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30화 (130/220)

130화.

“클로에 영애, 그대 또한.”

“무운을 빕니다.”

피곤해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동시에 초콜릿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당분에 목말라 하는 모습이었다. 큰뿔산양가의 하녀장이 급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영애, 준비를 서두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 저도 모르게 그만. 입고 있는 게 웨딩드레스인지 수의인지도 분간 못 할 만큼 정신없어서 말이에요.”

클로에의 농담에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하녀장만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함했다.

“영애! 그런 무서운 농담을 하시다니!”

하녀장의 무서운 눈빛에 남자들이 분주히 얼굴 근육을 단속했다. 웃겼는데. 확실히 신부 입에서 수의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나? 웃겼는데.

그들은 날카로운 눈살에 못 이겨 모두 응접실을 나갔다. 하녀장은 거울 앞의 클로에를 부지런히 단장했다. 클로에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신경 쓸 일이 끊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여자가 피곤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똑똑. 열려 있음에도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예의 있는 방문자를 확인했다.

“클로에 양.”

“로젤린 경.”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로젤린의 손에는 하얗고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잡초와 형, 동생 하는 정도의 취급을 받는 꽃이었다.

리쉬. 클로에가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로젤린의 소문을 수집하고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녀가 동생 칼릭스와 같이 꿀을 쪽쪽 빨고 다녔던 그 꽃. 반가움에 손이 먼저 나갔다.

“리쉬네요. 고마워요.”

로젤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습니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었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줄기 하나하나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하얀 레이스로 감싸긴 했으나 어정쩡하고 리본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꽃집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지?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어, 어이구우! 이렇게 귀한걸!”

클로에가 급하게 꽃다발을 쓰다듬자, 로젤린이 뿌듯해했다. 로젤린은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을 설명했다. 레이스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드레스에서 뜯었다. 리본은 저번에 레이몬드가 준 마카롱 포장지에 있던 건데 예쁘다. 리쉬 꽃은 월장석 성 정원에서 잘라 왔다. 정원사 아저씨한테 혼났지만 제일 활짝 핀 걸로 골랐다. 리본 묶는 건 헤사가 가르쳐 줬다. 로젤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했다.

이 작은 꽃다발에 그렇게 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클로에는 그녀의 말을 깊게 집중해서 들었다. 황금정원, 하카브, 1황자, 발타 어쩌고를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탓에 클로에의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굉장히 반짝반짝하고 예쁩니다.”

“어머, 그래요?”

클로에가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웃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은색 눈동자를 더 깊게 들여다봤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내가 기분이 좋았던가? 클로에는 잠시 생각했다. 우중충한 남자들과 골머리 썩는 말들을 했을 때만 해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쁠 것도 없었지만.

클로에는 리쉬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약한 향기가 풋풋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집무실이었던 공간이 신부 대기실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을 하는 날이었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그런가요? 라는 말 대신.

“그래요. 좋은 날이라.”

그렇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날이라서. 그 말에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 * *

이델라브힘께서는 그 빛 아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사랑은 깨지기도, 변하기도 하지만 결혼은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위대한 이델라브힘께서 두 사람의 언약을 가호하시니, 사랑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맹세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작위, 나이 따위로 분류되어. 이름이 상하 관계로 쓰이는 삭막한 관계는 더 이상 그만.

[신부] [신랑]

함께 발맞춰 걸어가겠다는 여러분의 다짐과 함께, 부부의 이름은 왼쪽, 오른쪽. 사이좋게, 나란히 놓이게 됩니다. 결혼하세요.

