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운이 좋으시군요, 때를 맞추지 않으면 듣기 힘든 것인데……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가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으시지요.”
두 손을 모은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이 벅찬 마음을 방문자와 공유하고 싶었다.
“미레이미님?”
신관은 당황했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서 차가운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눈썹은 잔뜩 일그러져 있고 입으로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방문자는 공간에 잔류한 소리를 눈으로 좇듯 넓은 공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기 젖은 눈동자에 아름다운 대신전의 풍경이 비쳤다.
“저, 정말.”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화난 아이가 문을 닫듯, 거칠게 짓눌렀다. 그 사이로 나오는 게 피가 아니라 눈물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허둥지둥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름다운 소리네요.”
비틀거리던 마카롱이 하얀 대리석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서 있는 힘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꿈결에서 들은 것만 같은…….”
마카롱은 제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끝없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신관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감격스러워하는 방문자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눈알만 도르륵 굴리던 신관은 얼마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대신전을 방문한 손님이 감동의 여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소녀는 멀어지면서도 마카롱을 흘끗, 흘끗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세로 울고 있을 뿐이었다.
텅 빈 공간이 조용했다. 마카롱은 천천히 일어나 비척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눈가에 덧칠해 놓았던 화장이 짙게 흘러내렸다.
쾅!
새하얀 벽을 강타한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린 손등 위로 뼈가 날카롭게 서며, 핏줄이 불뚝불뚝 올라왔다.
종소리가 이명처럼 들러붙었다. 신전 내부를 가득 채우던 소리는 공간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으나, 마카롱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는 중이었다. 뎅, 뎅, 뎅. 세 번의 종소리가 수없이, 끝없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깨 버리기라도 하는 듯.
사나운 충동이 가득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 꿈에서 도망쳤던 공간에 발을 들이니, 보다 뚜렷한 분노가 막연한 두려움을 짓눌렀다.
속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것들이 치밀어 올랐다. 몸 안의 근육 하나하나가 당장에라도 터질 듯 수축했다. 견고한 벽에 그녀의 손톱이 하나둘 박혔다. 툭, 투둑…… 벽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카롱은 꺾이는 복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린 수습 신관들이 기도 시간에 맞춰 이동하는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관자놀이와 목에 핏줄이 섰다. 눈빛은 흐릿해지며 기이한 안광이 떠올랐다. 하얀 피부는 점점 짙어지며 질겨지며, 두터워졌다. 손이 전부 짐승의 가죽으로 뒤덮였을 무렵에는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거칠게 호흡하는 마카롱의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들과는 판이했다. 자세를 낮추고, 숨과 기척을 죽여야만 사냥의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마수라도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마구 울렸다. 죽여, 죽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 목소리가 익숙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떨쳐 내 보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머릿속, 손끝 발끝까지 가득 들어찬 저주 같은 언어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카롱은 벽에 붙어 기다렸다. 저들의 머리를 잘라 내면 이 고통에서 해방이 될까. 그녀는 제 몸을 벅벅 긁었다. 할퀴는 것에 가까웠다. 목이며 가슴이며 얼굴이며. 가리지 않았다. 피부 아래 그녀의 몸을 활활 태우는 분노가 끝없이 돌아다녔다. 괴로웠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톱에 치맛자락이 걸렸다. 둔탁한 송곳니처럼 생긴 손톱은 천 조각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옷자락 안쪽에 숨겨 놓았던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땡그랑, 땡그랑! 수십 개의 금화가 쏟아졌다. 도박왕 라헤와 큰뿔돼지 장남으로부터 얻어 낸 금화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화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짝 반짝, 벽을 장식하는 빛무리가 찬란하게 공간을 메웠다.
탁.
그때, 금화가 떨어지는 맑고 높은 소리를 뚫고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마카롱은 멍하니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수수한 은색 반지가 떨어져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반지였다.
마카롱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짐승의 것과 흡사했던 손은 어느새 다시 그녀의 외관에 어울리는 생김새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피부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차가웠다. 그 온도가 마카롱을 서서히 식혔다.
“아, 진짜?”
어린 수습 신관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에 마카롱은 화들짝 몸을 떨며 반지를 꽉 쥐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퉁이만 돌면 곧바로 마주칠 것이다. 마카롱은 황급히 발길을 돌려 장소를 벗어났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어린 종의 믿음을 이렇게 보상해 주십니까!”
