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4화 (144/220)

144화.

디에즈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눈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딱딱하게 굳어 버린 표정 때문인지 어딘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형님을 참 좋아하나 봅니다.”

“예쁘니까요.”

디에즈의 얼굴에 걸려 있던 어색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슬슬 굴렸다. 학술지를 읽을 때의 표정 같았다. 고민, 고찰, 고심. 리카르디스 전하가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거리인가?

“아!”

디에즈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탄성과 함께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더 예쁩니까, 형님이 더 예쁩니까.”

로젤린은 최근, 스스로 기민한 눈치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했다. 이런 경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앞에 있는 사람이 기분이 상할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긴 합니다만 누님…….]

언젠가의 칼릭스가 했던 얘기였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디에즈 전하가 더 예쁩니다.”

디에즈는 환하게 얼굴을 폈다.

“그럼, 제가 더 좋습니까?”

예쁘면 좋다. 그렇다면 더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니냐. 디에즈는 완벽한 논리에 입각한 주장을 펼쳤다. 로젤린은 침울해졌다. 역시 거짓말은 할 게 못 된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누님!]

동생의 말은 항상 옳았다. 하얀 거짓말도 결국은 거짓말인 것을…….

로젤린은 머뭇거렸다. 그녀가 지키는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디에즈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표정과 눈빛이라, 로젤린은 질책을 받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혼나는 기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군요, 로젤린. 저와는 달리.”

디에즈는 그 말을 끝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곧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로젤린이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걸을 때면 항상 보폭을 맞추던 남자는 제 기분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멀어졌다. 성큼성큼.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는 태도인데도 다리 길이가 길어서 그런지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로젤린은 여기저기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밟으며 열심히 디에즈를 쫓았다. 사박사박, 사뿐사뿐하게 걷는 소리가 뒤따라오자 디에즈의 속도가 느려졌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차분하게 걸었다.

디에즈는 입가를 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한걸음 뒤에서 의기소침한 얼굴로 따라오는 로젤린이 그려졌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풀렸다. 두 사람은 그 미묘한 기류를 유지한 채 몇 분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때, 로젤린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디에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마른 수풀을 뒤적이고 있었다.

벼락에 쪼개진 고목, 메마른 땅,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이 늘어진 이곳은 황량한 무덤이나 다름없으리라. 온통 칙칙하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서는 풍경 안에 하얀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디에즈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죽어 버린 땅에서도 피어나는가.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지긋지긋하게도.

로젤린은 그 흰 꽃을 부드럽게 뜯어냈다. 아주 소중하고, 연약한 것을 보살피는 손길이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망토 위로 흘러내리고, 내리깐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로젤린이 살짝 미소지었다.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디에즈는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꽃의 이파리 하나하나를 곱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달았다. 저것은 선물이었다. 저 색을 닮은, 누군가를 위한.

숨이 막히는 기분에 디에즈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멈춰 버렸나 했더니 심장박동은 어느 때보다 컸다. 고장 난 듯 불규칙적으로 두근…… 두근, 쿵쿵하고 울렸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디에즈의 눈과 머리카락에서 붉은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형님을 좋아하네요.”

이번 그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군요. 납득하며 체념하는 기색이 비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젤린은 굳이 그의 말에 답을 붙였다.

“예.”

디에즈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오랜 시간을.

“로젤린.”

“예, 전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아까 군마 초콜릿을 구해 준 답례를 말하는 것일까. 디에즈의 표정은 아까의 차가움과 딱딱함이 온데간데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평소에 보던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위를 포근하게 만드는 그 미소에 로젤린은 이상하게 한기가 느껴진다 생각했다. 솜털이 쭈뼛 서며,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말 것.]

본능이 위험하다 말했다. 로젤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던 제 행동을 멈췄다. 디에즈가 위험? 그가 위험하다? 자신에게? 로젤린은 짧은 시간 자신을 휘감고 간 본능의 경고에 살짝 혼란스러워졌다.

디에즈는 곤란한 상황에 있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 줬다. 단둘이 있던 때도 많았다.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었으리라. 예를 들면,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뒷골목에서라던가.

