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7화 (147/220)

147화.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치명상을 입혀 두었으니 빠져나오지는 못한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성을 잡아먹은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디에즈는 과거 ‘디에즈’가 하듯 풀피리를 삐삐 불었다. 그만큼 솜씨가 훌륭하지는 못했다.

그는 조각나 알 수 없는 기억을 찾아 이곳에 왔다. 코를 찌르는 선명한 피 비린내. 어두운 공간, 춥고 습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곳. 이름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아이들. 사람들의 비명 소리. 하얗고 뾰족한 성.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

속을 헤집어 할퀴는 그 기억들 사이, 이상한 게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과거 ‘디에즈’의 기억이었다.

어떤 소녀의 모습이었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단발로 댕강 잘라 고개를 숙이면 하얀 목덜미가 보이는, 그런 소녀.

그녀는 햇살 아래 몸을 곧게 세우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디에즈’의 기억은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 아래, 얼마나 강한 힘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슴에 소중한 걸 품고 혼자 발을 내딛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그렇게 예쁜지, 뭐가 그렇게 빛나는지. 왜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지. 기억 없이 감정만 물려받은 지금의 디에즈는 황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철창 안, 죽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 기억에 이따금 검은 머리 소녀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화가 났다가 기뻤다가,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풀피리를 삐이 삐이 부는 지금의 디에즈는 알 수 없었다.

디에즈가 기억 속 소녀와 대면하게 된 것은 삼 년이 지난 후였다.

백옥 성 화재 사건 이후, 충격에 실어증이 걸린 5황자는 별장으로 내려가 오랜 기간 요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상은 몸의 주인으로부터 기억을 물려받는 과정과 인간의 언어, 황실의 예법을 익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나 성장한 디에즈는 예전의 상냥한 미소를 되찾았다. 모두가 그의 귀환을 반겼다. 그중 2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인 레이몬드도 끼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의 오랜 인연이었다. 애완동물일 적에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귀찮게 들러붙으며 쓰다듬었던 인간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게다가 멍청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감이 좋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질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부모와 동생, 제 수발을 들던 사용인들까지 죄 불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큰 사건을 겪었다면, 심경의 변화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음험한 속을 하는지도 모르고 레이몬드는 눈물까지 흘려 가며 그를 끌어안았다. 디에즈는 당황했다. 황족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예법 책에서 그렇게 봤는데?

다 크다 못해 근육이 꽉 압축되어 있는 거대한 남자가 자신을 안고서는…… 운다.

디에즈는 환장할 것 같았다. 지금 어. 코를 훌쩍거렸는데. 어깨에 묻은 건 아니겠지? 찝찝했다. 그렇게 껴 안겨서 싱숭생숭한 마음에 당황하는 와중, 로젤린을 만났다. 레이몬드가 기억하냐고 물었다. 제 수습 기사였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하급 기사가 되었단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

가벼운 미소도 없는 딱딱한 얼굴이 낯설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언제나 웃고 있던 기억 속의 모습과 달랐다.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웃었는데. 뭔가 애타는 마음이 들어 불쾌해졌다. 허약해 빠진 모자란 놈이 별 잡스러운 걸 남기고 가서, 괜히 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첫인상이 별로였건 어쨌건, 세 명은 자주 만났다. 아마 레이몬드는 제 마음에 쏙 드는 친구1과 2가 친해지길 바랐던 것 같았다. 세 번째 만났을 때야 비로소, 디에즈는 로젤린의 그 불만스럽고 화난 것 같은 표정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후에야 그녀가 조금 보였다.

가끔 건네는 말은 차분했다. 목소리가 좋았다. 바람이 일지 않는 호수의 표면같이 확 튀거나 낮게 가라앉지 않고 조곤조곤했다. 로젤린은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녹색 눈동자는 햇빛을 강하게 받으면 노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는 결 좋게 빛났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아래를 향하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시선이 부딪쳤다.

훔쳐보고 있다가 딱 걸렸다. 황실 도서관. 아동용 동화책 뽑아 놓고도 테이블에 엎어져 자고 있는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이것저것 쌓아 놓고 읽던 중이었다.

그러나 디에즈는 책 대신 로젤린이라는 대상을 열심히 탐구했다. 책을 넘기는 손이 멈춘 지 오래고, 시선도 적나라하기 그지없어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디에즈는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그녀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은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가만 그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묵직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디에즈도 똑바로 쏟아지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다. 침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크어억…… 쯔…… 어…….”

