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50화 (150/220)

150화.

‘……8살짜리 소녀에게도 저러지는 않을 텐데.’

경악하고 있는 라헤안시의 눈길 아래, 칼릭스가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세상에! 드넓은 초원을 뛰어다닐 것 같은 씩씩한 모습이 누님을 똑 닮았네요.”

라헤안시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저 사람이 정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맞아? 그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 라헤안시는 이 년 전, 침대 밑에 두었던 상한 케이크를 먹었을 때의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뭐지? 자신만 배제된 채 형성된 이 기류는 대체 무어야?

두 남자의 어르고 달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연극에도 당사자인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로젤린은 라헤안시를 보고 힘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다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다쳐도 보통 다친 게 아닌 것 같았다. 기운이 쏙 빠져 있지 않은가.

“어디이 보자, 보자. 어디를 다쳤는고?”

로젤린은 힘없이 꾸물거리며 뒤돌아 앉았다. 대충 등 어딘가가 다쳤다는 얘기인 듯했다. 자세한 위치는 칼릭스가 가르쳐 줬다. 라헤안시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성력을 불어 넣었다.

‘어?’

뭔가 이상했다. 스며들어야 하는 성력이 반 이상은 그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잘못 느낀 건가 싶어 다시 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지켜보던 칼릭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신관님?”

있다면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할 것 같았다. 세상을 뜨면 문제를 느낄 수도 없게 되겠지? 그렇게도 말할 것 같았다. 라헤안시는 흠칫 떨었다.

“아, 아니. 그게 성력이 잘…… 안, 안 먹혀서?”

“마인이지 않습니까. 원래 그렇습니다.”

“쓰으…… 그냥 좀 이상하구나 싶었…….”

“마인 치료해 보셨습니까?”

“그건…….”

“마인을 치료하신 적 없는 분이, 지금의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 평범하지 않다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시는 것은 환자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일인 듯합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해 이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닙니까. 높은 지위와 그에 따른 능력을 가지신 분이니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하셔야지요.”

사나운 질책에 라헤안시는 위축되었다. 심지어 키는 훌쩍 크고, 인상 더럽기로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가 무섭게 표정을 굳히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몬드도 불쑥 끼어들었다.

“잘 안 먹히면 그만큼 더 열심히 쓰셔야죠 대신관님. 뭐 하십니까?”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좀 그냥 이상해서 잠시…….”

“보십시오. 얼굴이 반쪽이 됐습니다! 애가 이렇게 다 아파서 죽어 가는데, 대신관님은 단순한 자신의 호기심에 환자를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러고도 라헤안시 대신관님께서 진정 어린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이델라브힘의 종이 맞습니까!”

마치 공주님을 둘러싼, 맹견과 충견 같았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성력을 열심히 부었다.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성을 갈겠다! 다짐했으나 생각해 보니 성은 이미 갈아 치운 이후였다.

성력으로 치료하는 중에도 두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춥냐, 덥냐, 아프냐. 안 아프냐. 이거 좀 먹어 봐라. 왜 입맛이 없느냐, 다른 음식을 가져오면 먹겠느냐. 아주 난리였다. 라헤안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대체 제 형이 뭘 어떻게 했기에 이 사달이 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성력을 한 방울까지 짜내어 쓰고 베르움에게 반쯤 업혀 돌아가는 길.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소환당했다. 죽을래, 죽을 거야! 날 좀 내버려 둬! 이 미친 집구석! 발악해도 힘이 없어서 베르움에게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차도는.”

리카르디스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몸을 지탱한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까보다 버럭 수치는 줄어들었으나, 폭풍 전 고요처럼 느껴질 뿐이라 무서운 건 매한가지였다.

“나쁘지는 않던데? 형이 손을 좀 쓴 것 같더라. 성력을 다 터니까 거의 아물었어. 마인이라 회복력이 좋은 건가?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큰 움직임은 피해야겠지만.”

“기분은 괜찮아 보이더냐.”

“……어, 좀…… 안 좋던데.”

리카르디스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치우고 그와 눈을 맞췄다.

“어디가 어떻게.”

“어, 그게. 약간 시무룩하고, 옆에서 칼릭스 경이랑 레이몬드 경이 보기 역한 애교를 부려도 반응이 없고, 입맛도 없다고 그러고……?”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 라헤안시.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아픈 사람이 있는데 성력만 쓰고 나오면 그만이냐. 사람이 사람에게 있어, 행할 수 있는 수단이 고작 성력뿐이냐는 말이야. 입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어? 옆에서 좀 달래고, 뭐라도 먹여야 할 것 아니야! 사람이 그렇게 말라비틀어져서 반쪽인데!”

반쪽 운운하는 거 혹시 월장석 성에서 유행하는 말일까.

‘이놈의 성…….’

라헤안시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견, 충견 다음에는 광견이라니. 최악이었다. 라헤안시는 이십 분을 더 혼나고 나서야 월장석 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서럽게 눈물을 찔끔거렸다.