“인생 역전!”
금화를 발견한 어린아이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실물이지만 한 개 정도는 어떻게 슬쩍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아이들이 웃는다. 그리운 소리였다.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꽉 쥐고 있는 주먹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마카롱은 쫓기는 사람처럼 신전복도를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 지났을 즈음, 어둡던 시야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이 번졌다. 마카롱은 그때야 멈춰섰다. 그녀는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서야 자신이 신전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복도를 달렸던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햇살에 더욱 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신전이…….
마카롱은 나무에 기대어 엉엉 울었다.
흰색의 성들이 하늘 높게 솟아 있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리고는 했던. 새가 지저귀며 영광을 노래하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름다운 이곳.
어두운 숲길을 달려 도망가던 꿈속의 인간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코, 벗어나지 못할. 반드시 만나게 될.
운명이다. 운명이었다.
* * *
로젤린은 오랜만에 침대에 누웠다. 요즘 따라 밤을 새우는 일이 부쩍 버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 피로가 ‘로젤린’의 육체에 서서히 정착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했다. 보다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
로젤린은 제 몸이 침대에 쑥 빨려 든다고 생각했다. 팔다리가 무거운 가운데 침대가 말랑말랑하고 산뜻하게 몸을 받쳐 줬다. 피곤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피로한 때야말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었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시트에서 포근한 볕 냄새가 났다. 로젤린은 곧 잠들었다.
꿈을 꿨다. 불안하게 요동치기도 했고, 목이 메도록 울기도 했는데…….
잠들었던 로젤린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짧았던 꿈은 깨어나는 순간 산화했다.
눈앞에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와 침대에 누워 있는 로젤린의 눈높이가 딱 맞았다.
“마카롱…….”
로젤린은 완전히 잠에 깨지 못해 말을 뭉개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방 안은 어두웠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카롱은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로젤린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불이 목 끝까지 덮이는 걸 느꼈지만 로젤린은 눈을 뜨지 못했다. 피곤했다. 감은 눈 위로 시선이 쏟아졌다. 마카롱이 그녀의 가슴 위를 도닥였다. 손이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짧은 꿈 중 기억나는 게 있다. 추운 곳이었다. 습기가 가득 차고 언제나 추웠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잠에 잔뜩 흐려져 있었다.
“추웠는데…….”
로젤린을 토닥거리던 손이 딱 멈췄다.
“이제 따뜻해.”
로젤린이 히죽 웃었다. 따뜻하다. 아늑하다. 코끝에는 꽃향기가, 시트의 햇살 냄새가. 마카롱의 풀잎 냄새가 난다. 그것들이 둥실둥실, 자신을 좋은 꿈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닿아 있는 손이 잘게 떨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마카롱은 해가 뜰 때까지 한참을, 오랫동안 가만히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16
“끄에엑!”
밖에서 추한 비명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뻑뻑해진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커튼 틈 사이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요즘 잠잠하더라니, 다시 시작인 건가?
리카르디스는 몸을 일으켰다. 영 창의성 없는 작자들이었다. 밤과 새벽 사이. 완벽한 어둠은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하기에, 그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때. 고요함에 조금의 어수선함이 더해지는 시간.
이 푸르스름한 시간을 노린 자들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다니. 끈질기다고 해야 하는지 끈기가 있다고 해야 하는지.
밖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리카르디스는 차분한 손길로 이불을 정돈했다. 무슨 소란이건 간에 로젤린의 선에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암살자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기사였다.
새벽 내내 말라붙은 입안이 깔깔했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마시며 테라스로 향했다. 암살자는 굳이 안 봐도 그만이나, 로젤린에게 그만하고 올라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해야겠다. 자신에게는 이른 아침이지만 아마 로젤린은 간식으로 생각하고 총 네 끼를 챙겨 먹을 것이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좀 미친 사람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커튼을 치고 테라스의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로젤린, 적당히 하고 경비대에 넘겨…….
리카르디스는 기함했다. 로젤린의 아래에 제압되어 있는 저 남자는.
‘저 연분홍색 개털은!’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난간에 몸을 실었다.
“로젤린! 죽이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