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42화 (142/220)

142화.

“왕녀.”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간제는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곤거렸다.

“호위를 다 떼어 놓고 왔습니다.”

그 호위들을? 간제가 입만 열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꾹 눌러 대던 그자들을? 그들은 결코 간제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녀의 입에서 퍼질 얘기들을 단속해야 하는 자들이므로. 반드시.

“주위가 소란스러운데 혼자 다니시는군요, 왕녀.”

간제가 빙그레 웃었다.

“다들 제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겁니다.”

“……왕녀를 두고?”

“시끄럽게 쫑알대기에 재워 버렸습니다.”

막사를 나서던 스타스와 레이몬드가 멈춰 섰다.

“어떤 방법과 어떤 의도로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자들이 있으면 못 할 얘기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간제가 생긋 웃으며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스타스가 리카르디스의 앞을 막아섰다. 간제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보였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길쭉하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나왔다.

“환각과 수면 작용을 하는 약재와 독을 적당히 배합한 향입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효과가 아주 좋은데, 혹 필요하시다면…….”

“음…… 아니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진 않군요.”

리카르디스는 눈짓으로 기사들의 경계 태세를 물린 후에 그녀 앞에 앉았다. 간제는 발타에서부터 쭉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행동으로, 말로. 얘기하자, 얘기를 나누자. 당신과 나. 둘이서.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끈질기고 거침없는 행보가 단순히 개인과 개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라베니아 대 발타? 이름뿐인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카브라는 왕을 두고서 감히?

눈이 마주쳤다. 간제가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안 합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좀 당황스럽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시고? 마저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싫습니다. 혼인 얘기를 하려던 것 아닙니까.”

간제가 와 하고 감탄하며 마구 박수쳤다.

“저희 왕실에 미래를 읽는다는 명목으로 한자리 꿰차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훨씬 솜씨가 좋으십니다.”

“그거 영광이군요.”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낀 채로 느릿하게 손마디를 훑었다. 간제가 휴 숨을 내뱉었다.

“참 아쉽습니다. 발타의 귀한 아가씨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미모의 주인공을 남편으로 꿰찰 기회라 생각했는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눈이 높군요, 왕녀. 미안하지만 나도 눈이 높습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후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어딘가 미묘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 찔러 봤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그녀가 단순히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척 봐도,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하카브의 눈에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혈육의 정?

하카브는 그렇게 달콤한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러고도 제 오라비의 눈에서 멀어질 일만 골라 했다. 죽지 않았다고는 하나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

간제는 어쩌면, 혼인이란 이름의 동맹을 맺고자 이 자리에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카브의 계산속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덜컥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건이 아니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간이, 상황이 달라지며 무언가 변할지도 모르니, 심사숙고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은 두 번의 기회는, 저 또한 물러 두겠습니다. 무언가 변하는 게 있을 때까지.”

세 번의 기회라. 그에게도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리카르디스도 같이 일어났다.

“막사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왕녀. 마수가 처리되었다고는 하나, 한 마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

“세상에…… 지금 일 분 전에 찬 여자를 데려다주겠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기에 왜 호위를 전부 재우고 그럽니까.”

간제가 입을 쭉 빼고 툴툴거렸다. 막사의 천을 잇세리온이 걷으려고 하던 차, 간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도 따라 멈춰선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뭐든 빨리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수라 하시니 생각나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마수가 언제 생겨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생겼느냐? 뭐, 이델라브힘이 세상을 비춘 그 날부터니, 대충…… 몇천…… 몇만…… 모르겠다. 리카르디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오래됐겠지 뭐. 무뚝뚝한 대답에서 그 뜻을 읽어 낸 간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에서 아는 내용이 조금 다르더군요. 그저 여흥으로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문헌상으로는 대략 삼백여 년 정도? 그때부터 마수가 나타났노라 이릅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되새겼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역사의 보고다. 어릴 적부터 갖은 교육을 받았으나, 그런 비슷한 얘기라고는 한 톨도 본 적 없었다.

마수는 동물, 식물과 같이 그저 세상과 함께 탄생한 무언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몇백 년 전에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라는 얘기가,

“아.”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렸다.

‘시기가…….’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축복의 밤이 사라진 때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설원의 월계수. 그 반쪽이 되는 마인 가문. 그들이 사라진 때와.

우연일 리 없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곳이 많아 그 조각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상이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잘게 손을 떨었다.

머릿속에 붉은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마수의 피에 흠뻑 젖은 바퀴가 융단을 더럽혔다. 생을 위함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돌연변이. 목에 칼날을 박고도 분노를 터트리던 ‘그것’의 포효가 생생했다.

* * *

282년. 막 싹이 움터 오는 봄. 아직은 쌀쌀하던 때.

들판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강한 힘으로 사지를 뽑아 낸 비참한 모습으로, 심장이 사라진 채였다.

282년, 첫 번째 꽃망울이 터지던 날.

전의 사건과 비슷한 형태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 또한, 인간이 한 것이라 믿겨지지 않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 시체가 짐승의 소행이 아니라 판단한 이유는, 발톱이나 이빨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283년, 햇살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계절.

지방 영지의 작은 마을 하나가 몰살당했다. 또한, 앞선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범인은 그 마을에 살던 마인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노라 증언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전역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부르는 위대한 힘 중 하나. 마력을 가진 자들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사람들은 서서히 마인을 피하기 시작했다.

284년, 붉은 낙엽이 바닥에 깔린 때.

황실 역사서에 정식으로, 마인이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었다.

284년, 밀이 고개를 숙이는 때.

마인들이 일으키는 끔찍한 사건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황실 또한 더 이상 이 모든 일을 좌시할 생각이 없다며 성기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사냥을 시작했다. 온 대륙, 온 영지에서 사람의 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몇몇 강한 마인이 황실로 잡혀가는 걸 봤다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확실치 않았다.

286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날.

남루한 차림의 마인 한 명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마인이 저지른 모든 끔찍한 살인 사건들은 황실의 음모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전파했다. 남자는 순찰하던 병사에 의해 즉결 처형당했다. 그 마인이 왜 도망가지 않고 사람 많은 거리를 뛰어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을 타고 흐르는 광기가 도진 것이리라.

287년, 축복의 밤.

일라베니아에 불길한 그림자를 몰고 온 마인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마인이 없으면 하얀 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했으나, 올해에 뜬 하얀 밤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마인, 그 불길한 것들이 빛을 가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내리쬐는 아름다운 나라.

일라베니아여, 영원하라.

17

그림자가 드리워진 숲속은 밖보다 차가운 공기가 머물렀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감이 예민하게 다듬어지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정경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말발굽이 땅을 울렸다. 미미한 진동에 다람쥐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새 수십 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토끼와 사슴이 무언가에 쫓겨 겅중겅중 도망쳤다.

잡아, 저기! 저기에 숨어 있다! 남자들이 소리치고,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환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울렸다. 정복자들의 거침없는 발걸음. 그 아래 우드득, 수풀의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까지.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로젤린은 인상을 잔뜩 쓰고 초콜릿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풀을 뜯고 있던 초콜릿이 투레질을 하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이동할수록 사람들의 기척과 소리가 사라져 갔다. 로젤린은 초콜릿의 목을 끌어안고 찰싹 붙었다. 부드러운 갈기가 그녀의 볼을 간지럽혔다. 불편했던지 초콜릿이 거친 숨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앞에 여우 새끼가 지나가도, 토끼가 달아나도 쫓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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