“당분간은 월장석 성 쪽으로는 침도 뱉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이 지나도, 월장석 성 쪽이 아니더라도 침을 뱉으시면 안 됩니다. 대신관으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셔야죠.”

환장할 것 같아 라헤안시는 몸서리쳤다. 석양이 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하던 베르움이 마차 의자에 늘어져 있는 라헤안시에게 물었다.

“로젤린 경의 치료는, 잘 되었습니까?”

방 밖에서 대기하기는 했으나, 잇세리온과 라헤안시의 대화를 들은 터라 베르움도 치료 대상이 로젤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엄, 이 몸이 누구더냐.”

“마인의 치료는 특별한 게 없습니까? 저는 마인에게 성력을 써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뭐, 보통의 신관은 마인을 치료할 일이 없긴 하지.”

라헤안시는 뭐가 웃긴지 혼자 낄낄거리다가 팔베개를 하고 그를 쳐다봤다.

“나는 예전에도 몇 명 치료해 봤느니라. 마인도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 살아가는 생명들 아니더냐. 다 똑같다.”

“아, 그렇습니까?”

베르움은 고개를 끄덕이다 불신의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 인간이 성 밖으로 나가는 꼴을 못 봤는데 언제 마인을 치료해 봤대? 그 눈빛을 읽은 라헤안시가 창밖으로 제 모자를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내며 마차를 멈추고 주우러 갔다.

* * *

리카르디스는 끈질긴 눈빛에 결국 항복하고,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누이와 똑 닮은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남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삼십 분째 나를 바라보는 행위를 뭐라고 해석하면 좋겠나, 칼릭스 경.”

“글쎄요. 반했나 보지요.”

“로젤린 경의 일로 시위하는 것은, 딱 이십 분까지만 봐주겠다. 십 분 초과한 것은, 내일 치 시위 분량에서 깎을 것이다. 이제 나가. 그대의 열렬한 눈빛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

“아, 제 누이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무슨 일입니까?”

연기가 제법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약간의 문제라니요, 다 낫고도 당분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되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저도 이제 전하의 충성스러운 기사인데 이렇게 숨기시려니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경,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원래 사람들은 악에 받치면 뭐든 해내는 법이더군요.”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다른 자라고 하면 그냥 제 성질 다 내보이며 쫓아내기라도 하겠건만, 로젤린과 똑 닮은, 그녀가 아끼는 동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 후, 홍차의 김이 한풀 식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삐졌다.”

칼릭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누이가요?”

“내가.”

잇세리온과 칼릭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내가 삐졌어!”

제국의 2황자 리카르디스. 아름답고, 고상하고, 영특하고……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안타깝지 않다는 평을 받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조금 값싸 보이는 감이 있는 단어였다.

“화가 많이 나셨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화난 것과 삐진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매우 삐진 상태야! 무척이나 토라졌지. 앞에서 사탕을 줬다 뺐다를 다섯 번 반복하고 결국 사탕을 받지 못한 여덟 살 어린애보다 심기가 불편해, 알겠나? 그러니 사람 속 좀 그만 긁지 경. 그대 이전에도 레이몬드 경이 호위하는 내내 어미 잃은 새끼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 갔으니!”

칼릭스는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화가 났다고 하면, 아직까지 그러느냐며 그를 쪼잔한 남자로라도 만들 수 있겠건만, 본인이 나서서 삐졌다고 해 버리니 공격할 수단이 없어졌다. 애초에 삐졌다는 말 안에 쪼잔함이 가득 들어 있는 느낌이 아닌가. 본인도 잘 알고 있으면서 사용하는 거 같았다.

“예전부터 제 누이와 디에즈 전하가 오죽 막역한 사이였습니까.”

“그렇게까지 막역한 사이는 아니다.”

“……예, 뭐…… 아무튼 그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누님은 잘 해 주고 다정한 사람이면 한없이 약해지는 분이시니까요. 더불어 눈치는 못 챘어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같은 종족으로서의 유대감 따위를 가졌겠지요. 누님이 방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디에즈 전하의 탈을 쓴 그것이 누이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파고들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전하.”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나. 찌른 놈이 잘못했지 찔린 사람이 잘못했겠나? 말해 입 아프다. 로젤린 경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란 걸 알아. 내 말이 절대적인 신의 뜻도 아니고, 좀 안 들으면 어때서. 무시해도 상관없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그녀에게도 허점은 있을 수밖에 없어. 그녀의 흔들림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저…….”

찌른 놈은 놈이고 찔린 사람은 사람이었다.

“속상한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 다치는 일에. 나는 그릇이 소스 그릇만도 못한 인간이라, 그 속상함이 이렇게 쪼잔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뿐이다. 다친 사람 붙잡고 울면서 화내는 인간이 정상이겠나? 미친놈이 따로 없지.”

정말 굉장한 자기 객관화였다. 칼릭스는 자신이 공격할 것도 없이, 자폭하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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