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6화 (146/220)

146화.

생각은 길지 못했다. 왈칵 피를 토하는 순간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로젤린은 바닥을 보고 피를 뱉어 내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흐려진 시야에 점점 멀어지는 디에즈의 등이 보였다.

다시 한번 로젤린이 아픈 기침을 토해 내자, 마카롱이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몇 분 뒤, 올가미 용병단의 단원들이 도착했다. 남자들이 경계 태세로 주위를 훑다가 반쯤 쓰러져 있는 로젤린을 보고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로젤린 경! 아니 쥬, 쥬쥬 씨 이게 무슨…….”

“알 거 없잖아. 손대지 마.”

마카롱이 로젤린을 안아 들었다. 로젤린은 흐르는 눈물을 그의 옷에 비벼 닦아 냈다.

“이제 좀 자.”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로젤린은 수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디에즈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경악 어린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아까 전 그가 있던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디에즈는 천천히 걸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연히 발걸음은 깊은 숲속을 향했다. 바람이 기묘하게 많이 부는 곳이라 했더니,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이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디에즈는 그곳에 로젤린을 찌른 단검을 떨어트렸다. 피 냄새가 실려 와 어지러웠다.

로젤린은 자신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눈동자에 의문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로젤린의 죽음을 바랐는가? 그녀를 왜 죽였어? 왜 나를 또다시 죽이려 해?

답을 해 주지 못한 것은 방해자가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로젤린 당신은 알 것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근접한 거리의 사냥감을 결코 놓칠 리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가 절벽 아래에 떨어졌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젤린. 그대만은 알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는 기어코 죽이지도 못해, 벼랑으로 그녀를 몰았던. 제 계획,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험을 뒤로한 채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던. 내가 왜 또다시. 너를 어떻게.

숨이 막혔다. 손등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바라보고 나서야 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최초의 장면은 철창 안에 죽어 있는 사람들로 시작한다.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과 금안의 소년은 침대에 앉아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을 쭉 훑었다. 장식물, 바닥을 덮은 카펫, 창문을 가린 커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장식물들의 생김새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성적인 소년은 별달리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지, 애완동물이었던 자신, ‘에파’에게 이 공간을 답답하다 항상 말하곤 했다. 그때는 질릴 정도로 화려한 방 안이라는 감상뿐이었으나.

확실히, 지금 이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로 본 방 안은 인형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고서는 수발을 들었다.

호숫가 근처에서 사라진 황자가 몇 시간 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된 사건 자체는 차치하고, 그 이후 말을 아주 잃어버린 병증을 앓고 있는 일은 최근 백옥 성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아끼던 애완동물 에파가 사라졌는데, 그 때문이라느니. 뇌 쪽의 어떤 문제가 있는 거라느니. 말은 많지만 이렇다 할 해결 방법은 없는 상태로, 사고 전 방실방실 방긋방긋 잘 웃던 황자 전하께서 입을 조가비처럼 딱 다물고는 무표정하게 있으니 시녀들 또한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음식을 나르자 내내 무표정하던 디에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는 포크를 어설프게 쥐고는 닭 가슴살이 올라간 샐러드를 야무지게 찍어서 먹었다. 세 종류의 버섯이 들어간 수프도 후후 불면서 잘 떠먹고, 빵도 예쁘게 찢어서 잘 씹었다.

이틀 전 막 의식을 차린 사람치고는, 게다가 그 이전에 짧은 입으로 시녀들을 고생시켰던 장본인치고는 굉장한 식사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잘 드시는 황자 전하가 기특하고 고마워 눈물짓기만 했다. 잘 먹어야 낫는다 하지 않던가. 그게 육체적인 문제 외에도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디에즈는 시녀들에게 다 먹은 접시를 두 손으로 건네주는 방식으로, 더 달라는 뜻을 표했다. 시녀들이 흐물흐물해진 얼굴로 제 주인을 바라보고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디에즈는 입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를 혀로 핥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어긋났음에도, 지금의 디에즈와 사고 전의 ‘디에즈’가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주 자그마한 이질감. 뭔가 좀……? 고작 그 정도. 의심까지 미치지도 못하고 흘러가 버린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 와중 단 한 사람이 바늘 같은 이질감을 눈치챘다. 작지만, 날카롭고 뾰족하다. 박혀 있으니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과거 ‘디에즈’가 어머니라 부르던 인간이었다. 겉가죽을 뒤집어쓸 수 있는 괴물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면서, 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절절한 피의 연결 고리가 끊긴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라면 반드시 알아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국 힐리사고 왕국, 그중에서도 권세가 대단치 못한 집안의 장녀였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반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었다.

