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37화 (137/220)

137화.

“내 눈을 벗어난 그 짧은 사이 죽으면 어쩌려고.”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나. 그자의 능력이 미지수이긴 하지만, 로젤린 경이 강한 것 또한 사실이니. 마력을 감지하고 그대가 도착하기까지의 몇 분. 그걸 로젤린 경이 감당해 주리라…….”

“믿어?”

“믿는다.”

로젤린은 숨죽인 채 마카롱과 리카르디스의 대화를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

“너는 내게 뭘 바라는 거지? 그자를 만났을 때 내가 뭘 하길 바라? 쫓아내기를? 생포해서 네 앞에 끌고 오기를? 아니면…….”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그자를 죽이기를 바라느냐? 라고 묻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끝이 흐려진 질문 속에는 적의가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 리카르디스는 의아했다.

마카롱은 그자를 모르지 않던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마치 아는 사람이나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듯, 둥글게 감싸고도는 모양새였다.

“로젤린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바라듯이.”

리카르디스의 대답은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어떻게 되든지, 로젤린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맹금류의 따끔한 눈빛이 누그러졌다. 마카롱이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하늘을 메울 듯 거대한 날개였다. 마카롱이 움직이자 바람이 불어왔다.

“손을 빌려주겠어.”

“감사를 표한다.”

“네게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지. 가는 길이 같았을 뿐이니까.”

“가는 길이 같음에 감사한다.”

“그 또한, 가 봐야 알 문제겠지만.”

마카롱이 크게 날갯짓하며 높이 떠올랐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 뒤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카롱은 사라진 후였다. 거대한 날개가 사라진 공백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잠시간 눈에 담다,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자신의 목 뒤가 바짝 굳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혼란스러웠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깊은 추론을 못한다고 해도,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이야기했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 번 죽였던 사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죽었음을 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과거 ‘로젤린’과 완벽한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는 말이었다. 마카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사실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력을 사용하고, 변이가 가능하고, 무엇이건 간에! 들켰다. 들통 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린,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치밀하게 행동했노라 자부했다. 그는 알 도리도 방법도 없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뒷걸음질 쳤다.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만 할 것 같은, 벗어나고 싶은 그런 느낌에 발이 먼저 슬금슬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눈으로 재빠르게 도주 경로를 훑는데, 모르는 게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쫙 피며 만류했다.

“잠깐, 로젤린 경. 로젤린. 나와 얘기 좀 하지.”

그가 애써 웃으며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트렸지만, 로젤린은 덫에 걸린 쥐 같은 표정을 고수하며 여전히 발을 꼼질꼼질 뒤로 옮겼다.

“로젤린!”

사실상 그녀가 마음을 먹는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 눈치 보며 물러서던 로젤린이 기세를 확 바꿔 뒤돌아 도망쳤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러난 숲. 몸을 숨길 곳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니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함하며 그녀를 쫓았다.

지금, 내가, 이, 나이에, 나 잡아 봐라 놀이를, 전심전력으로!

리카르디스는 언제나 암살 위협을 달고 살았던 몸이라 상급 기사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는 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로젤린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체력과 순발력, 운동 능력이 고루고루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 순발력, 운동 능력이 죄 인간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 이가 상대이다 보니, 한계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거친 숲을 내달리는 로젤린은 실로 한 마리의 야생동물 같았다. 이대로는 그녀와 대화는 고사하고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예상 그대로, 잠시 눈을 깜박한 사이 그녀의 인영은 숲에 스며들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관성적으로 달리다가 얼마 후 멈춰 섰다.

‘그래…… 쉬운 여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물리적으로.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 네가 가 봤자 어딜 가겠어. 내 주위 반경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은 그 어디쯤이겠지!

“윽!”

리카르디스는 어디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신음하며 나무에 팔을 걸쳐 기대었다. 그는 헉헉, 숨을 급하게 몰아쉬다 마른기침을 했다. 그리고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며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보아도 심장 어디가 아파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송골송골 배어 나온 땀이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빠르게 사라졌던 만큼, 그보다 더 빠르게.

“전하!”

나무 위에서 로젤린이 훌쩍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잡아 한 바퀴 돌고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이 넋 빼놓고 볼 정도로 멋졌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연기를 계속 펼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후다닥 달려와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짚었다.

“시, 신관을!”

로젤린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잠깐 잊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산책은 잘 다녀왔나, 로젤린 경?”

서슬 퍼런 음색에 로젤린이 화들짝 몸을 떨었다.

“저를 속이신 겁니까?!”

그 아기 고양이 같은 순진한 얼굴로! 로젤린의 얼굴에 배신감이 잔뜩 퍼져 있었다.

“속이긴 누가 속여. 경이 걱정할까 봐 애써 통증을 누르는 중이야.”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성의하게 말했다. 모로 보나 거짓말이었지만 로젤린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고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럭 잡았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얼굴이 가까웠다. 키 차이 때문에 항상 그녀를 내려다봤으나, 지금은 로젤린이 무릎을 꿇은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찌푸려진 눈썹에서 걱정이 아른아른 비쳤다.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이제 와 거짓말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이?”

빤한 개소리에도 로젤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거지? 리카르디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로젤린이 두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후, 그의 가슴 왼쪽에 귀를 대었다.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뭘 확인하는지 물어도 되나?”

“평균 심장박동수를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헤아리는 시간은 시계와 0.5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급한 대로. 말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그런 재주도 있었단 말이지. 하여간 여러모로 대단했다. 보통은 손목에 손을 대고 확인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히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바짝 붙인 로젤린은 집중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 속눈썹이 길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심장이 이상합니다, 전하! 너무 빠르게 뜁니다!”

로젤린이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르디스는 흠칫 놀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던 손을 선회해 급하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그렇겠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겠지. 빠르게 뛰는 중이니까.”

“많이 아프십니까?”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아. 그저 심각하게 연약해서 세심한 주의와 관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할 뿐이다. 외로우면 남몰래 울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날 두고 도망쳐?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고 도망쳐? 내가 숲 어딘가에서 쓰러져서 쓸쓸하게 혼자 죽건 말건 나 몰라라 하면서?”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로젤린이 뾰족한 것으로 찔린 듯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도망가는 중이었다는 사실과 왜 도망을 가려 했는지에 대해 모두 떠올린 기색이었다.

“그…… 전하께서…….”

로젤린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더니 입술을 매만졌다.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그녀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다 안다고 그러시니까, 그러면 제가 로젤린인데 로젤린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단호한 대답에 로젤린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는 깊고 황량한 숲을 떠돌 시절, 자신이 마주쳤던 인간들이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물, 귀신!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다. 코앞에 둔 죽음보다 자신을 두려워했다. 로젤린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지’라고 대답을 내뱉은 입술에서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를 조심스레 살폈다. 침착하게 감정을 가다듬은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나 그것이 도리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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