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33화 (133/220)

133화.

“어머,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어찌 기사단장님의 일정에 끼어드는 무례를 범하겠어요.”

“마침 일이 끝나 돌아가던 참이었으니, 거절하지 않아도 되오.”

스타스는 허허 웃으며 말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카롱은 제 말이 다 무시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 남자 이런 남자였지. 고양이 미미에게도 기어코 프릴 달린 옷을 입히고야 말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카롱은 스타스의 손을 잡고 발걸이를 구두로 밟았다.

“실례.”

곧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몸이 순식간에 위로 쑥 들렸다. 스타스는 마른 짚단 인형 들 듯이 마카롱을 들어 안장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날랜 몸놀림으로 마카롱의 뒤에 가볍게 안착했다. 마카롱은 포기했다. 그래. 햇살도 좋으니 잘생긴 남자랑 데이트나 하지 뭐.

스타스가 가볍게 발로 신호하자 말이 걷기 시작했다. 마카롱이 와아 소리를 냈다. 손 한번 휘두르면 죽어 버릴 동물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형태로 말을 탄 것은 처음이다 보니 신기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스타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참 천진난만한 아가씨로군.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군.”

“어머, 제가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마카롱은 살짝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

남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카롱은 속으로 깔깔 웃었다.

“……아버지께서 미미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건가……?”

스타스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제 고양이와 똑같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대체 어떤 이상한 부모가 애완동물 내지는 어린아이의 인형 같은 이름을 딸에게 붙였는가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카롱은 호호 웃었다.

“설마요.”

농담이었나?

“어머니께서 지어 주셨죠.”

“음…….”

스타스가 깊게 침음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로 바뀌었지만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그리고 미미는 별명이에요. 본명은 미레이미. 줄여서 미미랍니다.”

“그것 참…… 대단히…….”

이상한걸……. 스타스는 뒷말을 삼켰다.

“대단히 귀엽지요?”

“그건 그렇군……. 대단히 귀여운 이름이지.”

스타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스의 거대한 밤색 말이 투레질했다. 마카롱은 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타스의 가슴에 바싹 붙었다. 스타스가 하하 웃으며 마카롱의 어깨를 도닥였다.

마카롱은 스타스가 자신을 ‘이 나이 대의 아가씨들은 참 풋풋하군.’ 하고 조카를 보는 시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풋풋한 아가씨, 마카롱은 ‘참 귀여운 인간이야. 가슴이 탄탄하군.’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발굽 소리가 이십 분 정도 울렸을 때였을까. 거대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장엄한 하얀색 건물이 빛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의 방패이자, 수족. 권력의 근원이며, 권좌의 역사를 쌓아 온 모든 일의 시작점. 대신전이었다.

스타스는 친절하게도 자질구레한 수속까지 처리해 줬다. 일라베니아 전역에 위치한 평범한 신전과 달리 대신전은 평민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더럽게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찌 되었건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반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데려온 손님이니만큼 대신전의 신관도 그녀를 환영했다.

스타스는 미레이미 양을 잘 안내해 달라고 수습 신관에게 부탁했다. 마카롱은 다시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라고 했으나 스타스는 못 들은 척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급하게 말을 재촉했다. 일이 끝나서 돌아가는 길이라더니 무척 바빠 보였다.

떠나는 스타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카롱은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순수한 하얀색뿐. 공간은 저가 가진 크기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비어 보이고, 서늘했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여자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옆에 있는 수습 신관이 방문자의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흠칫 몸을 떨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려요.”

표정이 무뚝뚝한 것에 비해 예의범절은 훌륭했다. 풀물이 들어 있는 드레스 자락이 신경 쓰였으나, 신관은 앞장서서 안내했다.

마카롱은 신관을 뒤따라 걸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 거대한 기둥. 빼곡하게 새하얀 색으로 채워진 공간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천장에 가까운 곳에 줄지어 있는 석상들이 마카롱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자애롭고 위엄 어린 모습. 독수리로 이 공간에 들어왔다면 이런 감상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닥에 발을 딱 붙여 사는 두 발 동물의 눈높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말 신이라도 올려다보는 듯한 이 압박감이…….