황제의 부인이라고 하면. 나라의 어머니나 다름없다 하지 않나? 나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평범하게 비슷한 직위의 귀족과 결혼해서 애 둘 셋 낳고, 평범하게 가정을 지키다가…….

물론,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계획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혼인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어린 나이. 득세하지 못한 귀족 가문의 여인이 상상한 미래는 이렇지는 않았다. 그녀가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너무 괴상하게 흘러간 탓에, 그녀는 황실에서 지내는 모든 나날을 힘겨워 했다.

어디든 기대고자 했지만,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은 없었다. 그녀의 외가 또한 그녀를 팔아넘긴 장사치에 불과했다.

그녀를 원해서, 어린 나이에 타지로 끌고 온 황제 또한 전혀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했다. 황제는 향수병에 걸려 하루 종일 우울해하는 여자를 달랠 만큼 자상하지도 못했고, 그런 귀찮은 일을 도맡을 만큼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어려서 풋풋하고, 예쁘니 보기 좋다. 딱 그 정도의 관심. 그 정도의 애정. 그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배경에서 디에즈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엘피디오가 얼마나 강력했건 간에, 아들인 이상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용하던 백옥 성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축하하고, 황제도 아들이라는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갖은 빛나는 것과 많은 이들이 탐내는 것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찾아냈다. 이 어둡고 무서운, 거대한 미로 같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잡게 된 실. 미로의 출구를 알려 주는 가느다란 실이 제가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발의 사내아이는 아름다울뿐더러, 명석했다. 기대는 그만큼 높아졌다. 자랄수록 엘피디오의 세가 급격히 불어나며, 현 황제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녀는 디에즈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디에즈는 그녀의 집요한 눈길 아래에서 자라났다.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지내는 공간,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어야 할 시간. 그의 모든 생각까지.

그런 것은 입에 대면 안 돼, 디에즈. 황제 폐하는 붉은색을 싫어하셔, 디에즈.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아침을 먹고, 9시까지 역사학을 공부해야 해. 12시까지는 성전을 읽고, 1시까지는 점심을…… 황족으로서의 몸가짐을……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준비를…… 모두 너를 위해서야.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인지, 혹은 원래 그가 그런 성정이었는지. 디에즈는 유약했다. 휩쓸리고, 순응했다. 디에즈는 자주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녀를 위해 웃었다.

약해 빠진 것. 과거 ‘디에즈’에 대한 평가였다. 한때 ‘디에즈’의 애완동물이었을 때에도 그렇게 느끼긴 했으나, 이따금 그의 생각이 떠오를 때면 평가는 더욱 신랄해졌다.

“디에즈.”

아, 또 왔다. 의심의 눈초리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들어서는 그의 어미. 아니, 어머니.

디에즈는 눈을 휘며 생긋 웃었다. 거울을 보고 연습한 결과였다. 과거 ‘디에즈’의 모습과 똑 닮아 있음에도, 그녀의 낯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눈빛이 불쾌했다.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지내는 공간, 시간. 모든 생각까지. 전부 그녀의 뜻대로 한다고 해도 자신이 디에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사랑일까.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그날 밤 백옥 성이 불타올랐다. 디에즈가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은 삼일 전. 좋지 않은 사건을 최대한 숨기고자 하는 황실의 특성상, 그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아는 것은 백옥 성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5황자 디에즈가 화재 전에 쓰러졌었고, 깨어났을 때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백옥 성과 함께 검게 타올라 사라졌다.

너울거리는 불빛이 어두운 하늘을 비췄다. 디에즈는 열기가 닿는 곳에서 탁탁 튀어 오르는 불티들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뜨거웠다.

콰르르 소리와 함께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디에즈가 한걸음 물러서자마자 그 자리로 무거운 조각들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걸음을 돌려, 처음 시작한 장소로 향했다. ‘디에즈’가 사라지고, 지금의 자신으로 변한 호숫가. 그는 꽃이 예쁘게 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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