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가 침대 위에 거칠게 두 손을 내려놓으며 헐떡였다. 로젤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차마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로젤린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아직도 꿈을 꾼다. 그대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로젤린. 그대는 먼지 쌓인 오두막에서 내 눈을 바라보다 감아.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해. 피 냄새는 짙고, 감정은 가슴에 칼로 새긴 듯 선명하다. 대륙의 모든 이가 칭송하는 내 성력은 그대에게 닿지 못하니 그대의 피를 닦아 줄 더러운 천조각보다 못한 존재고, 어딜 보아도 구원은 없다.”
피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눈물을 닦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카르디스가 쥐고 있는 시트에 붉은색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에 손톱이 강하게 파고든 탓이었다. 로젤린이 기겁해서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전하! 손에서 피가!”
로젤린이 손을 뻗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뿌리쳤다. 로젤린은 디에즈에게 찔린 곳보다 더 깊은 안쪽에서 오는 듯한 시린 통증을 느꼈다. 가슴 안쪽이 시큰거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해서 침대 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대는 나를 마주하다 눈을 감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였다. 괜찮을 거라 생각해야만 했다. 비록 그대가 하루하루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을지언정. 모든 상처가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대에게 새겨지리란 사실을 알고 있을지언정. 괜찮다. 괜찮을 거다. 강한 사람이니까. 언제나 다시 내게 돌아왔으니까. 이번에도……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리카르디스는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을 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그는 눈을 꾹 누르더니 몸을 일으켰다. 감정을 쏟아 내는 동안 가려져 있던 눈이 비로소 보였다. 로젤린은 조급한 마음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렇게까지 서늘해 보이리라고는, 로젤린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그와 마주했던 때가 차라리 더 정겨울 지경이었다. 서운함이 넘쳐 눈물샘을 자극했다.
“로젤린 경.”
로젤린이 울먹거리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리카르디스가 무릎으로 침대를 짚은 채, 그녀를 받아 내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닿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와 등을 감싸 오는 크고 따뜻한 손을 느꼈다.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등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따듯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성력이었다. 몇 분간 말없이 성력을 붓기만 하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품에서 떨어트렸다.
“내일부터는 라헤안시 대신관을 보내겠다. 쉬어라.”
그는 싸늘한 말과 함께 돌아섰다. 로젤린은 어, 아. 변명도 해명도 못하고 그의 등을 바라만 봤다.
쿵. 문이 닫혔다. 로젤린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온도가 내려앉은 방 안은 어딘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 비어 보여 홀로 남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로젤린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로젤린은 누군가가 부드럽게 건드리는 손길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불편하게 엎드려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똑바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은 부은 눈을 비비며 올려다보았다. 마카롱이었다.
로젤린이 안도감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것에 훌쩍훌쩍 울자,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 이상하게 서러워 로젤린은 계속 울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마카롱은 없었다.
* * *
이 세상에 대신관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라헤안시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때문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어찌나 말도 많고 불만도 많은지. 이동하는 내내 종알종알, 투덜투덜. 라헤안시와 함께 마차 안에 있는 신관 베르움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베르움, 못된 놈. 나쁜 놈! 지독한 노옴!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덜컥 간다고 말을 해! 내가 바쁜 걸 빤히 아는 놈이 그러느냐?”
“예, 사냥 대회에서 뭘 그리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하시다고 열여섯 시간을 꼬박 주무신 것은 압니다. 그렇게 살다간 몸에 곰팡이 핍니다, 대신관님. 제발 일 좀 하세요.”
“아, 싫다. 싫다고! 형님의 호출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혼난다! 그 건인지, 두 달 전에 그건지, 아니면 어제 했던 그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혼날 거라고!”
“형님이 아니라, 황자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대신관님. 신관의 법도를 따르셔야죠. 그리고, 그 건은 뭐고, 두 달 전에 그거는 뭐고, 어제 했던 그거는 뭡니까!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라헤안시는 베르움의 말이 안 들리는 듯 제 불만만 쏟아 내다, 창밖에 보이는 월장석 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울상을 지었다. 종국에는 마차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싫다, 싫다고, 마차 돌려! 온갖 난리를 피우는 통에 베르움은 마음을 경건히 하기 위해 기도를 올렸다. 사람은 때리면, 안되지. 안 되는 거였지. 이델라브힘이시여.
두 사람은 잇세리온의 안내를 받아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우리 혀엉!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어서 불렀어? 형의 귀염둥이 라헤안시가 왔어!”
라헤안시는 애써 방긋 웃으며 활기차게 들어갔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다는데.
“왜 이렇게 늦어!”
