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로젤린 경. 이렇게 가까이서 볼 거라고는…… 세상에, 피부 좋은 것 좀 봐.”
간제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이 저지른 일은 무례하다 걸고넘어질 수 있었으나, 간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에게 키스하든지 인사를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되었다는 태도였다.
리카르디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여전히 찰싹 붙어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혔다.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경이 참 친근합니다. 제 오라비가 숨 쉬는 것보다 경의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 걸까요?”
간제의 뒤에서 호위가 자신의 눈을 덮고 가만히 분을 삭이고 있었다. 고생이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사냥 대회에 출전한다지요?”
“예.”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랍니다. 몸조심하시고요.”
“맹수는 전부 처리를 해 두었다 전달받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제 오라비가 탐낼 만도…….”
“어허허험!”
간제의 호위가 급하게 목을 풀었다.
“제 오라비, 하카브 왕자가 로젤린 경을 탐내는 이유를 알겠지 뭡니까!”
하지만 간제는 전혀 그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반복하다 못해 강조하기까지. 호위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하얀밤 기사단의 눈치를 봤다. 단원들의 표정이 서늘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로젤린을 꼭 껴안았다. 로젤린도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귓가에 숨소리가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맹수뿐만이 아닙니다, 경”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로젤린과 간제는 서로 눈을 맞췄다. 간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곧 로젤린에게서 떨어진 간제가 리카르디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 저에게 배정된 막사가 글쎄, 병장기를 모아 두는 곳 바로 옆이지 뭡니까! 우당탕 쿠당탕 아주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환에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막사를 옮겨 달라 한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참 자상하십니다.”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돌아봤다. 눈빛에 담겨 있는 걱정을 읽었는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했던 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리카르디스는 간제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냥 대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을 향해 쏠렸다. 정확히는 간제와 간제의 호위 전사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기묘하게 휘어 있는 무기의 형태. 하나하나가 일라베니아인에게는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줄지은 막사마다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눈빛을 달리하고 탈출로를 점검했다. 숲에서 술래잡기하던 라헤안시를 잡아와 다들 제 막사로 데려가고자 했다. 웃고 즐기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맑은 웅덩이에 떨어진 미꾸라지 한 마리. 간제는 그 모습을 쭉 둘러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차서 허, 숨을 내뱉었다. 하카브도 없는 이 자리에 왜 나타났나 했더니.
간제는 자기 자신과 발타인들을 ‘사냥 대회’라는 곳에 떨어트려, 그때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검은달의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땅을 침범했던, 그날.
그러니 이것은 경고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며, 내 오라비인 하카브 왕자 또한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있다. 검은달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경계하라, 조심하라.
단순히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간제가 일라베니아 측을 일깨우기 위해 이 장소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살짝 뒤를 돌아봤다. 상급 기사들의 눈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것 참, 대단한 미꾸라지가 아닌가.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사라진 정적인 공간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뵈어 참 좋군요.”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숨넘어갈 정도로 웃어 댔다.
* * *
부우우, 사냥 대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수십 필의 말이 한순간에 내달렸다. 로젤린의 뒷모습이 숲속에 푹 파묻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되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막사로 돌아갔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 기사들이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자신에게 배당된 막사에 쉬거나, 연회장을 통째로 옮겨온 것 같은 저 밖에서,
“하하하!”
“호호호!”
저렇게 또 웃고 있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당연히 전자를 택했다. 신경 쓸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바보처럼 웃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던 간제가 막사로 들어가자 또 흥겹게 즐기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물론 경계야 늦추지는 않겠으나, 그녀 한 명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저 웃음소리들은 아마 간제, 그녀 한 명만을 위한 연극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도 나름 손님이라면 손님인 셈. 리카르디스는 제 정신력과 시간을 소모해 간제를 파티에 데려가 에스코트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고 있겠습니다. 조금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참, 그녀는 말하는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다. 그 얘기를 같이 듣고 있던 스타스는 막사에 물 샐 틈 없게 호위를 배치해 놓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준비된 간이침대에는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짐승의 털가죽이 올라와 있었다. 짐승의 누린내가 아닌, 향긋한 목재나 풀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생각났다.
한참 누워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음악이 뚝, 끊겼다.
“꺄아악!”
막사로 기사들이 들어옴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렸다. 르원.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 상급 기사 카일로, 파르딕트.
그들은 리카르디스를 등지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세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눈빛에 비하면 그다지 태도가 다급해 보이진 않았다.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가? 부단장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형 마수가 침입했습니다. 곧 정리될 테지만, 만약을 대비해 안을 지키겠습니다.”
“인명 피해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간제 왕녀 덕분에 막사와 파티장을 둘러싼 호위 병력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던 터라.”
크르르…….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는 보이지 않는 막사 밖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검을 든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온몸을 난자당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인간들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어 할 뿐이었다. 제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부분이 결여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침대 위에 앉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가 그치길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막사를 나왔다.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귀부인들이 남편의 품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대가리가 잘려 있는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
분명 마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여기저기 붉은 빛의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는 마수는 산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늑대의 생김새와 같았다.
마수는 일반적인 동물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또는 눈이 하나라든가, 입이 크다든가, 주둥이가 길다든가, 팔 한쪽이 뒤틀려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기형적인 부분이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늑대 형태의 마수에게서는 그런 점을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말에서 그 의문을 알아챈 스타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입니다. 흰자위가 빨갛고, 이상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갑옷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잇세리온.”
“예, 전하.”
“세터 아카데미의 교수 데미안이 말했던 것 기억하나?”
뜬금없는 물음에도 잇세리온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는 동물이 진화를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학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인간이 진화하면 마인이냐며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그가 했던 주장이 떠오르는군. 정말 그냥…….”
평범한 동물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평범한 동물이라면 이렇게 위협적인 무기가 가득한 곳에 홀로 쳐들어오지도 않고, 갑옷을 일그러트리는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괴한 야수는 그저, 죽을 때까지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일그러진 목적성을 지닌 돌연변이에 불과했다.
스타스가 마수의 사체 위에 제 망토를 덮었다. 그 끔찍한 참상에 눈을 돌리고 있던 자들,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던 자들까지. 짧은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깨닫고 자리를 떴다.
리카르디스는 조금 더 자리를 지켰다. 수레에 마수의 사체가 실려 나갔다. 뚝뚝 흐르는 피가 수레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뒤를 돌아 막사를 향했다.
막사를 지키던 레이몬드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인지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그 소동에도 얼굴 한번 안 비춘 인물일 것이 빤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제 막사인 양 편안하게 앉아 있는 간제의 모습을 보니 황당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