생각해 보면 해 볼수록 디에즈는 아닌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불안감, 불씨는 너무 작았고, 그 조금의 가능성을 가리는 신뢰는 보다 짙고 커다랬다. 로젤린은 천천히 끄덕였다.

“어떤 부탁입니까?”

디에즈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상상할 수 있는 그 너머에서 튀어나온 내용이라 당혹스러웠다.

“갑자기요?”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런 말은, 언제 어떤 상황에 꺼내도 이상할걸요.”

확실히. 그렇다. 과거 로젤린부터 몇 년 친하게 지내 온 사이라지만 제국의 5황자와 2황자의 호위 기사가 포옹할 만한 상황이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내 나름의 끝맺음을 하고 싶어서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전하가 저를 안는 일이 무언가를 끝맺는데 도움이 됩니까?”

“그럼요. 그래서 하는 부탁이에요.”

본인이 그렇다는데 ‘전하가 저를 안는 일로 전하 나름의 끝맺음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언가 목에 턱 걸린 듯, 껄끄러워 로젤린은 침을 크게 한번 삼켰다.

로젤린, 위험한 것이 있어. 조심해. 누구도 믿어서는 안 돼. 리카르디스의 말을 잊을 리 없으나…….

“역시…… 좀 그렇죠? 미안해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디에즈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거친 손놀림에 당황이 묻어 있었다.

“그냥 한번 안아 보고 싶었어요. 내가…… 오랫동안.”

그가 로젤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로젤린을 좋아했거든요.”

넓은 숲 공간 어디에도 퍼져 나가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만 오고 가는 주문 같은 작은 말소리였다. 리카르디스와도 쌓은 적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유대감이 그녀의 발을 이끌었다.

어두운 밤, 더러운 골목을 손잡고 빠져나올 때. 말하지 않아도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것 같던. 그가 보여 왔던, 그와 그녀가 쌓아 왔던 시간 그 이상의 유대. 마치 본능 같은, 오랜 기억 너머에 새겨져 있는 것.

로젤린은 주춤거리다 디에즈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한걸음 딛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었다.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동글동글 부드럽고, 예쁜 색채가 가득한 좋은 감정들뿐이었다.

로젤린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거리가 가까워졌다. 디에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물속에 담겨 있는 듯 일렁였다.

발과 발끝이 닿을 거리. 로젤린은 그를 올려다봤다. 디에즈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뾰족뾰족하게 서 있던 이상한 경계가 누그러졌다. 누구도 믿지 말 것.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했던, 중요한 말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로젤린은 열려 있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좋은 향기가 났다. 향유가 아닌 사람의 살 냄새와 바싹 마른 천 냄새였다.

툭, 그녀의 이마가 자신에게 닿을 때부터 줄곧 굳어 있던 디에즈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로젤린은 곧 답답할 정도로 그에게 끌어 안겼다. 괴롭지는 않았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추워 보이기도, 아파 보이기도 했다. 언제나 웃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문득 무투 대회의 마지막 날. 그때의 그가 생각났다.

회장의 중간에서 황제가 자신에게 검을 하사하고, 관중들이 환호를 지르는 위로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던 그때. 찬란하게 햇살이 내리쬐던 날의 디에즈의 얼굴.

꽉 껴안고 있어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어쩐지 디에즈가 그런 얼굴을,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왜 울었던 걸까? 묻는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묻는 것도 좀 이상한 느낌이라, 로젤린은 곰곰이 그때를 돌이켜 생각했다.

그날의 뜨겁게 작열하던 햇살은 똑똑히 기억한다. 널찍하게 뚫린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까지도.

[영광의 일라베니아!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있으니 영원하리라!]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 속에서 들끓던 분노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을 가리는 완벽한 가면. 디에즈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기억났다. 지금처럼, 아주 다정하게.

순간 소름이 일었다. 안겨 있던 로젤린이 몸을 확 뒤틀었다.

“컥!”

로젤린이 왈칵 비명을 토했다. 디에즈의 품에 선명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로젤린의 손이 그의 망토를 세게 그러쥐었다. 힘줄이 굵게 돋아 올라왔다. 손끝이 저릿하고 머리가 삐쭉 서는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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