익숙하다.

단순한 기시감이라고 보기에는 선명했다. 마카롱의 눈이 뚜렷하게 너른 공간을 훑었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인간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문득 칼릭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눈썹을 일그러트리던 그의 얼굴. 인간 모습으로 처음이라?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 묻는 듯했다. 마카롱은 피식 웃었다. 물었다면 ‘그렇다’고 기꺼이 대답해 줬을 것이다.

과거에도 종종 인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가 있었으나 그때와 달랐다.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닌, 잠자고 있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 감각을 채우는 듯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적도 없건만.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그 몇 번의 의문 끝에 마카롱은 스스로 답을 찾아내었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인간의 모습이 특별해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노라, 마카롱은 깨달았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인간이었다. 비쩍 곯은 팔다리로 어둑한 풀숲을 달리고 있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여타 동물들과 달리 마카롱은 물질에서 온전히 멀어질 수 있는 몸이었다.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강한 동물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들었다.

꿈속에서의 바싹 마른 팔다리는 생김새와 달리 묵직했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꽉 매어 놓은 듯 무겁고 물속에서 움직이듯 느리고 부자연스러웠다. 흐느적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느다란 기관을 지탱할 만한 최소한의 힘조차 없음이 분명했다. 달리는 도중 몇 번이고 넘어졌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숨쉬기 버거웠다. 목 끝에 단 숨과 피 맛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그 악몽 속에서 마카롱은 하얀색의 거대한 건물을 보았다. 그곳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라베니아 황성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역해진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생김새가 달랐다.

그곳이 어딜까 막연하게 추측만 하던 중, 오늘 도박판에서 어느 남자를 보고 알게 되었다. 들고 있던 전 재산은 물론이고,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자신에게 털린, 개털 같은 연분홍색 머리를 가지고 있던 남자.

제 이름을 도박왕 라헤라고 부르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고위 귀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도박왕 라헤를 따라왔던 두 명의 남자는 연패하는 그가 부끄러웠는지, 양산으로 가리며 도박왕 라헤의 모습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자 했다.

그때 마카롱은 양산에 그려진 어떤 문양을 보게 되었다. 꿈에서 본 건물에 새겨져 있던 것과 같았다.

[도박왕 라헤님.]

[네, 독수리 기사님.]

[뒤에 계신 분들의 양산에…….]

도박왕 라헤는 뒤를 돌아보고 아차 했다. 양산에 떡하니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위아래 양옆, 네 개씩이나.

[아이고 답답하게 이 사람들아, 그걸 고대로 들고 오면 어떻게 하나! 신전에서 나왔다고 차라리 소리를 지르시게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남자 두 명이 싸늘한 눈으로 도박왕 라헤를 바라보았다. 도박왕 라헤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앞에서 난리가 났건 어쨌건. 마카롱은 도박왕 라헤가 내뱉은 말을 되새길 뿐이었다.

신전? 꿈속에서 본 것은 황실의 성이 아니라, 신전이었나.

바로 이곳.

마카롱은 어린 수습 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는 기도실, 이곳에는 이델라브힘의 동상이 있으며…… 소녀가 조잘조잘 얘기하는 내용은 의미 없이 마카롱을 스쳐 지나갔다. 마카롱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신전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수습 신관은 대신전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고 남몰래 웃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놀라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황실의 성보다도 더욱 웅장하게 느껴질 것이다. 신전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성까지 더해진 덕이었으나,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수습 신관은 한층 더 밝은 목소리로 방문자를 안내했다.

뎅-

종이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종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웅장한 소리를 공간에 가득 퍼트렸다. 신전 내부를 울림통으로 삼아 종소리는 노래처럼 흘렀다. 수습 신관은 더욱 뿌듯해졌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부에서 종소리를 듣고 더욱 놀라고는 했다. 밖에서 듣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높은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뚫려 있는 공간을 통해 대신전 내부로 들어오고, 바람 소리와 함께 동그란 공간을 웅웅 울렸다. 천상의 노랫소리가 이러할까 싶다며 다들 말하곤 했다.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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