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8화 (128/220)

128화.

“오, 이럴 수가.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자. 주워 준 기사가 누구입니까?”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입니다.”

“레이몬드라면…….”

“저번 방문 때 왕자와 첫 번째로 인사를 나눈 자입니다.”

아, 그 남자. 발타식 인사를 나눌 때 입을 꼴 보기 싫게 쭉 내밀며 제 볼에 침질한 남자였다. 로젤린에게 준 목걸이를 다른 사람이 어딘가에서 주웠을 리 없었으나, 뭐라 추궁할 수도 없었다. 하카브는 가볍게 코로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감정을 정리했다. 아쉽긴 해도 로젤린이 그렇게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쪽도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한두 번 차인 정도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기는 하지만, 청혼하며 줬던 물건을 부숴서 다른 남자의 손에 들려 보내다니. 아주 약간 상처받기는 했다. 하카브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때마침…….”

그는 말을 꺼내며 소매를 뒤적였다. 그의 손에 푸른색의 싸구려 펜던트가 딸려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한층 싸늘하게 굳었다.

“저 또한 ‘레이몬드’ 경의 분실물을 가지고 있었군요. 돌려줄 때를 찾아 다행입니다. 레이몬드 경에게 제 말과 함께 전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중요한 물건을 되찾아 주어 고맙다. 보답하고 싶으니 언제고 찾아와 달라고요.”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 펜던트를 꼭 쥐여 주며 가까이에서 눈을 맞췄다.

“부디.”

클로에는 주인이 없는 집무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성의 주인이 귀환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 발소리가 누구에게 쫓기는 듯, 혹은 무언가를 쫓아가는 듯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쾅!

문이 열렸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라고슈 최북단의 공기가 저렇게도 냉혹할까. 시종 대신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문을 먼저 열려고 하던 시종이 무안한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성난 기색으로 단추 세 개를 쭉 풀었다. 열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리카르디스의 행동에서 분을 삭이려는 노력이 비쳤다. 하지만 곧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다시 씩씩.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뒤따라 들어온 잇세리온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맴돌았다. 리카르디스는 한쪽 손은 허리에 얹고,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오 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잇세리온.”

“예, 전하.”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제발 하카브도 지금 나만큼 열 받았을 거라 말해라.”

잇세리온은 여유작작한 미소를 띠고 있던 하카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잡기를 집어 던지지 않는 것이 용해 보이는 리카르디스보다 훨씬 평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에 발을 들여 로젤린 경에게 접근했으나, 그 야망이 코앞에서 부서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난 채로, 현재 로젤린 경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에게 그 부서진 야망을 건네받은 하카브가! 훨씬 더 상심하고 속이 쓰라린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부서진 목걸이를 건네는 전하의 미소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저라면 얄미워서 아주 바닥을 굴렀을 겁니다!”

잇세리온이 필사적으로 항변하자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후우……. 숨결 하나하나에도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좋아, 그럭저럭 기분이…….”

돌연 기세를 바꾼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낚아채듯 잡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부드러운 섬유가 그런 파괴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 줄이야. 클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잇세리온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디스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벽에다 던진 그의 인내심이 대단할 뿐이었다.

클로에는 분노에 제 몸을 맡기고 활활 불타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가만히 지켜보며 홍차를 저었다. 우유가 섞여 금세 탁해졌다. 각설탕을 네 개 넣을 무렵에는 리카르디스도 간신히 무언가를 집어던지지 않게 되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그래, 무슨 일이지 클로에?”

다리를 꼬며 소파에 기대는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야성미가 넘쳤다. 클로에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하카브 암살 건에 발을 들인 귀족 목록을 알아 오라고 하셨잖아요, 전하.”

“그래, 그 쓸모없는 인간들. 가만히나 있던가,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작자들. 뭘 하나 해도 그런 식이겠지. 불쌍한 인생들이로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외딴곳에 홀로 쓸쓸하게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평소보다 더 독기 어린 비난이었다.

