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히이익!”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곧 경비를 맡던 기사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새벽을 틈타 리카르디스의 방 안에 몰래 침입하려 했던 자의 이름은 라헤안시. 신분은 대신관이었다.
“잘 아실 만한 분께서…….”
스타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면이 팔리는 듯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속된 말로 쪽팔렸다. 곧 두 명의 신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면구스러워 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보호자로 호출된 신관들은 저희 대신관님께서…… 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문구와 익숙한 사죄의 표정으로 스타스의 기분을 빠르게 풀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알 것 같았던 터라, 리카르디스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란은 빠르게 종식되었다. 칼을 빼 들고 무섭게 달려온 기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테라스 위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손을 까딱하는 것으로 불청객의 입장을 허락했다.
라헤안시는 로젤린의 안내를 받아 월장석 성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로젤린은 뒤에서 쏟아지는 끈질긴 시선에 흘끗 돌아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눈이 딱 맞았다. 라헤안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로젤린을 보고 있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로젤린 경인고?”
“예.”
라헤안시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은 ‘그’, ‘유명한’ 따위의 수식어가 제 이름과 붙어 있으면 “아닙니다. 헛된 위명이지요.”와 같은 겸손한 반응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겸손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당당한 대답이었던 터라 라헤안시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는 로젤린도 맞고 유명한 것도 맞다.
“새벽부터 미안허이. 몰래 리카르디스 황자 전하만 뵙고 가려고 했는데 일이 어찌 이렇게 커져 버렸누.”
“몰래 벽을 타고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정식으로 방문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음, 매우 정석적이다. 그걸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던 게지. 내가 도리어 깜짝 놀랐지만 말이네. 자네 대체 어디 있었던 겐가? 이 몸이 분명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했었는데.”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풀 밑으로 기어오시더군요.”
라헤안시의 뒤에서 걷고 있던 신관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추한 꼴을 또 보이셨다니…….
로젤린은 라헤안시가 월장석 성의 담을 넘을 때부터 쭉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수풀 밑으로 기어오던 라헤안시가 지렁이를 손으로 눌러 터트리는 모습도. 이후에 비명을 지르려다가 주위를 의식하고 급하게 입을 가렸으나, 안타깝게도 지렁이를 터트린 쪽의 손이라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다.
“상상도 못했느니. 대단히 훌륭한 기사로구나!”
“그렇습니다.”
라헤안시가 껄껄 웃었다. 딱딱하고 정석적인 기사의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가끔씩 묘한 면이 보인다. 재밌는 기사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방 앞이었다. 소란에 깨어난 잇세리온이 퀭한 눈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머리가 눌려 엉망이었다.
로젤린이 잇세리온에게 “머리 모양이 이상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잇세리온은 힘없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쩐지 새 같아 보인다고도 했다. 잇세리온은 알겠으니 제발 들어가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수면 시간이 짧아 화낼 힘도 없는 듯 보였다. 라헤안시는 소동의 주범으로서 제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편한 옷을 입고 탁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쪽 손에 서류를 들고 읽어 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좀 인간미가 있어야지. 방금 일어난 것이 명백한 차림새임에도 얼굴이나 눈이 부어 있는 기색조차 없었다.
콧날은 여전히 우뚝하고 얼굴선은 여전히 날렵하다. 서류를 읽는 눈이 잠에 조금 잠겨 있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해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을 비출 뿐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새벽빛이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떠도는 가운데 남자의 은발이 반짝였다. 참 그림 같은 광경이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이복형의 눈부신 자태를 감상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리카르디스 황자 전…….”
하. 라는 말이 나오기 전 리카르디스가 성질내며 라헤안시에게 서류를 집어 던졌다. 라헤안시는 볼썽사납게 몸을 구기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형!”
“형 같은 소리가 나와 지금? 사람들 다 깨워 놓고 이게 무슨 민폐냐!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
신관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이 새벽부터.”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찾아올 아주 급한 이유가.”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있겠지. 라헤안시.”
라헤안시는 그 살기 넘치는 모습에 잠시 흠칫했다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그러엄!”
“앉아.”
“어! 알았어, 형!”
대답이 재빨랐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의 맞은편에 덥석 앉았다. 두 신관들이 다시 신전으로 돌아간 뒤.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쿠키를 집었다.