레이몬드의 비강 그 어디쯤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렸다. 코를 고는 건지 잠꼬대를 하는 건지 통 알 수 없는 소리. 로젤린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민망하다는 듯, 이상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곁눈질로 디에즈를 흘끗 쳐다봤다.

내 상사이자 당신의 친구가 바보라서, 민망하죠?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디에즈가 피식 웃었다. 레이몬드가 바보 같아서 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로젤린도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아, 그 웃음이. 소리 없이 온 공간을 메운 포근하고 반짝거리는 것이.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삼 년의 세월이었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이 섞이기 시작한 그때의 날로부터. 일 년, 삼백육십 오 일. 하루, 스물네 시간, 한 시간이 육십 분, 일 분은 육십 초. 시간 시간마다 피비린내 나는 공간에 갇혀 버린 자신을, 그녀가 햇살 아래로 이끌고는 했다.

어린 당신은 햇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그 삼 년 동안. 그 헤아릴 수 없는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손이 떨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끔찍한 장면. 그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지 않을까? 로젤린이 웃는 모습을 보니, 그래.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저 말하고 싶었다.

로젤린 나는, 그 삼 년 동안. 그 안에 훨씬 많이 흐른 시간 속에서 너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을 기억에 새기고, 그 기억에 새롭게 행복해하고 싶었다. 고통의 시간은 너무 길지 않았나. 그것을 끝내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온 것인가?

이상하게 눈이 시린 기분이라 디에즈는 눈을 비비며 시선을 떨궜다. 로젤린을 훔쳐보느라 넘기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죄는 단순히 반인륜적인 사건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이델라브힘을 등지고…….]

숨이 턱 막혔다. 디에즈는 다급한 손길로 책을 넘겼다. 그 순간만큼은 로젤린이 생각나지 않았다.

[축복으로써 감싸 안고자 한 일라베니아를 배신한 후안무치한 마인들의 행태에 어린 백성들은 분노하였으니…….]

단순한 글자를 넘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무슨 말을.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악을 쓰고 싶을 만큼 이 책은 그의 기억과 다른 얘기를 했다.

디에즈는 제 머리를 꽉 눌렀다.

장면은…….

철창 안, 죽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 속을 할퀴던 고통이 무엇인지. 어슴푸레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떨렸다. 누가 목을 조르듯 답답했다. 디에즈는 그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평범한 ‘디에즈’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도서관의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로젤린. 나는 어쩌면 좋을까. 로젤린 제발 나를…….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 죄가 사라지랴.]

* * *

“푸헤히흐흑!”

경망스러운 웃음소리에 한층 더 열 받았다. 대신관 라헤안시를 모시는 신관 베르움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봐라 봐라, 자알 봐라. 거봐라. 딱 봐라! 어린 애들이나 하는 놀이나 한다고 날 무시했지! 넌 뭐냐 베르움! 그깟 어린 애들 놀이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으허, 으후허허헉! 내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이놈아!”

막사 안에서 심심하다고 찡찡거리며 떼를 쓰기에 압수해 뒀던 카드를 줬더니, 혼자서 카드 게임 하면 무슨 재미냐고 자신을 꾀어낸 것이 대략 한 시간 전.

룰을 외워도 눈치가 귀신 같은 대신관이 좋은 패를 쏙쏙 빼 가니 이십 년 세월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심신을 수양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빡쳤다.

오랜 수련을 거친 신관의 성미를 황량한 가시나무 숲으로 만드는 오락거리를 어린 아이들의 놀이라 말했다니. 미쳤지, 내가 미쳤지. 이딴 걸 어떻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졌지! 나한테 졌지! 계속 지고, 지겹지도 않은지 또 졌지! 이야, 이 정도면 진짜 쉽지 않거든, 한 번쯤 이길 법도 한데 말이다!”

베르움이 뚱하게 카드 패를 담요에 던지자 라헤안시가 손을 그에게 내밀고 까딱거렸다. 돈놀이하는 인간이 빚 받으러 온 듯 당당한 태도였다.

“뭡니까, 대신관님.”

“졌으니 뭐든 내놓아. 스물여섯 판 진 값.”

“이 무슨 날강도……? 그런 말 없었잖습니까!”

“신성한 도…… 아니 놀이판에서 아무것도 걸지 않다니, 놀이의 신이 노할 것이다!”

당신 방금, 도박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리고 유일신 이델라브힘을 믿는, 그것도 무려 대신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놀이의 신 따위를 운운하다니. 대체 이 인간 누가 대신관 시켜 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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