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8화 (148/220)

148화.

“신관이 사재 가지는 거 보셨습니까!”

“그러면 옷이라도 내놔!”

베르움과 라헤안시가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그들이 있는 막사 안으로 무언가가 타오르는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라헤안시가 코를 킁킁 움직였다.

“사냥 대회가 끝날 때가 되었는가 보다.”

사냥 대회의 끝을 알리는 연기가 하늘 높게 올라가고 있을 광경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베르움은 충격받았다. 카드 게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대회가 끝날 시간이라고? 다섯 시간 정도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다.

이, 무서운, 사람을 현혹하는…… 악의 놀이 같으니!

“베르움.”

“예, 대신관님.”

“무슨 일 없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무슨 일을 말씀하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인데, 끝날 때까지 조용해서 심심하단 말이다.”

간이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라헤안시를 보느니, 어수선한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베르움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라헤안시는 이렇게 뜬금없이 얘기를 꺼낼 사람…… 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 아무런 쓸모없는 정보까지 모아 갔다.

“물보라 기사단의 할 경이 다람쥐를 잡으려 했는데 너무 귀엽게 생겨서 미처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우를 잡으려 했더니, 기르다 방생했는지 배를 보이고 애교를 부려서 또 놓아주었다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너구리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근처에서 새끼 너구리 두 마리를 발견한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우울증 같은 게 생긴 모양입니다. 신관은 몸의 상처는 치료해 주지만, 마음의 상처에는 효과가 없다고 하니 시무룩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참 여린 기사님이 아닌지.”

라헤안시의 눈이 살짝 열려 있는 막사의 천. 그 틈새로 비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 위로 거뭇한 연기가 퍼져 가는 중이었다.

베르움이 담요 위에 널브러진 카드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본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잽싸게 일어섰다. 베르움이 간신히 체면을 차리며 흐, 흠 한 판뿐입니다. 하며 새침 떨자 라헤안시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헤안시가 패를 섞는 장면을 바라보던 베르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한 시간 전에 황성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셨다고.”

도박으로 밥벌이하는 듯한 화려한 손놀림으로 패를 섞던 라헤안시의 손이 잠시 멈췄다.

“흠…… 사고는 아니고 사건인가.”

베르움은 라헤안시가 패를 섞으며 어떤 수작질을 부리고 있지 않은지, 열심히 감시하는 중이라 그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살짝…… 밑에서 패를 꺼내신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있남! 거 사람 농담도 잘해!”

사냥 대회는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되었다. 우승자는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이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마르틴은 황제가 하사하는 금은보화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마르틴은 곧 사냥 대회를 관리하는 행정관에게서 로젤린의 점수를 비밀리에 입수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기록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점수로 치면 작은 동물(+5) 네 마리를 잡은 정도였다. 로젤린의 솜씨라고 보기에는 영 허술했다.

마르틴은 이에 대해 묻고자 로젤린을 찾았으나, 사냥 대회의 폐회식이 끝나고도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 * *

어두운 밤. 로젤린은 눈을 떴다. 비틀거리며 상체만 일으켜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푹신한 침대, 화려하지만 정돈된 방 안. 여기저기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월장석 성 내에 있는 수많은 방 중 하나인 듯했다.

열린 창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날 밝은 밤의 달빛이 새어 들었다.

다친 상처 부위가 저릿하게 쑤셨다. 헤집어진 내부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으나, 많이 호전 된 상태이긴 했다. 최근 자신의 재생은 완벽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라면 속도는 더욱 늦어졌다. 아직 완벽하게 성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라 하더라도 그 손길이 닿았노라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젤린은 몇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죽은 숲으로 들어가던 디에즈. 그리고 그를 끝까지 지켜보던 마카롱.

남자 모습의 마카롱은 단단한 벽같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 있던 자신에게 오는 위험을 모두 막아 내기도 하지만, 디에즈를 향하는 위험 또한 막아 낼 것 같았다.

이후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드문드문 흔들리는 마차와 분을 삭이는 숨소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심장에 칼이 박힌 것처럼 서늘했다. 로젤린은 제 가슴께에 손을 대고 후 숨을 천천히 들이쉬다 내뱉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젤린의 고개가 우뚝 고정되었다. 구석의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커튼이 바람이 흔들렸다. 조명같이 환한 달빛이 창문에서부터 소파까지 길을 만들 듯 비췄다.

