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사나운 눈초리들이 주위를 배회했다. 칼릭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입 크기의 음식을 집어 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붉은수레바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진흙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가장 끈질긴 눈빛을 보내는 젊은 귀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협곡 백작의 삼남인가 사남인가 하는 자였다. 남자는 일순 움찔했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제 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폈다.
칼릭스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으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납고 집요한 시선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끈기 없기는.’
칼릭스는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잔을 집었다.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유리잔 하나까지 차갑게 해 두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물 자국 하나 없는 표면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이 차가운 온도에 녹아들었다. 칼릭스는 태연하게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월장석 성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의 행사였으니, 당연히 하객의 98%는 2황자 파였다. 중립도 간간이 보였으나 1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은 자신뿐이었다.
“우리 로젤린…….”
옆에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우는 시늉을 했다.
“동생이 친구가 없는 걸 알고 있을까?”
“오늘은 시비 안 걸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짙은 갈색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린 마카롱이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이건 시비가 아니라 진실인걸……?”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나오는 한숨을 와인과 함께 넘겼다.
오늘 아침, 칼릭스는 결혼식에 갈 준비로 분주했다. 레이몬드로부터 받은 초대장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아, 그냥 의례적으로 보낸 거겠거니 하며 건조하게 초대장을 무시하고 있을, 한때는 내 수습 기사였던 로젤린의 동생, 칼릭스 경에게 진심을 담아 초대합니다.』
라는 구구절절한 장문으로 수신인란이 꽉 차 있었다. 때마침 마카롱이 맞은편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터라, 청첩장의 내용을 읽어 줬더니 덜컥 자신도 가겠다는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싫습니다.]
라고 했지만 물론 통할 리 없었다.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시비 걸지 말기, 존댓말 하기 등. 여러 가지를 약속하고 데리고 왔으나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상황이었다. 차라리 쥐나 독수리 모습이면 편할 텐데 그마저도 싫단다. 요즘 마카롱이 빈번하게 인간 모습으로 출몰하는 것과 같은 이유인가 추측만 했다.
왜 요즘따라 인간형으로 많이 다니십니까? 칼릭스의 물음에, 마카롱은 글쎄, 하고는 이상하게 웃었다. 눈썹은 찌푸려져 있고 입꼬리만 올라가 있어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인간 같은 표정이었다.
회상은 짧았다. 칼릭스는 잔 밑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마저 삼켰다. 마카롱이 자신의 둥그런 뺨에 가느다란 손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 동생이 친구가 없는 헛헛한 마음을 술로 채우는 것을 로젤린은 알고 있을까……?”
짜증난다. 칼릭스가 부루퉁한 얼굴을 하니 주위의 시선이 한층 나빠졌다. 저, 저. 이 경삿날에 저 표정 좀 보라지! 소곤거리는 소리가 주위의 소음에 묻히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누구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아까 칼릭스가 살짝 웃었을 때는 “웃어?” 하고 정색했던 사람이었다. 뭐 대체 어쩌라는 건지.
가끔은 되지도 않는 수작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깨를 부딪친다든가, 와인을 뿌린다든가 하는 식의 상투적인 괴롭힘들. 하지만 대부분 시도에만 그쳤다.
칼릭스에게 다가오던 많은 남자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 굵직굵직한 선을 가진 붉은수레바퀴 백작보다야 날렵하지만, 그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탓이었다.
태평한 한낮의 결혼식을 노을 지는 전쟁터로 만드는 사나운 눈매였다. 꽉 다물린 입술과 서늘한 표정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칼릭스는 제 외모의 효용성을 잘 알기에, 숱한 적의 속에서도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호오…….’
마카롱이 속으로 감탄했다. 그 로젤린의 동생인 데다가 제 누이를 대하는 태도가 흐물흐물해서 맹탕인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딱딱하다. 마카롱은 음식을 집어 먹고는 손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았다. 칼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을 닦았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목소리가 다급했다. 사고 치려는 로젤린을 만류하는 목소리였다. 이 자식이 날 뭐로 보고. 마카롱은 조금 울컥했다.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인간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칼릭스는 곧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뭐.”
“이거 들고 가세요.”
칼릭스가 제 손에서 주섬주섬 반지를 빼냈다. 붉은수레바퀴의 가문이 새겨져 있는 반지였다.
“이거 중요한 거잖아. 후계자 반지 아냐?”