“아, 이 맛 그리웠어. 월장석 성 주방장이 솜씨가 좋단 말이지.”
서두가 불길했다. 역시 그냥 놀러 온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뾰족해졌다. 라헤안시가 볼 가득 쿠키를 넣은 채 입을 열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후두두 떨어졌다.
“아, 별일은 아니고.”
이 자식이 진짜? 리카르디스가 울컥하자 라헤안시가 희희덕대며 말을 이었다.
“신관이 살해당했어.”
별일이었다.
“황실 내의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짐승의 소행이라 하더라고. 크게 번질 일은 아니야. 오늘의 보고 끝!”
별일이라면 별일이고 별일이 아니라면 아니었다. 신관이 죽은 일이야 중대사일 수 있지만, 굳이 이 새벽에 월장석 성까지 와서 얘기할 건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고 빤히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뭔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라헤안시가 히죽 웃었다.
“하여간 눈치 빠르다니깐.”
“빨리 말해.”
“아 뭐, 진짜 별거는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이번 사건에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싶어서.”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느릿하게 만지며 그가 말했던 내용을 반추했다. 신관이 죽었다. 황실 안의 숲에서 발견되었다. 짐승의 소행이다. 확실히 미심쩍었다. 어지간하면 대신전 안에서만 생활하는 자가 황실 숲까지 간 것도 이상하고, 그곳에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시체를 봤어. 아주 난도질이 되어 있었는데, 아, 생각하니까 또 속이 울렁거려.”
라헤안시가 입을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신체 일부가 사라진 곳이 없어. 딱히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사냥을 했다? 뭐 영역 침범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도 있지만, 시체가 너무 걸레짝이야.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원한이 가득 찬 살인 사건의 시체 같은 꼴이었다고.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또 무리가 있어. 손톱자국이나 힘이나. 뭐 여러 가지 정황상. 그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는데 시체를 발견한 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짐승의 소행이다! 땅땅. 결론이 났어.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건국의 달에 들어선 이때. 심지어는 발타의 왕자와 왕녀가 일라베니아에 있는 이때.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한 사람의 불행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명성에 금을 가게 할 수도 있었다. 일라베니아가 단순한 대륙의 패왕이 아닌, 신의 영광을 업고 있는 신성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신관이 온전히 칼로 난도질당했다 하더라도, 짐승의 소행이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렇게 공표할 판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범인의 모습이 흐릿하다면, 일라베니아가 내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냥 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헤안시가 차를 후르르릅 소리 내며 마셨다. 저놈. 대신관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예법을 깡그리 잊어 먹은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때를 기가 막히게 맞추지 않았어? 그 짐승인지 인간인지 하는 거 말이야.”
라헤안시가 히죽히죽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들었다. 약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신관이 살해당하는 여러 과정을 그려 보았다. 신관은 으악, 으아악 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죽었다. 한번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진 짐승. 한 번은 검을 들고 살의를 비치는 인간.
그는 두 종의 범인 후보와 지금의 시기를 맞춰 보았다. 라헤안시가 말했듯, 시기가 공교롭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으나 보다 높은 가능성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마치 이 사건이 유야무야 묻힐 것을 알기라도 한, 무언가가 저지른 일이 아닌가 하고.
“뭐 신전 쪽에서 사건을 덮겠다니 내가 더 할 건 없지만. 그냥 알아 두라고. 이 황실 어디 한구석에 위험한 게 있다는 거잖아? 이 아우가 형님이 걱정돼서 새벽부터 달려왔는데 뽀뽀는 해 주지 못할망정 화부터 내다니! 못됐어! 이그, 심술쟁이!”
“나가.”
“죄, 죄송합니다, 형님…… 아침만 먹고 가게 해 주세요……. 신전 밥 더럽게 맛없는 거 다 아시면서…….”
라헤안시는 당장 쫓겨나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먹을거리를 입에 욱여넣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라헤안시가 냠냠 쩝쩝하며 추잡스러운 소리를 냈으나 혼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그가 한 말이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황실 어느 한구석.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는, 닿는 시선을 눈치채고 그와 눈을 맞췄다. 가만 바라보기만 하자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애써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