늦어! 도 아니었다. 늦어어! 호통에 가까운 발성이었다. 방에 발을 들이자마자, 리카르디스가 서류를 집어 던지며 반기는 통에 라헤안시는 잽싸게 구석에 찌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웃는 얼굴에 침 잘 뱉는 우리 형이 있었지.
“이 자식,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서 이렇게 늦어! 부른 게 언제인데! 사냥 대회에서 한 것도 없으면서 피곤하다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나 했겠지! 이 굼벵이 같은 놈!”
리카르디스가 탁자를 짚은 채 씩씩거렸다. 라헤안시는 억울했다. 자신이 한 잘못이 수두룩한데, 고작 이런 것으로 혼나다니. 이건 단순한 분풀이다! 그는 리카르디스가 모종의 이유로 화가 났으며, 자신은 그 희생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리카르디스가 반대쪽 손에 있던 서류를 탁상에 거칠게 던져 놓았다. 철썩 소리에 라헤안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라헤안시!”
“예! 형님!”
“잇세리온을 따라가라. 안내해 줄 거다.”
허리에 손을 얹은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 쪽을 대충 가리켰다.
“저, 형님. 업무의 자세한 내용을 좀 말해 주시면…… 네, 감사하겠습니다.”
“내 기사 중 한 명이 다쳤다. 치료해라. 네가 사용할 수 있는 한계까지 쏟아부어.”
라헤안시는 뜨악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력 다 쓰면 엄청 힘들어지는 거 알잖아! 한 일주일은 비실비실하게 지내야 한다고! 형이랑 교대로 하면 되잖아. 어? 잠깐 뭔가 이상한데. 형이 있었잖아, 내가 왜 해? 형이 치료해!”
리카르디스는 대답 없이 가만히 탁자의 모서리를 보고 있었다. 매일 보는 탁자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잠시간 골똘히 상념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욕설을 참아 내는 표정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목과 관자놀이에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라헤안시가 재빠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잇세리온이 라헤안시 옆에 쪼그려 앉더니 그에게 귓속말했다.
“저라면…… 그냥 하겠다고 할 텐데요.”
이런, 멍청하군. 안타깝기도 하지…… 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조였다. 더군다나 리카르디스가 황실 일원이 되기 전부터 보필했던 사람의 말이 아닌가. 신뢰감이 마구 상승함에 따라 소름이 돋았다. 조금 더 버텼다가는 어떤 더러운 꼴을 볼지 몰라!
“만백성을 빛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일지니!”
라헤안시는 횡설수설하며 잇세리온의 등을 밀어 방을 얼른 나섰다.
집무실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라헤안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 요즘 들어 제법 말랑해졌던 제 이복형의 성질 머리가 다시 원상 복구 되다 못해 더 나아가 가시나무처럼 변하지 않았나.
라헤안시는 눈을 굴려 가며 고민하다가 잇세리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젤린 경이 다쳤나?”
잇세리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기밀입니다만 곧 보실 테니. 네. 맞습니다, 대신관님.”
“그거 참 흥미롭구만. 내가 또 비밀, 기밀. 이런 거에 끔뻑 죽는 인간일세.”
“……기밀입니다. 월장석 성에서 나가시면서 전부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거어참.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러나! 그런데 왜 형님께서 로젤린 경을 치료하지 않고?”
“………기밀입니다.”
“싸웠나? 또 저 더러운 성격 못 이기고 성냈나?”
잇세리온은 도착할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월장석 내에서도 한참 깊게 들어가야 하는 곳. 잇세리온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문을 연 남자의 존재는 예상 밖이었으나,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붉은수레바퀴 가문 특유의 짙은 검은 머리, 아름다운 녹색 눈, 날카로운 눈매. 칼릭스 에스터였다.
“이델라브힘의 눈부신 은총을, 라헤안시 대신관님. 귀한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제 형은 자신을 너무 막 대했다.
“이델라브힘의 눈부신 은총을. 흐흠, 칼릭스 경. 마땅히 와야 하는 자리였네.”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에 잇세리온이 기가 찬다는 듯 눈길을 주고는 돌아서 나갔다.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로, 접시에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예쁘게 장식해 두고 있었다. 기사도 칼 쓰는 직업이라 그런지, 엄청 섬세했다. 라헤안시는 내심 와 하고 감탄했다.
“로젤린, 이것 봐. 이건 나, 이건 칼릭스 경, 이건 우리 로젤린이야. 두 번째로 예쁘고 귀엽지. 제일 예쁜 건 우리 부인이야.”
그는 토끼 사과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옆에서 붙어 보살피는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