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3화 (143/220)

143화.

한참 커다란 짐승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짹짹 소리가 커졌다. 산새들이 복슬복슬한 그녀의 머리 위에 앉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가져다 두기도 했다. 로젤린이 몸을 일으키자 산새들이 후다닥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햇빛이 들어오는 양이 많아졌다. 로젤린은 곧고 길게 자란 나무들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성한 나뭇잎이 지붕처럼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른 나뭇잎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모양새였다.

오래되고 깊은 숲이었다. 산새들이 자신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의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묘하다.

사라지지 않는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지도, 다가오지도 않는 걸음 소리가 자신을 쫓아왔다. 로젤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숲의 초입에서야 사람들이 많으니 의문의 추적자, 그 존재 자체도 확정 지을 수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위험해. 누구도 믿지 마. 그 수 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오랜 시간 자신을 추적해 온 자가 그다지 위협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 존재를 숨기려고 한다든가, 걸음 소리를 죽이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아서일까. 그저 거리를 두고 같이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살의를 비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 신경이 보이지도 않는 방향에 쏠리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에게 돌아가면서 위험하다는 말을 삼백 번쯤 들은 지금에야, 바짝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의문의 추적자는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저벅저벅. 부츠에 흙 자갈이 마찰 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은 보조 가방에서 해풍에 말린 쫄깃 달콤한 육포를 꺼냈다. 씹으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로젤린과 한 공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면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전히 마주 볼 수 있는 거리.

열세 걸음.

남자는 멈추지 않고 똑바로 걸어왔다.

여덟 걸음.

로젤린은 육포를 우물거리며 허리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세 걸음.

“떽끼.”

언젠가 많이 들었던 타박의 말에, 로젤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못써요.”

남자가 로젤린을 그대로 지나쳐 초콜릿의 주둥이를 찰싹 때렸다. 초콜릿이 황당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로젤린도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 인물?

“디에즈 전하?”

“아, 로젤린. 억.”

초콜릿이 성이 났는지 디에즈의 복부를 주둥이로 꾹꾹 밀었다. 명치 부근이 눌린 그가 아픈 소리를 냈다. 로젤린이 고삐를 틀어쥐어 짐승의 행동을 제지했다.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도리어 초콜릿이 그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디에즈가 어색하게 웃으며 초콜릿의 얼굴을 슥슥 쓸었다. 초콜릿이 고개를 팩 돌렸다.

“갑자기 초콜릿은 왜 때리십니까?”

로젤린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지금의 심정을 드러냈다. 남의 귀한 집 자식을 왜 때리나. 디에즈가 손을 저으며 급하게 해명했다.

“아니, 로젤린 경. 로젤린. 지금 동물 학대범을 보는 눈빛인 건 알고 있나요?”

“예.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동물과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디에즈는 무척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곧 그는 다급한 몸놀림으로 초콜릿이 고개를 파묻고 있던 수풀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뜯었다.

“독초입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죠. 효과? 이런 때 쓰는 말이 맞던가…… 아무튼, 초식 동물들이 좋아하는 풀과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어린 짐승들이 종종 먹고 죽는 경우가 있다더군요. 위험할 뻔했습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초콜릿의 입을 쩍 벌리고 샅샅이 훑었다. 곧 풀려난 짐승이 큰 콧구멍으로 씩씩 숨을 내쉬며 분노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로젤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라, 정말 고마웠다.

“별말을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제법 도움이 되었죠?”

“네.”

“그러면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디에즈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로젤린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수락했음에도 디에즈는 웃지 못했다. 웃기는커녕 심란해 보였다.

“……저 로젤린.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소원이나 부탁을 들어달라는 둥, 계약을 하자는 둥 하면 알겠다고 바로 대답하면 안 됩니다. 누가 계약서 내밀면 바로 사인하지 말고, 칼릭스 경이나 레이몬드한테 들고 가서…….”

“전하.”

디에즈가 아차,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대충 넘어갔다.

“제게 부탁할 일이 있으십니까?”

“언제나 많았죠.”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로젤린이 이거냐 저거냐, 갖은 추측을 하며 물어도 디에즈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혹시 비밀스러운 것을 부탁하려면 다시 생각하라 했다. 요즘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가 많아진 터라, 이상하게 입이 가벼워진다며.

