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여성체의 이름은 뭐라 했더라. 미미였나. 잘은 모르겠지만,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미미니 쥬쥬니 하는 이름의 인형이 유행한다던데. 미묘하게 입에 담기에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젤린도 독수리에게 ‘마카롱’, 자신이 선물한 군마에게는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혹시 이 종족, 이름 짓기는 영 꽝이라던가?’
리카르디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서라.”
“가암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고, 주위의 호위들도 로젤린을 제외하고는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제가 수줍음이 많습니다. 전하.”
“그런가. 그것 참 놀라운 정보인데.”
“낯도 많이 가려서 말입니다. 호위를 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전하.”
스타스가 남자를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로젤린에 대한 정체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강한 마인. 세간에 알려진 것과 동일했다. ‘그녀의 뒤를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부른 사람이다.’쯤으로 마카롱을 알고 있기에, 경계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되,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이 소심하게 의견을 냈지만 묻혔다.
“내가 부른 손님이다. 로젤린 경만 남고, 모두 나가 있어.”
스타스는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타스는 경례하고 단원을 이끌고 막사를 나섰다. 사람들이 없어지자 마카롱과 로젤린이 동시에 바깥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은 몰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물러난 것인지 두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마카롱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실은 불량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거 되게 귀한 몸이시군요, 전하. 제 얼굴을 모르시니 잠깐 비추고 가려 했습니다만 이거 무서워서 두 번 찾아오겠습니까?”
“보통의 평민이나 용병은 황자를 독대한다고 찾아오지 않으니 그대를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어쨌거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쥬렌즈.”
“친근하게 왜 이름을 부르고 그러십니까. 쥬쥬라고 불러 주시죠.”
리카르디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마카롱의 말을 외면했다. 곧 죽어도 쥬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언뜻, 눈에 비친 것 같기도 했다. 마카롱은 옆에서 제 입에 육포를 넣어 주는 로젤린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서로 깊은 얘기는 할 만큼 한 것 같고. 사냥 대회도 다가오니 굳이 얼굴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겠죠. 이 잘생긴 얼굴 잘 봐 두시죠. 기간 한정이기는 하지만 아군이기는 하니까 헷갈리지 마시고.”
“확실하게 익혔다.”
잘생긴 얼굴을 운운한 건, 분명 진심이겠지.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어제 한 말은 모두 기억하나?”
마카롱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전하.”
말이 짧아졌다.
“그 계획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에…… 전하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확신이란 것은 태어나서 가져 본 적이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정황을 살피며 최악의 상황을 준비할 뿐.”
“어떤 최악이 올 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전하는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여기고 그에 맞춰 대비를 한 거겠지.”
“따지자면, 그러하다.”
마카롱이 삐뚜름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그놈의, 나의, 로젤린의 뭘 알고 있어?”
존대고 뭐고. 증발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개의치 않고 짧은 고민 후 대답했다.
“마력에 근원을 둔 존재. 여러 형태로 변이가 가능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로젤린과 그대가 다른 것은 살아 있는 생물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의 차이. 그 때문에 로젤린 경은 완전한 변이가 불가능하다. 그자는 어떤 부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내가 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꼴을 보아하니 칼릭스랑 얘기 좀 했겠구나 싶고, 그놈이 먼저 얘기할 리는 없으니 그쪽에서 어느 정도 가설을 세우고 애를 탈탈 턴 모양인데…….”
맞다. 리카르디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카롱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너는 네가 알고, 모르는 세 명의 사람이 각자 나에 대해 뭘 아느냐 하면, 당신들은 포유류로, 두 발로 걷는 생물이고, 평균 악력은 얼마고, 지능이 높아 먹이사슬의 상단에 위치한…… 따위를 말할 생각인가 봐?”
리카르디스는 잠깐 머뭇거렸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았느냐,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던가? 저 존재들을 아우르는, 그들을 관통하는? 생물학적 정보가 아닌?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지.”