결혼은 인생의 중대한 행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를 되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부와 신랑은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기 전, 하얀색의 예복을 먼저 입습니다. 호수에 해가 가장 빛나게 떠오를 때, 신부와 신랑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이델라브힘의 축복 아래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호수라고? 깊지 않으냐고요? 물론 깊습니다. 아니, 깊다니! 그럼 안 위험하냐고요? 당연히 위험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수영을 필수적으로 익히게 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야 수영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유추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 큰 여러분은 다 알 수 있을 테죠. 결혼식을 장례식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물에 빠지는 사고가 빈번했습니다. 죽는 사고도 가끔 발생하고요. 물론 익사뿐만 아니라, 마수가 결혼식에 난입한 사고까지 종합한 결과입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배제하고자 최근에는 인공 호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래도 배우자가 될 분이 자연 호수를 고집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영은 배워 두는 편이 좋겠군요.

신부와 신랑이 헤엄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가정을 하고 다시 결혼식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호숫가의 얕은 부분도 좋고, 깊은 중앙도 좋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비출 때, 두 사람은 맹세합니다. 주고받아야 하는 언약문은 그다지 짧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편도 아니니, 꼭 외워 두도록 합시다.

신의 이름 아래 하는 언약은 결혼식의 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언약문은 무려 일라베니아의 역사와 함께한 글귀라고 합니다. 몇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 온 언약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광의 일라베니아! 축복의 이델라브힘!

신관이 두 사람의 언약을 이델라브힘께 전달하면,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됩니다. 호수를 둘러싼 많은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축복하고 있을 겁니다. 신부는 젖은 예복을 벗고 웨딩드레스로, 신랑은 정장으로 갈아입으세요. 이제부터는 인간들의 축제이니! 서류에 대충 사인하고 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물론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해서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기려 하는 분도 있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 * *

“이 약 파는 것 같은 책자는 뭐지?”

리카르디스는 총 세 장으로 구성된 작은 책자를 뒤적였다.

“최근 인공 호수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주도하는 어떤 상단의…… 상단주가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에 양이 결혼 준비하면서 받은 것인데 심심할 때 보면 아주 재밌다네요. 참고로 상단주는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는군요.”

리카르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겨 맹세를 갈라 버리자는 내용이 더욱 와닿는군.”

월장석 성 내에 있는 호숫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큰뿔산양, 푸른등불, 바다협곡, 고래무덤, 가을안개. 여러 가문과 더불어 몇몇 황족들까지. 상단을 이끄는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몬드가 워낙 발이 넓은 덕이었다. 친분이 있는 몇몇만 초대했음에도 월장석 성의 후원이 가득 찼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사람들, 그 한구석에 이질적인 분위기의 무리가 있었다.

우중충한 남자들이 한 테이블을 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카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파르딕트와 큰뿔산양 후작가의 후계자 아렌트, 몇몇 익숙한 고위 귀족들이 보였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갈색 머리의 낯선 여자였다. 그녀가 패를 펼치자마자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시시덕거리며 금화를 쓸어 모았다. 누가 봐도 도박판이 아닌가.

돈이 다 떨어졌는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남자에게 가려져 있던, 그 누구보다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인 4황자이자 현 대신관 라헤안시를 발견했다.

“왔다! 왔어! 으헤헤!”

아주 집안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었다.

“다 받고, 칩 몽땅 들어갑니다! 쫄리면 패 덮으시든가, 으헤헤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던 라헤안시는, 정확히 십 초 뒤에, 아까 전의 여자에게 모든 돈을 내어 줘야만 했다. 라헤안시가 훌쩍훌쩍 울자 따라온 신관들이 양산을 펼쳐서 그를 가리고자 노력했다. 대신관이라는 인간이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꼴이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산에 신전 표식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어 그들의 노력은 도루묵이 되었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금화들이 전부 그녀 앞에 쌓였다.

그녀가 다시 미친 듯이 판돈을 올렸다. 좋은 패를 잡았구나 싶어 모두들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그 판을 먹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녀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여자가 떠난 도박판. 라헤안시가 그녀의 패를 뒤집어 봤다.

“투, 투 페어?”

고작 투 페어로 올 인을 한다고? 무시무시한 블러핑의 대가였다. 모두들 떠난 그녀의 자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상이 형성된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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