“그거 말고도 좋은 소식을 들고 왔으니 그만 화 푸세요.”

“좋은 소식이라. 그대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건 좀 기대되는군.”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클로에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유순한 인상으로도 음흉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싸했다.

“하지 마.”

리카르디스의 말에도 클로에는 예의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완성되었는데, 세상에. 정말 너무너무…… 너어무 예뻐요.”

리카르디스의 손이 움찔했다. 클로에가 그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파트너가 없는 것 같던데…… 로젤린 경에게.”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하지그래.”

클로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전부 말했는걸요? 좋은 소식.”

싱긋 웃은 클로에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방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다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아차.”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초조하게 만지다가 그녀의 뒷말에 몸을 떨었다. 홍차가 흘러넘쳤다. 클로에와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딱 부딪쳤다.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공교롭게도 하얀색이었던 것 같기도…….”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들었다. 귓가가 절로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건국일을 맞이한 무도회에 하얀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족, 또한 황족의 파트너뿐이었다. 애초 그녀의 드레스를 제작할 때 황족의 파트너가 되리란 사실을 감안했다는 것이었다.

“그만 괴롭히고 나가 봐.”

“네에, 아 맞다. 네스터 경도 파트너가 없다지요? 로젤린 경의 일정을 물은 뒤 꽃집에 갔다던데요? 어쩜, 낭만적이기도 해라.”

“젠장,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리카르디스가 빠르게 클로에를 지나쳤다.

“네스터 경은 꽃다발을 들고 가는데 전하는 그냥 가세요? 빈손으로?”

클로에의 말에 그가 급하게 멈춰서 거울 속 모습을 한번 확인했다.

“괜찮다. 나는 얼굴이 있으니.”

“네에?”

그는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웃었다.

“귀엽기도 하시지.”

잇세리온이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황급히 리카르디스를 따라 나갔다.

* * *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잠시 제 목적을 잃고 자리에 서 있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그러하듯, 똑같이.

헤사가 달리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나무를 밟고 올랐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두세 걸음 만에 사람의 키보다 높이 올라간 소년이 나무에 쿵, 발을 굴렀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를 디딤돌 삼은 것이라,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몸에 추를 달고 있는 듯 묵직한 공격과 함께였다. 자그마한 인영이 회전하며 공중에 날카롭게 검을 그었다.

로젤린은 발을 살짝 움직여 반걸음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 냈다. 소년의 목검이 공중을 가르고 바닥에 박혔다. 헤사는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리고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허리와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 어깨와 팔로 몸을 튕겨 내었다. 로젤린을 향한 발차기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턱, 로젤린이 매서운 발차기를 손으로 막아 냈다. 소년이 공중제비로 폴짝폴짝 물러났다. 구경꾼들은 감탄하는 소리를 차마 막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네스터도 본 목적을 잊고 손뼉을 쳤다.

사람들의 소리에 헤사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구경꾼들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헤사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매일 로젤린의 머리카락으로 공예를 하는 솜씨는 다 어딘가에 버리고 온 듯이.

로젤린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다가온 헤사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바람이 불며 소년의 머리를 더욱 흐트러트렸다. 헤사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머리카락과 로젤린의 손길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헤사, 좋은 아침입니다.]

하카브에게 이용당했던 이틀 뒤의 아침. 로젤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네며 헤사를 맞이했다. 헤사는 문가에 가만히 서 있다 눈물을 흘렸다. 주적이자 타국의 왕족의 말에 혹해서 제 직속상관을 속이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소년은 어떤 벌도 받지 않았다. 로젤린은 물론이고 일라베니아 2황자이자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인 리카르디스에게도.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언제나 소년에게 이뤄졌던 공식이 파괴되자 남은 것은 혼란뿐이었다. 로젤린이 더 이상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은 둘째 치고서, 버림받을지 말지의 기로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로젤린은 흔들렸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내고서 무뚝뚝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헤사가 눈물만 뚝뚝 흘리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벅벅, 마치 창문을 닦아 내는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지만 그게 너무나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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