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울면서 화내셨군요.”
“……그건 몰랐나 보군. 어쨌거나. 안 그래도 작은 소스 그릇이 넘쳐서 찰랑거리는데 흔들지 마라. 더 넘치는 건 그렇다 쳐도 열 받는다.”
칼릭스는 제 소매 깃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들어오라 했다. 얼굴을 내민 것은 클로에였다. 칼릭스가 일어서서 인사했다.
“클로에 양. 아, 실례했습니다. 부인.”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아직 저도 익숙하지는 않네요. 오랜만이에요, 칼릭스 경.”
“무슨 일인가.”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와의 대화로 여전히 심통이 나 있어,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클로에가 애처로운 표정을 하며 두 손 모아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세상에. 로젤린 경에게 화내셨다면서요. 다친 사람에게 어쩜 너무 하시지!”
“이 지긋지긋한……! 뭐, 비밀이란 게 없는 공간인가 여기는? 다들 황실에 들어오면 눈도 귀도 입도 없는 셈 치라던 공공연한 얘기는 월장석 성 내에서만은 통용되지 않는 건가?”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겠어요, 전하.”
“레이몬드 경을 불러와! 감봉할 테니!”
“남편 하나 먹여 살릴 정도로는 벌어서 괜찮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전하.”
클로에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단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방금 클로에가 내려 둔 초콜릿 쿠키를 마구 집어 먹었다.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서, 디에즈 전하와 하카브 왕자에게서는 수상한 움직임을 읽을 수 없었어요. 그저 파티에 얼굴을 비추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는 하지만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흔히 파티장에서 쓰이는 의례적인 문장의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 간의 접촉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뭐라 수상하다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클로에가 제 턱에 검지를 대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발타 내부에서는 열심히 대규모 전쟁 준비 중이니, 그게 도리어 수상해지는 것이죠. 일라베니아 황실 쪽에서도 발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비를 하고 있답니다.”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꼰 채 까닥였다. 대규모 전쟁. 그걸 준비하면서 적국에 와 있는 머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 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온 발타의 왕자 하카브. 그래서 이상했다. 일라베니아의 중심부를 쳐서 제국을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이라면 소수 정예로 이끌어야 하며, 수상한 낌새를 주지 않고 방심시켜야 한다. 그들 나라에서 열심히 물자와 사람을 모아 가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미를 마구 표출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을 위한 전쟁일 리 없으니, 일라베니아를 먹겠다는 목적은 유효한 것 같은데, 수단이 영 이상해서 그마저도 수상쩍었다. 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라고 판을 깔아주는 느낌이었다.
“엘피디오는?”
“사절단에서 무사 귀환하신 전하께 치이고, 폐하께 치이고, 하카브에게 치여서 상심이 커 보이시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클로에의 시선이 칼릭스로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딤라 섭정관의 친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는 칼릭스 경에게 구애하시는 중이에요.”
“그쪽은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래서 칼릭스 경. 내 형님이 뭐라 구애하던가?”
“요즘 따라 잘생겨졌답니다.”
실제로 엘피디오가 칼릭스에게 한 말이었다.
“이런, 경에게 반했나 본데.”
아까의 복수가 돌아왔다. 칼릭스는 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그래, 뭐…… 상황은 대충 알겠다. 하카브는 하카브대로 여전히 수상하고, 발타는 발타대로 전쟁 준비 중이라는 것. 바뀐 게 있다면…….”
리카르디스가 흘끗 클로에를 보며 말을 흐렸다. 칼릭스는 그 뒤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수족인 클로에에게 마저 말할 수 없는 정보는 명확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얘기였다.
설원의 월계수 5황자,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언제부터 지금의 ‘디에즈’였는지는 명확했다. 백옥 성이 불타올라, 혼자만 살아남았던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로부터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카롱은 사체의 기억을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오직 로젤린만이, 과거 ‘로젤린’의 기억을 기반해 자라나고 있었다. 두 존재 간의 차이는 명확했다. 살아 있는 것을 먹었느냐 아니냐.
그렇다면 삼 년간의 요양 끝에 돌아와 완벽하게 예전의 미소를 되찾은 그는 더 이상 검은 덩어리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리라. 그러니 더욱 알 수 없었다. 착하고, 상냥한 디에즈. 그 ‘디에즈’를 기반으로 해서 자라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한 배경에는 ‘디에즈’가 있는지, 디에즈가 있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몸의 주인이 머무르던 백옥 성을 태워 그 친지를 다 죽여 버리는 잔혹성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친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그 냉정함이.
