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9화 (129/220)

129화.

이후, 로젤린이 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헤사는…….

[발타의 하카브 왕자 전하께서 저를 오래 붙잡고 있으셔서, 태웠습니다. 전부 왕자 전하 때문입니다.]

하고 사실에 기반하여 죄를 떠맡겼다. 로젤린은 분노하며 하카브에 대한 적의를 한층 더 불살랐다.

헤사의 실수는 하카브와 로젤린, 리카르디스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받은 르원, 잇세리온. 몇몇의 주요 인물들만 알고 있었다. 얘기가 퍼졌다고 가정했을 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사를 수습 기사로 계속 둘 생각이면 함구하는 것이 좋다며 리카르디스가 조언한 결과였다. 헤사는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무게를 이용해서 힘을 더하는 건 좋았지만, 동작이 너무 큽니다.”

“네.”

“공격이 빗나가도 바로 발차기를 하는 건 좋았습니다. 보통 아래에서 발차기가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하니까요.”

헤사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오늘의 간식에 대해 얘기하던 헤사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꿨다. 로젤린의 저 뒤에서 거대한 꽃다발을 끌어안고 달려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로젤린 경.”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헤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지긋지긋한 인간 같으니…….’

소년은 ‘상급 기사’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로젤린을 찾아올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다른 기사의 일정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 정도로 할 일이 없지 않다는 얘기였다.

“네스터 경.”

네스터는 아까의 헤사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대련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대단하십니다. 이 수습생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겠군요.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되다니, 참 운 좋은 녀석입니다. 부러워…….”

이 사람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있잖아. 네스터가 하하 웃으며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머리를 짓누를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스터 경?”

“아, 그렇지.”

남자의 볼에 다시 홍조가 돌았다. 꼴 보기 싫었다. 헤사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 이걸. 로젤린 경.”

네스터가 보석과 레이스,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금 저걸 꽃집에서부터 훈련장까지 들고 왔단 말이지. 좀 웃겼겠는걸. 헤사가 속으로 냉소했다.

“건국제 무도회에 가실 때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있습니다.”

헤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네스터가 소년에게 눈을 부라렸다.

“로젤린 경께서는 파트너가 있습니다, 네스터 경. 안타깝게도 기회는 다음. 콜록콜록…….”

생을 기약해 보심이. 뒷말은 억지로 내뱉은 기침 소리와 섞였으나 네스터는 분위기상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네스터가 뭐라 말하기 전, 헤사는 그가 로젤린에게 내밀고 있던 꽃다발을 채 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라, 마치 네스터가 헤사에게 꽃다발을 바치고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네스터는 제 빈손을 쳐다보며 이 어이없는 기분을 소년에게 피력하고자 했다. 헤사가 그의 눈빛을 읽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네스터 경. 하지만 로젤린 경께서는 곧 호위 임무로 본성에 가셔야 하니, 제가 대신 잘 가져다 놓겠습니다.”

로젤린 경의 방이 아닌 어딘가에. 네스터는 이 들리지 않는 뒷말도 읽어 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쥐방울만한 게…….

로젤린은 헤사가 언급한 제 파트너가 누구인지 열심히 유추하는 중이었다. 딱히 들은 기억은 없지만, 헤사가 있다고 했으니 있는 것이리라.

네스터는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파트너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 리 없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헤사는 방긋 웃는 얼굴 뒤로 당황스러워했다. 침묵이 길어질 즈음, 헤사는 저 멀리 걸어오는 빛나는 남자를 목격했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헤사의 뇌리에 한줄기 섬광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전하입니다!”

소년이 소리쳤다.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던 전하,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다. 헤사가 확정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전하께서 로젤린 경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가실 겁니다!”

“바로 그거야!”

리카르디스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헤사의 말을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좀 얼떨떨해했다. 헤사도 당황스러운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네스터는 한 남자와 한 소년의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뭐가 좀 이상한데……?