남자의 깍지 낀 손과, 긴 은발이 희게 빛났다. 리카르디스였다. 그가 소파에 앉아 가만히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둠에 잠겨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과 로젤린의 눈이 딱 마주쳤다.

“전하.”

로젤린이 일어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다시 엉덩이를 침대에 붙였다. 리카르디스는 깍지 낀 채 가만히 제 손 마디만 쓸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젤린은 불안해졌다.

“왜…….”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이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아픈 로젤린보다 괴로워 보였다. 떨리는 손 위로 뼈가 곧게 돋고 혈관이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무언가를 꽉 쥔 것처럼, 무언가를 꾹 참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다친 거야, 로젤린.”

이상한 질문이었다. 어쩌다 다쳤느냐, 어떻게 다쳤느냐가 아니라, 왜 다쳤느냐? 답을 하자니 애매했다. 로젤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의 답변을 했다.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디에즈 전하께서 저를 찌르셨습니다. 예전 로젤린을 죽인 것도 그분이셨고, 또 저와 같은…….”

“아니, 아니!”

리카르디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가 주먹 쥔 손으로 제 이마를 짓누르듯 꾹 눌렀다.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로젤린!”

로젤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사나운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자면 이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나, 요즘의 그는 항상 눈을 마주치면 웃었다. 딱딱한 표정이 누그러지며 입가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둘만 남았을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젤린’ 하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자신에게만 예외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고, 그것이 기뻤다. 그 모든 행동이 스며들 듯 익숙해지고 있던 때였다.

기뻤던 만큼이나 지금의 리카르디스가 낯설고 무서웠다. 자신을 해칠 것 같아 무서운 게 아니라, 그저 그가 자신을 보고 웃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철렁였다.

리카르디스가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고 뾰족뾰족하고 아프고 사나운 감정들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로젤린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화를 내시는 거지. 몸이 위축된 만큼 사고도 위축되기 시작했다.

“다치지 말라 했다.”

“그, 저는.”

서늘하게 끊어 내는 듯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몸을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침대로 걸음을 옮길수록, 달빛이 그를 비추는 범위가 늘어났다. 허리, 가슴, 턱.

“누구도 믿지 말라,”

얼굴까지.

“그렇게 말했었잖아.”

달빛이 비친 아름다운 얼굴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누구도 믿지 마. 리카르디스가 수없이 얘기했던 것들. 절대 다치지 마. 그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 안에 담길 수 없는 커다란 걱정들까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믿지 말라 했음에도 믿었다. 다치지 말라 했음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말과 걱정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아무 의미도 없던 것처럼.

“등에서부터 찔린 상처였다. 이것은 디에즈, 그자가 강했기에, 그대가 싸워 패배했기에 입은 상처가 아니란 걸 안다. 방심이다. 그를 믿은 것이다. 등을 내줄 만큼이나.”

“저는…… 전하, 그게. 디에즈 전하가, 디에즈 전하께서 저를, 구해 주시고, 또, 길을 안내해 주시고, 초콜릿도 구해 주셔서, 부, 부탁이 있다고, 한 번만…….”

로젤린은 횡설수설 말하며 침대 시트를 매만졌다. 목적 없이 떠도는, 떨리는 손에서 그녀의 마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초조했다.

리카르디스는 말을 힘겹게 내뱉었고, 한 마디, 한 글자가 더해질 때마다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 그가 자신을 혼낼 때 미간에 주름을 가볍게 잡고는 안 돼, 로젤린. 하지 말라 했잖아. 하고 타이르듯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믿지 말라고 했어! 그날에, 그대의 뒤를 쫓는 자가 칼릭스 경이라 해도, 레이몬드 경이라 해도! 나라고 해도 믿지 말라 했어!”

앞에서 무섭게 다그치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흐려졌다. 로젤린은 고인 눈물을 소매로 급하게 닦았다. 그녀의 눈가가 발개진 것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카롱의 말대로, 나는 그대를 전부 알지도 못하고, 디에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감히 예측하겠나. 변수가 많고 확실하지 못한 기반 위에 쌓인 계획에는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 위험해, 위험한 것이 당연해!”

리카르디스는 소리치는 도중 무언가를 참아 내듯 입술을 꾹 깨물기도 했고 다른 곳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보낸 이유는, 내가, 내가 그대를 믿었기 때문이야. 내가 한 말을, 그대가 들어주리라. 그 약속을 지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야! 로젤린. 로젤린 경! 어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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