그녀가 하는 말을 듣던 디에즈가 바람 빠지는 듯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이제 말을 굉장히 잘 하네요.”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동화책도 많이 보고.”

“대단하네요, 그 짧은 시간 안에.”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디에즈가 치켜세워 주는 말에 없던 제 노고가 툭툭 튀어나왔다. 모름지기 힘들게 얻은 것이 더 귀해 보이지 않던가.

“그래도 사교계에 녹아들기에는 좀 힘든 수준이라고 합니다. 더 열심히 할 겁니다.”

“괜찮아요, 앞으로 일이 년이면 될 거예요. 기억도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고 질긴 나뭇가지가 로젤린의 후드를 잡아챘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디에즈가 단검을 꺼냈다. 로젤린은 잠시 몸을 굳히고 그를 주시했다.

위험해 로젤린. 누구도 믿지 마. 리카르디스가 속삭였다. 그러나 디에즈의 단검은 미련 없이 그녀의 후드를 잡고 있는 가지를 끊어 낼 뿐이었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 그가 실어증에 걸렸을 때를 말하는 것인가. 로젤린은 고개를 까닥이며 디에즈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아 생긴 좁은 길마저 사라지니, 완전한 숲속이었다.

“마수라도 나올 것 같은 풍경이네요.”

디에즈가 흘리듯 내뱉은 말을 들은 로젤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의 그녀, ‘그것’이 지내던 숲과 비슷해 보였다. 죽어 가는 땅 위에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채 우뚝 서 있거나.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초록색 잎은 보기 힘들어졌다. 디에즈는 담담한 얼굴로 숲의 풍경을 훑었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으나, 일라베니아는 아직 나무가 자라며, 과실이 맺혔다. 일라베니아가 쥐고 흔드는 신의 힘. 성력의 진면모였다. 치유력은 인간, 동물, 식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힘이 죽어 있는 대지에까지 영향을 주라고, 축복의 밤이 순리대로 찾아오던 그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땅이 죽어 가고 황폐해져 가자, 어떻게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성수를 뿌리던 행위가 탁월한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몇 년, 몇 개월 정도의 가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을지라도.

로젤린에게 보통의 숲이란, 이렇게 죽음에 반쯤 걸쳐진 풍경이었다. 인간이 되고 한참이 지난 후. 역사를 배우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어딘가 어긋나 버린, 잘못된 결과라고 알게 되었다.

로젤린은 마른 잎 하나 달고 있지 않은, 비어 버린 숲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땅이라지만 그녀는 다르게 느꼈다. 평생을 지내 오던 곳이 이러했으니, 인간으로 치면 고향의 정경과 쏙 빼닮은 곳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편안했다. 로젤린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나뭇가지를 스치는 햇빛을 받았다.

“아, 로젤린. 그러고 보니 축하 인사가 늦었네요. 무투 대회 우승.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무투 대회 이후로 다들 우승을 축하해 줘서 어깨가 으쓱했다. 많이 들었지만, 칭찬의 말은 언제나 반가웠다.

“정말 멋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멋있었습니다.”

디에즈가 맞아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묘하게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디에즈도 싱글벙글이었고, 로젤린도 기분이 좋은 터라 마주 보고 방긋 미소지었다.

“우승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어마어마한 우승 상금이 비로소 제 것이 되어 기뻤습니다. 제 것이 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 확정이 난 것이니까요.”

“음…… 그래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일원이자, 2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가 그 영예로운 자리에서 돈을 먼저 떠올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디에즈는 당황스러웠다. 로젤린이야 월급의 90%를 먹는 것으로 소진했고, 그 90%의 지출도 최대한 절약한 거라는 점에서 우승 상금은 매우 반가운 소득이었다.

우승 상금을 받고 비싼 치즈 한 덩어리를 사서 주방장에게 맡겨 놓았다며, 매끼 치즈 요리가 나와서 좋다고, 아직까지는 안 물린다고 로젤린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나머지는 수도에 있는 음식점을 순회하기 위해 아껴 놓았단다. 그런 얘기를 하던 로젤린이 아, 하고 본래 이야기 흐름을 찾아 돌아왔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기뻐하시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우승하면 기분이 좋으실 거라 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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