리카르디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경례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가벼운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는 마치 전력으로 달려오기라도 한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땀이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는 건국의 달을 맞이해 한층 더 화려해진 상태였다. 아름다운 예복, 귀걸이, 목걸이, 반지. 갖은 장신구와 더불어 본래 가지고 있던 잘난 얼굴까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햇살이 비친 땀 구슬이 영롱했다. 내리깐 눈동자를 덮은 속눈썹이 다이아몬드의 균열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건조한 입술을 혀가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붉은 입안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헤사는 제 나이에 이런 장면을 보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상급 기사인 로젤린은 훌륭한 23살로서 똑바로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잘게 떨고 있는 상태였다. 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허용치를 넘어 버린 게 아닐까. 헤사가 막연하게 추측해 보았다.

어느 정도 그 가설이 맞는 것 같긴 했다.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파르딕트에게 배운 ‘최고’라는 표현이었다.

“오늘따라 더욱더 눈이 부십니다, 전하!”

로젤린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격정적인 표현이었다. 마치 세기의 미술 작품이라도 보는 듯한 희열이 서려 있으니, 리카르디스도 머쓱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유혹을 흩뿌리고 있긴 했으나, 제 외모에 관해 아주 무지하진 않았다.

기분이 미묘했다. 그 목석 같던 자에게서 저런 반응을 이끌어 낼 정도라니. 요즘따라 부쩍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긴 하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마음이 복잡했다.

“제가 전하와 무도회에 갑니까?”

로젤린의 물음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곧은 시선에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으나,

“듣지 못했나, 그대? 클로에가 전해 줬다고 들었다만.”

굉장히 매끄러운 연기를 펼쳤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하며 헤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헤사가 남몰래 웃었다. 은혜 갚을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었다.

* * *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는 월장석 성이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사람들로 한층 더 복잡해졌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 그 외에도 수많은 가문이 참석해 성이 북적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경사스러운 날인 만큼 모두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은 아주 좋은 날이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미치는 것 같으니, 두 사람이 아주 오래오래 잘 살지 않겠느냐. 가벼운 다과와 함께 시작된 의례적인 대화들은 곧 미묘하게 흘러갔다. 만나기에 힘들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 오랜만이오. 건국의 달에는 처음인가. 건국의 달이라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번에 하카브 왕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제가 무겁게 변했다. 예복을 입은 신부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왕자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움직임이 제한되는구만. 엘피디오 전하와는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합디다.”

“굳이 따지자면 엘피디오 전하께서 하카브 왕자가 있는 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죠. 하카브는 그다지 그들의 동맹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아요.”

방 안에 모여 있는 중년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카브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1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한다든가, 여기저기 다니며 분탕질을 친다든가 하는 행위가 일절 없었다는 얘기였다. 굵직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긴 했으나 건국제에 참석한 타국의 귀족들이 으레 보이곤 하는 행보와 다름없었다.

적지에 발을 들일 정도의 거대한 음모나 목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강한 마인, 로젤린에게 한번 접근하려 했다지마는, 그 이후로는 접촉하려는 시도도 없다고 하지 않나. 또한 그들로서는 일국의 후계자가 단순히 로젤린만을 위해 갖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가정을 도무지 떠올려 낼 수 없었기에 의문은 계속해 커져 가는 중이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것일까.

물론,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하카브가 정말 로젤린 한 명만을 위해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표면적으로 발타가 마력을 귀하게 다루는 나라이긴 했으나, 마력은 단순히 강한 무기의 역할만을 맡고 있지는 않았다. 축복의 밤. 죽어 가는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씨앗을 키워 꽃을 피워 내는 강력한 힘의 한 축이 아니던가. 만약 비밀을 알고 있다면 로젤린을 단순한 ‘강한 마인 한 명’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라베니아 고위 인사의 암살 같은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크게 눈에 띄는 구석이 없다 할지라도. 클로에가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였다.

“감시의 눈이 줄어드는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카브 왕자 쪽으로 빠진 호위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요.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당분간 수고를 더 해 줘야 할 것 같네요. 부탁드려요, 나단 경.”

나단은 퀭한 눈으로 초콜릿을 섭취했다. 당이 부족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모두 무운을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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