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36화 (136/220)

136화.

사냥 대회 하루 전. 리카르디스는 대회가 개최되는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간이 천막들이 줄지어 있고, 손님들이 걷기 편하시라 융단까지 깔려 있었다. 산이라기보다는 나무가 많은 정원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내일 대회가 개최되면 갖은 음식이 올라갈 테이블 또한 미리 정리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숲 안에 생겨난 거대한 파티 홀을 감상했다. 사냥 대회를 위해 고용된 용병들과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일원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하루 일찍 미리 도착한 이유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다른 곳.”

산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말 위에 앉아, 길을 안내하는 용병에게 도도하게 명령했다. 몇 번이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좁다, 넓다, 나무가 너무 많다, 사람의 왕래가 잦다 해 가며 퇴짜를 놓기만 열두 번째. 지금으로 열세 번째가 되었음에도 용병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숙여 댈 뿐이었다.

용병단 ‘올가미’는 사냥 대회를 위해 산을 정리하는 역할로 고용된 수많은 용병단 중 하나였다. 황실에서 고용되었다 해도 높으신 분에게 직접 의뢰를 받는 게 아니라, 그 높은 분의 아랫사람의 아랫사람의 하인에게 전달받을 뿐이었는데, 이게 웬걸.

눈앞에는 역대 최고의 신성력을 지닌, 어떤 위험한 전쟁에서도 승리만을 이끄셨다는, 만민을 두루 살피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삼천 명을 실명시킨 전적이 있다는! 그 설원의 월계수, 2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가 계시지 않은가.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발언을 가슴에 꼭꼭 새겼다. 가언으로 삼을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한 의뢰 내용, ‘숲 속’, ‘사냥 대회 당일 날 참가자들이 발길을 하지 않을 만한 곳, 몸을 움직일 만한 공터’, ‘길이 복잡하지 않아 잘 익힐 수 있을 것’의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왜 찾아 달라고 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후, 단장은 고객의 요구에 응하는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리카르디스의 “좋군.” 한 마디에 단장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물리고 로젤린과 장소를 둘러보았다. 따라오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일 꼭 이곳에 와야 해, 로젤린 경. 기억할 수 있겠나?”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나온 장소를 반추했다. 나무, 돌, 지형, 수풀의 모양. 하나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절대 이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

“예. 그런데 왜 벗어나면 안 됩니까?”

“위험한 것이 그대를 쫓고 있다는 소식을 칼릭스 경에게 들었다. 내가 그자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니 말이야. 게다가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있던 그대가 혼자 떨어져 행동하는 만큼, 내일은 그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 테지.”

로젤린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나를 쫓고 있다던 위험한 것. 나도 압니다.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그것’의 정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 그거, 위험하죠. 압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정보를 제한하자니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얼굴조차 모른다고 들었다. 기다리다 보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돌은 불가피하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라, 경.”

“마음의 준비…… 말입니까?”

“이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누구일 줄 알고? 내가 무기라도 빼고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레이몬드면? 칼릭스면? 얌전히 맞아 주고 있을 건가?”

로젤린이 숨을 헉 들이켜며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고 상처받은 듯,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리카르디스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웃었다.

“만약이라는 거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내일 숲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그대와 얼마나 친밀했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건. 절대 믿어서는 안 돼.”

“예…….”

“사건이 일어나리란 걸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황의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지. 그게 장소를 정한 이유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장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지금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도 있다. 경이 사냥 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겠지.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언제 어디서 그대를 노릴지 모르게 되지 않겠나. 일라베니아의 정세는 현재 몹시나 불안하고, 지금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질 가능성이 많아. 위험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악을 피해야 하기에 차악을 선택해야만 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로젤린, 경이지만…… 미끼도 경이다. 위험이 없을 수 없어.”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다. 그래서 안전장치가 필요해.”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이자 리카르디스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 뒤쪽,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마카롱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로젤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카롱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저 멀리에 있는 터라 보이지도 않았고, 마른 나무만 늘어져 있는 이 장소에는 리카르디스, 로젤린, 마카롱밖에 없었다.

“마카롱 경.”

로젤린이 고개를 홱 하니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로젤린을 계속 따라다닌다면 그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황실에 있었던 만큼, 로젤린을 따라다니는 독수리는 저와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로젤린 경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이번 사냥 대회에서 그자의 꼬리라도 잡아야 해. 그러니 로젤린이 혼자 다닌다는 점이 내일의 일에 전제되어야 한다.”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억, 헉.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 말에 담긴 내용보다, 그걸 말하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라 경악스러웠다. 독수리는 미동 없이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애 다 죽어 간 다음에야 건지러 가라고?”

“이번을 놓치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본인이 쫄려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그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겠지?”

“상황은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번 죽였던 사람. 그대 또한 그자의 능력을 모르지 않나. 그대들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자의 능력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한계치까지 올린 것뿐이다.”

로젤린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전하는 왜 마카롱이 말하는데 놀라지 않는 거지? 마카롱은 정체가 들켰는데 왜 저렇게 태연해? 어, 어…….

“로젤린 경.”

“예!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마력을 쓰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는 게 맞나? 그대들끼리도?”

“예, 그렇습니다.”

“청각을 강화한다던가,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에도 마력을 사용해야 하고?”

“……예. 그렇지만 안 써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자도 경의 뒤를 따르며 별다르게 마력을 운용하지는 못하겠군. 그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했다. 물론 내일 반드시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때문에 위험인물이 로젤린을 뒤따른다는 가정 아래 계획은 세워졌다.

로젤린은 내일, 사냥 대회가 시작하면 이곳으로 온다. 동족이라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음에 의문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있으나, 그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리카르디스가 용병단 ‘올가미’에게 한 의뢰는 모두 두 가지였다.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아낼 것’,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이 장소로 오는 길목 길목에 포진해 있을 것.’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뒤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저 사냥 대회의 진행을 위해 산 여기저기 퍼져 있는 용병들 중 하나로 보이게끔 한다.

그 사이에 마카롱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과 얘기해 두었다. 그들과 함께 신입 용병 단원인 척 숲속에서 대기한다. 마카롱은 기다리다, 용병 단원들로부터 누군가가 로젤린을 쫓아갔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인다.

하지만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유명 인사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카롱이 움직이는 때는 마력을 느낀 후여야만 한다. 마력을 사용한 것이 추적자이든 로젤린이든 간에 그만큼 상황은 위험하다는 뜻일 테니.

용병 단원들은 마카롱이 떠나고 이십 분 후. 마카롱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정된 이 장소로 이동한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 상황이고, 마카롱과 로젤린이 합세한 싸움에서 그 시간 동안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상대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얘기였다.

용병 단원들은 강하지 않으나, 인원이 많다. 그에 배가 되는 눈이 있다. 정체 모를 것은 제 목적과 본 모습을 숨기는 상황이고, 일반인들의 눈은 마카롱과 로젤린의 힘보다 그것을 강력하게 제재할 무기가 되리라.

간단히 계획을 설명해 주었더니 로젤린이 연신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마, 마카롱은 그냥 착한 독수리…….”

인간으로 변한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마카롱은 평범한 독수리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따위를 말하고 싶었던 듯 보였다.

“그래그래, 착한 독수리지만, 내일만 잠깐 인간으로 변해 있으면 된다. 그 다음 날부터는 다시 착한 독수리를 하도록 하자.”

리카르디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로젤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읍, 어버버……. 당혹스러워하는 로젤린과 달리 마카롱은 코웃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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