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38화 (138/220)

138화.

리카르디스에게 비치는 제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 시간을 돌아가, 형태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에 스며들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은 급하게 시선을 그의 발치로 떨구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더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로젤린.”

하,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행동에 로젤린은 눈물이 울컥 나왔다. 그녀를 보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젤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으나 그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로젤린 에스터.”

뭔가 화를 꾹 누르는 목소리였다.

“예…….”

“내가 왜 그대에게, 내가 그런…… 정보들을 알고 있노라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코와 입가에만 제 시선을 두었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도 확인했다. 그녀가 숲속을 훑는 것을 눈치챈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정말.”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닿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허리에 제 두 손을 감았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도망갈 생각 말고 날 봐. 지쳐서 더 이상은 쫓아갈 수 없으니. 말했지, 연약하다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쓰러질 수도 있다.”

뿌리치자면야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로젤린이 가만히 그의 품에 있는 이유는, 리카르디스가 먼저 손을 뻗어 오는 지금의 상황에 크게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모진 말이 나오고, 경악스러운 말이 떨어진다 해도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안도감.

그의 목에서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품이 단단하고 따뜻했다. 몸이 노곤노곤 흐물흐물하게 녹을 만큼이나.

리카르디스는 경직된 몸을 서서히 이완시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알리지 않았던 것은, 불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비밀은 중대했고, 그 중대한 건에 대해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어.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조차 하지 못해. 물론 좋게 흘러갈 수도 있지. 그러나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그대의 치부라면? 그대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리카르디스는 잠시 한숨을 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로젤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상황을…… 최악을 상정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그대를 상처 입히고 휘두르는 일이 될까 봐. 지금처럼.”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줄 몰라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 있어 상대방의 입장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그 행위가, 사납고 따가울 리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로젤린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다. 불안함에 꼬인 실타래는 이미 슬금슬금 풀려, 종국에는 완전히 풀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제가 왜 상처 입지 않기 바라십니까?”

로젤린의 손이 그의 팔에 살포시 닿았다. 이번에는 리카르디스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남자가 씩 웃고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몇 초 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 행복하게.

리카르디스는 도주로를 훑던 그녀의 눈빛, 필사적인 달음박질, 흔들리는 시선에서 그녀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꽝꽝 얼어 있고 꾹꾹 뭉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건만. 자신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로젤린은 쌓아 뒀던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해소한 듯 보였다.

그녀가 가진 불안이 적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말을 크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 한편이 어딘가 아려 왔으나…….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신다고!”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표정으로 로젤린을 보았다. 이 사람, 분명 이성 간의 감정은 배제한, 사람 대 사람의 호감으로 받아들였겠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니깐. 참 경도, 그것도 몰랐나?”

“아닙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뭐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뤄 낸 듯 의기양양하게 히히 웃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래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 * *

“검은색인데, 약간 불투명합니다. 크기는 한 이 정도 됩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겠다. 로젤린은 신나서 예전 ‘그것’일 때의 모습을 설명해 줬다. 바닥에서부터 제 허리까지 둥근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아주 열성적이었다.

“아주 귀여울 것 같군. 그 모습으로는 이제 변하지 못하는 건가?”

“예.”

“아쉬운걸,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 마카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못하지는 않겠지만 안 하겠지.”

리카르디스는 잠시간의 만남으로도, 마카롱의 성격을 많이 파악했다. 적의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다년간 숱하게 느꼈던 살의는 아니었으나, 꼬장꼬장 늙은 귀족들이 그를 바라볼 때의 시선과 비슷하기는 했다. 아니꼬워, 죽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호의적인 감정은 전혀 아니었기에,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마카롱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젤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시무룩한 기색을 띠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소매를 급하게 걷었다. 로젤린의 하얀 손에 힘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헉, 숨을 삼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녀의 피부가 점점 짙어지고 질겨졌다. 가죽이 뒤덮이더니 다시 그 위를 단단한 비닐이 덮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합쳐지며 네 개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아주 멋있군!”

닿는 감촉도 감촉이고, 온도도 서늘해서 더욱 오싹했다.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 느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쉽다는 말에 뭐라도 보여 주자는 갸륵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변이를 마치자마자 손부터 잡고 봤다.

“이야, 이거 참…… 멋있어. 아주…… 뾰족뾰족해.”

여전히 칭찬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로젤린은 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이거 한번 휘두르면 사람 몸도 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은달 놈들의 시체가 다들 그 모양이었던 거군.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검고 거대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손톱. 보다 보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게 아주 멋스러웠다. 집중해서 만지고 있자 로젤린이 신나서 눈 색도 바꿨다가, 동공도 맹수의 것처럼 길게 바꿨다가, 키를 조금 키웠다가, 줄였다가. 얼굴 골격도 조금 바꿔 가며 열심히 자랑했다.

“정말…… 굉장해.”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라, 그 말 이외의 것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로젤린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평소 같으면 얼굴을 붉혔을 자신의 행동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열중해서 만졌다. 역시 이 얼굴이 제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물었다.

“로젤린.”

“예.”

“음…… 그대는, 예전 로젤린 경의 기억을 일부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듯한데, 내 추측이 맞나?”

“예, 시간이 갈수록 로젤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고는 합니다. 전하께서 저에게 막 성질냈던 것도 압니다.”

그, 참. 쓸모없는 것을 떠올리고 그래! 리카르디스는 울컥했다.

“그건, 미안하지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성질을 내지 않았어! 그녀에게 냈었지! 물론, 그것도…… 잘한 것은 아니야. 미안하게 되었어. 아무튼!”

말하다 보니 뭔가 좀 미묘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이 있는 탓일까. 로젤린이 그녀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대 안에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어떻게 되나. 그러니까, 지금의 그대는 음…… 없어지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느릿하게, 또 잠시 말을 멈추기까지 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굉장한 도입부였다.

“로젤린은 밀가루 정도일까…… 생각합니다.”

굉장한 표현력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감탄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로젤린이 케이크의 몇 조각을 차지하고, 제가 그 나머지를 차지하는 식이 아니고, 밀가루에 버터와 우유, 달걀을 더하고 이스트도 넣은 후 오븐에서 구워 내고 생크림을 바르고 제철 과일을 올린 상태가 저입니다. 원료가 그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밀가루가 케이크와 동일한 존재이지는 않으니, 케이크는 케이크, 그저 주된 재료가 밀가루일 뿐입니다. 그런 느낌인데, 아시겠습니까?”

“무시무시한 표현력이었다. 내 기사가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군.”

로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어마어마했다는 듯 뿌듯해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웃었다.

“그러면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그대의 사고는 그대의 것이긴 하나, 그녀의 생각과 기억에 기반한다는 것이겠군.”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을 보고 있으나, 한순간 과거의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지금의 온전한 그대에게 묻건대. 로젤린 경의 마지막은. 그녀의 마지막과 생각은 어떠했나?”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젤린의 마지막?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전하를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가. 끝까지 미련한 사람이었군.”

로젤린은 순간 울컥했다. 미련하다니, ‘로젤린’한테!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보자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후,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야 로젤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대는 지금…… 밀가루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