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로젤린은 목구멍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핏물을 느끼고 상황을 겨우 인지했다. 공격당했다. 등 뒤의 완벽한 사각으로부터. 숲의 가지를 치던 용도로 줄곧 들고 있던 단검일 것이다. 몸을 뒤튼 덕에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스치고 바로 옆에 꽂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 타격을 입었으리라.
“아악!”
로젤린은 재차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일격이 빗겨 나간 것을 눈치챈 디에즈가 박혀 있는 단검을 그대로 비틀어 내부를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뼈와 근육이 벌어지는 고통은 신경을 예민하게, 머리를 무디게 만들었다.
어떤 살의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낌새도 읽을 수 없었다. 사람의 심장. 기관의 중심부를 향한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온화하고 어떠한 의도도 없었기에, 한순간 디에즈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로젤린은 깨달았다. 등을 할퀸 고통으로부터, 죽어 가는 숲의 향기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이것은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고, 아주 강렬했다. 깊게 새겨져 있었다.
디에즈. 그였다.
로젤린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어두운 숲. ‘로젤린’의 뒤를 쫓던 자. 그녀의 죽음을 바라던 자. 한 번 더 제 죽음을 바라는 자. 냉혹한 손톱을 가진.
또 다른 ‘그것’.
디에즈. 디에즈의 그림자.
* * *
천막이 바람에 천천히 나부꼈다. 틈새로 어두운 숲이 비쳤다. 빗소리를 뚫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똑똑히 닿았다. 눅눅한 공기를 폐 깊숙한 곳까지 보내는, 그 경악 어린 숨소리!
디에즈는 잠시도 주춤하지 않고 튀어 나갔다. 공기는 천 한 장을 경계로 온도가 바뀌었다. 휘이이, 칼바람이 불었다. 비가 머리와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망토를 휘날리며 도망치는 불청객이 보였다.
쿵, 쿵, 쿵!
크게 발을 몇 번 구른 것만으로도 디에즈는 그 사람을 손쉽게 따라잡았다. 디에즈는 망설임 없이 커다란 짐승의 손을 휘둘렀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톱 아래 부드러운 살과 근육이 찢겨 나갔다. 어마어마한 힘에 불청객은 말에 치인 것처럼 붕 날아 앞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사람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디지? 어디부터 봤을까. 아까 전 천막 밖을 나갔던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도 보았을까? 이 손도? 인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이 기괴한 몰골의 손도?
실수.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습격 전 접선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이번만큼은 리카르디스도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리카르디스가 쉬운 상대가 아니란 사실도 알고, 모든 일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이야기 또한 그저 그러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연했던 끝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하, 숨을 쉬고 감회에 잠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접근을 허용했던 방심은 그 때문이었다.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천천히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질 테니. 상처 입고도 어린 영양처럼 어두운 숲을 헤치고 도망가는 저, 저 인간을 잡지 못하면!
디에즈는 힘차게 내달렸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젖은 흙과 나무, 피의 냄새. 그 사이를 뚫고, 디에즈는 익숙한 이의 향기를 맡았다.
햇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아, 당신만은 아니길 바랐건만. 비 오는 밤. 어두운 숲.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에서, 피 흘리는 자가 당신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방심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 * *
바람이 단검을 스쳐 지나가자 피 냄새가 났다. 디에즈는 그것에서 문득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오래전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녀, 진짜 로젤린이 죽은 것이 오래된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필사의 힘으로 디에즈의 품에서 벗어난 로젤린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컥컥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깊은 상처의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내가 ‘로젤린’을 죽였지. 피 냄새를 맡은 후에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걸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디에즈는 웃음을 흘렸다.
로젤린은 검을 바닥에 꽂아 몸을 지탱했다. 디에즈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인간이라면 치명상. 피 냄새의 농도만으로도 그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디에즈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생각은 사실 대단한 믿음을 기반으로 해야만 싹을 틔울 수 있지 않던가?
디에즈는 사냥 대회 출발 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하던 말을 모조리 들었다.
[누구도 믿지 말 것.]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믿지 말라 했음에도, 로젤린은 자신을 믿었다. 그것이 못내 기쁘기도…… 허무하기도…….
로젤린은 울었다. 고통의 자극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을, 죽인 건…….”
그녀의 질문은 확신에 차 있었다. 과거 ‘로젤린’을 죽인 자가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확실히, 가끔 계기가 주어지면 기억은 한순간에 피어오르기도 했으니. 그녀도 그런 것이리라.
“저예요, 로젤린.”
젖은 녹색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내가 당신을. 내가 당신의 등을 헤집고, 절벽으로,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왜, 그러셨…… 습니까.”
디에즈는 그녀의 질문을 되새겼다. 왜? 그 말에 이상하게 답하기 힘들었다.
“나는…….”
목이 잠겼다. 서서히 숨구멍이 조이는 기분이라 디에즈는 제 목을 감싸고 있던 옷을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난, 로젤린.”
하지만 그러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무슨 얼간이 같은 작태인지. 디에즈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파삭, 파사삭.
서로 마주 보고만 있던 그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과 앙상한 가지를 지나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선명한 것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뛰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 누군가의 존재를 확정했다. 로젤린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맹금류의 왕이리라.
디에즈는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보았다. 검신을 뒤덮은 피는 아직까지도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 붉은 빛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일깨웠다.
[그러니까, 뭐랄까. 내 나름의 끝맺음을 하고 싶어서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끝맺음.
디에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안에서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디에즈가 움직였다. 저벅, 저벅. 그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은 디에즈를 올려다보았다. 미소 한 점, 감정 한 점 읽어 낼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디에즈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로젤린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휘감고, 폭발하듯 순식간에 공간을 메웠다.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로젤린이 휘청이며 피를 토했다. 그녀가 큰 빈틈을 보였으나, 검날은 로젤린을 조금도 스치지 못했다. 디에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로젤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기운을 생생하게 느꼈다. 온 산을 뒤덮는 강력한 어둠. 마력을 가진 생물이라면 숨죽이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이, 거대한 힘. 디에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멈칫한 찰나의 순간. 숲속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던 소리가 막 당도했다.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들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디에즈는 빠르게 방어 태세를 취했다.
쿵!
무언가가 터지듯,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촤아악, 로젤린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의 부츠가 흙바닥을 긁었다. 크게 밀려났던 디에즈도 몸의 균형을 잡았다.
로젤린이 제 앞에 등을 돌리고 선 남자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며 잿빛 머리가 흩날렸다. 마카롱이었다. 로젤린은 간신히 지탱하고 서 있던 몸에 힘을 풀고 풀썩 주저앉았다.
“물 마셔.”
마카롱이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건네준 성수를 기억해 내고 떨리는 손길로 수통을 열어 마셨다. 큰 효과는 없으나 아주 조금씩 피가 멎는 것 같긴 했다.
그녀가 수통을 다 비워 내는 그 순간까지도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며 스산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두 남자도 로젤린도 아닌 무리를 이룬 발소리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카롱의 시선이 흘끗 그 방향을 향했다가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갔다.
디에즈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세 사람의 침묵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뚝 끊겼다. 다시 무언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마카롱이 몸을 굳히며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충돌은 없었다.
디에즈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마치 누군가에게 공격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사람 같았다. 마카롱이 주춤 한 발짝 내딛었지만,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카롱과 디에즈. 두 사람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절단에 있었을 때 독수리의 모습으로 지나쳤기야 했을 테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뭐랄까. 잘 아는 사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