있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이 너무 자주 와서 피곤해.”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더러운 담요 위에 누운 채 얘기했다. 리카르디스는 감탄했다. 누가 왔다는 소리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챘을까. 매번 있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래서, 그 구구절절하고 긴 말을 요약하면?”
“꺼지라는 거지.”
지하 감옥 깊은 곳,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철창. 과거 검은달의 간부였던 케틀린은 리카르디스를 잡상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어 내쫓으려 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 몇 개가 없었다. 붕대 위로 핏자국이 보이는 걸 보니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찾아온 그 ‘손님’ 중 한 명의 짓이리라.
“손가락은 어디 갖다 팔았기에 그 모양이지?”
“말하는 본새 하고는. 내 손가락은 네 형이 훔쳐 갔어. 아주 날강도라니까.”
“수준 없는 형이라 미안하게 됐군.”
케틀린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철창에 등을 기댔다.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뚜렷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로서는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그 미지의 힘. 그 힘이 마지막 톱니바퀴가 되어 거대한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