리카르디스는 지금의 디에즈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싹 지웠다. 도리어 엘피디오가 그의 손에서 놀아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기세등등한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본인이 디에즈의 뜻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나.
리카르디스는 골치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 * *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카일로는 의자에 앉아 잠시 졸다가 불온한 기운에 눈을 떴다. 창문에 한쪽 발을 올린 로젤린과 눈이 마주쳤다. 카일로가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로젤린이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전하의 명령이니, 엉덩이 도로 침대에 붙이길 권하는 바입니다, 로젤린 경. 또다시 명령 불복종으로 근신 기간을 늘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카일로는 로젤린이 탈출하려고 한 창문의 틀에 팔짱을 낀 채 기대었다. 로젤린은 두 발짝 물러서며 구시렁거렸다. 빛나는 눈을 보아하니, 완벽하게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카일로는 기가 찬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명령 불복종으로 한 달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된 사람이, 또다시 전하의 명령에 불복해?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라는 얘기는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안 하고 싶은 건지.
로젤린이 다친 날로부터 사 일이 흘렀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지언정, 상처가 속까지 완벽하게 아물었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어 큰 움직임은 지양해야 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디에즈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근신 겸, 보호 겸, 감금은 나름 합당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삐짐이 치졸하게 발현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하지 말라는 거였는데. 그리고 멀쩡한 문 두고 왜 창문으로 나가려는 겁니까. 여기가 몇 층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경?”
“문 앞에는 두 명이 경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까 하급 기사 두 명보다는 상급 기사 한 명이 상대하기가 더 낫다. 이 말이렷다. 카일로는 왠지 좀 울컥해 버렸다.
“전하께서 왜 저를 이번 경비 임무에 쓰시는 줄 아십니까?”
“적당히 고르신 게 아닐까요. 한가해 보였다던가.”
“생각보다 막말을 잘하시는 군요, 로젤린 경. 아닙니다. 제 입이 5 쿠퍼짜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전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레이몬드 경은 로젤린 경이 눈물 한번 글썽이면 입을 다물 사람이지만, 저는 제 숨소리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완벽하게 수면 상태로 빠진 것같이 되었을 때,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창문으로 다가가 밖으로 나가려는 경의 표정이 얼마나 비장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일장연설하며 고자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제가 다 털어놓았을 때 전하께서 어찌 반응하시겠습니까. 요즘 하루에도 스무 번씩 소설에 나오는 귀한 집 망나니처럼 패악을 부리시는, 전하께옵서!”
로젤린은 찔끔했다. 리카르디스가 마지막으로 돌아서던 밤을 잊을 수 없었다. 화내며 울던 모습이 눈을 뜨든, 감든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만약 카일로가 다 일러바친다면 그 모습을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밥을 잘 드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나쁜 놈은 배회하지 않는지.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몰래 한 번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푸른등불의 카일로…… 이 남자…… 거슬린다…….
“……그, 눈빛? 뭡니까. 약간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는데요.”
로젤린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읽은 카일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태세를 바꿔 더욱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그녀를 혼냈다.
“힘으로 누르시겠습니까? 때리고 제압하시겠습니까? 저는 한낱 인간. 로젤린 경이 한 대 패면 리코타 치즈처럼 흩어져 버릴 물렁물렁한 인간이니 어디 맘껏 해 보시죠! 산산조각 나서 흩어질 테지만, 마치 짚단 인형처럼!”
두 팔을 쫙 벌리며 제 나약함을 피력하는 기세가 대단해서 로젤린도 한풀 꺾였다. 정말로 산산조각 나서 흩어질지도 몰라. 진실에 기반한 협박이다 보니 잘 먹혔다.
카일로가 흥 콧방귀를 끼고는 침대로 돌아가라고 턱짓을 까딱했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로젤린은 울컥했다. 그녀는 어지간하면 이래도 저래도 좋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놀리고 약 올리는 카일로의 행태에는 배겨 낼 수 없이 성이 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성나 있는 로젤린의 눈앞에서 카일로가 병문안 온 클로에가 선물하고 간 초코 쿠키를 날름 집어 먹었다.
“이, 이익!”
로젤린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스러워하다가 결국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팼다. 다행히 힘 조절을 한 탓에 카일로는 리코타 치즈 및 짚단 인형이 되지 않았고, 아파하면서도 낄낄 웃을 뿐이었다. 여동생이 두 명이라더니, 어떻게 살아 있지. 이걸 어떻게 안 죽이고 살려 뒀지! 로젤린은 두 여동생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