마카롱이 로젤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돌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를 잡으려 할 찰나 마카롱이 얼굴만 살짝 뒤로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별다른 수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시비 걸고 싶었어.”
쓸데없이 솔직했다. 이것도 종족의 특성인가? 어이가 없어진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시비 걸고 싶었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
* * *
황제 라이노가 사냥 대회를 맞이해 연설했다. 다들 바보같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선수들의 출전 준비가 끝났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으로, 그 사이 동물을 가장 많이 잡은 자가 우승하게 된다. 각 동물마다 점수가 있으며, 당연히 잡기 힘든 개체에 더 높은 점수가 붙었다. 이미 산에는 각종 동물을 풀어 둔 상태였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위험한 맹수는 배제해 놓았다.
로젤린은 짙은 흑색 털을 가진 말의 고삐를 쥐고 공터로 나왔다.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선물한, ‘초콜릿’이었다. 로젤린이 초콜릿의 허리를 토닥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다가가며 초콜릿의 목덜미를 슥슥 쓸었다.
“내가 어제 했던 말. 모두 기억하지 로젤린?”
“네. 이기지 말 것.”
리카르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화창하고 따스한 날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해 보였고, 그 태도는 전투태세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생각이 전혀, 조금도, 생각에도, 꿈에도 없는 듯했다.
무투 대회에 이어 사냥 대회까지 석권하면 그녀의 이름이야 드높여지겠지만, 다소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질투라던가. 낯이 화끈해져서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말이지만, 실제로 가능성이 농후했다.
때문에 사냥 대회의 1등은 티 나지 않게 얼음창 기사단에 넘기기로 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치지 말 것.”
“다쳐 오면 감봉할 거야.”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씩씩 분노를 표출했다. 다친 건 난데, 왜 내 월급이 깎여야 해!
“삼 개월 동안.”
물론 농담이었지만 로젤린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삼 개월 동안 감봉이 되었을 시, 칼릭스에게 줄 용돈을 제외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추정하고서는 절망했다. 쥐, 쥐꼬리…… 중얼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몰래 웃었다.
“그러니 다치지 말고.”
“네. 반드시!”
로젤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이렇게 결연한 표정은 본 적도 없었다.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오는 길, 자신을 지킨다 말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볼에 떨어진 속눈썹을 떼어 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웃고 있던 눈이 진지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개가 더 남았지? 기억하나 경?”
“네. 누구도 믿지 말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작고 낮게 속삭였다. 가까이 있는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다.
“그리고 절대로…….”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 말을 미처 내뱉기 전,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전하.”
자주 듣진 않았지만,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특색 있는 목소리라 잊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간제였다. 발타 일행이 도착한 첫날 이후 보지 못했던 발타의 3왕녀가 사냥 대회에 대뜸 나타났다. 그녀는 호위 및 감시 역할을 하는 발타의 전사들을 대동한 채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좀 놀랐다. 발타의 사절단이 처음 도착한 날 이후로 보이지 않기에, 솔직히 죽었거나 어디 한구석 잘못됐을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였다.
“같은 황실 내에 있으면서도 퍽 오랜만인 듯싶습니다.”
간제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로젤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다음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였다. 로젤린의 예상대로, 간제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리카르디스의 볼로 향했다. 로젤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로젤린은 바람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억.”
리카르디스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에게 갑작스레 뒤로 끌려갔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내팽개치고 그가 있던 위치에 자리 잡았다. 간제는 다가오던 힘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로젤린의 볼에 입을 맞추게 되었다. 쪽.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나.”
간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 불쾌할 법도 한데, 간제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연신 싱글거렸다. 로젤린도 고개를 숙여 간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했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손으로 각자의 입을 가렸다.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 것 같은데…….
“발타의 세 번째 딸을 뵙습니다.”
간제는 코앞에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손은 여전히 로젤린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