“혹시 사고를 치거나, 사람을 치면 이것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오, 다 처리해 줄 거야?”
“대신 뭐든 치기 전에 이걸 보고 좀 참으세요.”
“그게 본론이겠구만.”
“노력이 가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마카롱이 피식 웃고 칼릭스의 손에서 반지를 받아들였다. 귀여운 맛이 있는 놈이었다.
“누가 괴롭히면 울면서 이 누나를 찾아와라. 놈을 반으로 갈라 주지.”
“…가세요…….”
“가로로도 가능하고 세로도 가능하다.”
“아, 좀 가시라고.”
이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의 발을 세게 밟았다. 칼릭스는 잠시 무릎을 꿇은 채 발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마카롱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 * *
마카롱은 길에서 벗어나 풀숲을 통해 이동했다. 독수리의 모습으로 황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봤기에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이 마카롱이 입은 드레스를 붙잡았다. 마카롱은 거친 손놀림으로 옷자락을 잡아챘다. 밑단의 레이스가 투둑 뜯겨 나갔다. 몇 걸음도 못가서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마카롱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 모습으로 있는 이상 감내해야 하는 문제였다.
땋아 올린 머리는 풀린 지 오래고, 드레스 밑자락에는 풀물이 들었다. 칼릭스가 보면 한소리 할 몰골이었다.
마카롱은 풀숲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대로 계속 갔다가는 신전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지꼴이 되어 있으리라. 얼마 걷다 보니 정돈된 거리가 보였다. 마카롱은 무성하게 자란 잎사귀들을 헤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길에 발을 디뎠다.
“…….”
그러고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침 말을 타고 가던 남자와.
타는 듯한 붉은 머리. 관록이 느껴지는 흉터를 손 여기저기 달고 있으나 결코 흉악해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
고양이 미미의 호감을 한 몸에 받는 미중년.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 스타스였다.
그는 레이몬드의 결혼식에 짧게 얼굴을 비춘 후,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급한 일은 있으나, 그렇다고 그게 이런 수상한 여자를 무시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스타스가 풀숲에서 막 튀어나온 초췌한 꼴의 여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카롱은 어색하게 웃었다. 스타스의 눈썹이 눈과 가까이 붙었다. 완전 의심하고 있었다.
젠장, 고양이 미미라면 서류를 찢어도 애교 한 번으로 넘길 수 있을 텐데. 기사단장 스타스는 인간들에게는 가차 없는 자였다. 마카롱은 어정쩡하게 풀숲에 걸쳐 두었던 한쪽 다리를 마저 넘어오게 했다.
그녀가 태연한 손놀림으로 드레스와 머리에 붙은 풀잎을 제거하는 중에도 스타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상당히 집요하다. 고양이 미미한테 뽀뽀해 달라고 끈덕지게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마카롱은 생글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님이시지요? 아까 결혼식에서 멀리서나마 뵈었답니다.”
“레이몬드 경의 결혼식에 참석하셨소?”
무게 잡아 봤자 고양이 미미의 집사일 뿐. 마카롱은 속으로 흥, 코웃음 쳤다.
“어머, 실례했어요. 부족하지만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님께서 파트너 자리를 내어 주셨답니다.”
“……칼릭스 경과는?”
“붉은수레바퀴의 저택에서 칼릭스 도련님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하녀라는 얘기였다. 파트너로 하녀를 대동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워낙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다 보니, 아주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보지는 못했지만,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여자 파트너와 같이 결혼식에 왔다는 얘기는 건너 들었다. 스타스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마카롱이 잽싸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가 혹여 실례 하거든, 이것을 보여 드리라고 칼릭스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반지였다. 직계 가족들만 지닐 자격이 있는 물건이라,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총애받는 하녀인지도 몰랐다.
“나이가 드니 의심만 느는군. 미안하게 되었소.”
“아니에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풀숲을…….”
마카롱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황성은 처음이라, 대신전에 가 보려 했습니다만, 워낙 넓은 터라 길을 잘 몰라…….”
스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델라브힘의 열렬한 신자인가…….’
마카롱은 스타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거 되게 꼬치꼬치 캐묻네…… 이제 의심이 풀렸으면 가 봐라, 예쁜이.
“그랬군.”
“그랬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길을 모르지 않소. 데려다드리리다.”
마카롱은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