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7화 (127/220)

127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야간 경비를 맡았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와 왕녀 간제가 머무는 성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놈이 뭐가 예쁘다고 밤을 새워 경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직접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항의했다가 혼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데, 확실히 그건 두 사람이 책임지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경비하겠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손에 쿠키를 쥐여 주고 내보냈다. 두 명은 기사단장실을 나오며 묘한 표정을 했다.

“…….”

“……지금 우리를 로젤린 경 취급하신 것 같은데?”

요즘 다들 간식을 가지고 다니더라니, 묘하게 신경 쓰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이것을 칭찬 간식이라 명명했다. 어쨌거나, 기껏 받았으니 맛있게 먹는 게 도리였다.

레티시아는 마카다미아 쿠키였고 에버하르트는 치즈 블럭이 박힌 쿠키였다. 반반 나눠서 사이좋게 나눠 먹다가 헤사를 만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짐을 잔뜩 들고 있는 헤사는 볼을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채우고는 갈 길을 떠났다.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 온 두 사람은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과 교대했다. 다양한 기사단에서 차출된 기사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시간만큼 제멋대로인 게 없었다. 어찌나 밤이 긴지. 똑같은 여섯 시간이라 하더라도 낮보다 밤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모두가 만든 정적이 지루했다. 심심한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와 끝말잇기를 했다. 에버하르트가 헤사에게 배워 온 실뜨기 놀이도 했다.

늦은 밤까지도 성의 시녀들이 돌아다녔다. 비슷한 처지라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 지나갔다. 시녀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에버하르트를 몰래 훔쳐봤다. 에버하르트는 멋진 척하며 어깨를 쭉 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눈을 가늘게 떴다.

“봤어, 레티시아?”

“어…… 네 멍청한 모습…….”

에버하르트가 씩씩댔다. 최근 키가 훌쩍 커서 비등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촉새 같고 바보 같은데. 이런 남자의 뭘 보고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레티시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남자.”

에버하르트가 풀 죽었다. 그런데 순간,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전투 직전의 날카로움이 에버하르트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상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시야를 넓게 했다. 무언가 거슬렸다.

“레티시아.”

“알아.”

벌레 우는 소리가 멎었다. 무언가에 놀란 새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라 두 사람의 위를 가로질렀다.

“3번 주요 호위 지점!”

에버하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에서 암살자 다섯 명이 쏟아졌다. 기사들을 피해 들어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는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티시아가 왁 소리를 터트렸다. 일정 거리를 두고 경비 중인 다른 병사와 기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3번 주요 호위 지점, 남자, 다섯! 아니.”

레티시아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부로 두 명 침입!”

그녀가 말을 마치는 그 순간 암살자가 짧은 검을 내질렀다. 레티시아는 스으 숨을 들이마시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쿵!

그녀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온몸에서 전달된 팽팽한 힘이 그녀의 검에 실렸다. 돌도 부숴 버릴 듯한 파괴력이 남자의 무기와 함께 팔을 잘라 내었다. 레티시아의 살벌한 얼굴 위로 피가 튀었다.

“아아악!”

레티시아는 팔이 잘린 남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에버하르트에게 암기를 던지려는 암살자의 머리채를 잡아서 벽에 찧었다. 한 사람을 빠르게 무력화 한 에버하르트가 눈짓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레티시아가 이를 갈았다. 첫 실전을 감히, 하카브를 호위하는 것에 쓰게 만든 이, 쓸모없는 자식들…….

감정이 실린 묵직한 공격들이 암살자들에게 쏟아졌다.

후웅!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레티시아의 검격에 암살자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졌다.

암기 따위가 날아와도 귀신같이 알아채 쳐 내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했다. 황실 기사 특유의 탄탄한 기초도 빛을 발해,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호위 인력이 그들을 도우러 올 무렵에는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암살자를 발로 차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지원하러 온 기사들이 움칠 몸을 떨었다. 같은 하급 기사인데 묘하게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새에 살아 있는 암살자 두 명을 포박해 놓았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지원하러 온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레티시아입니다.”

피가 묻어 있는 얼굴로,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내미는 것치곤 태평한 태도였다.

* * *

황성이 왈칵 뒤집혔다. 타국의 왕족이 간밤에 암살 위협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황실 기사단의 협력을 받아 미리 호위 병력을 늘려 둔 덕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암살자를 잡아 낸 것도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이었으니, 리카르디스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암살자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된 것이 다섯. 두 명은 생포했으나 고문하던 중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발타의 후계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는 암시만 남긴 사건이었다.

하카브 왕자는 제 안위가 달린 문제임에도 넉넉한 태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니 모두가 기뻐할 만한 결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언급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가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속없이 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날카롭게 갈린 무기가 검집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완성되지 못한 검은 검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모든 일에 대비책을 세워 뒀음을 알 수 있었다.

암살자를 간밤에 보낼 정도로 하카브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던 자들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건들고 있는 게 벌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그걸 이제야 알아 처먹었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등신 같은 작자들이라고도 했다. 분명 인간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이니, 절지동물의 형상일 것이며, 그것도 머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고 악담했다.

하카브는 자신이 머무는 곳을 찾은 리카르디스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격, 감동, 환희. 자신의 호위 인력을 빼서라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진정성 있게 떨리는 하카브의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서 들끓는 욕설이 행여나 빠져나올세라, 아주 꼭꼭.

하카브가 갖은 수작질로 로젤린을 흔들어 놓은 직후라 감정이 더욱 악화된 시점에서 하카브에게 감사 인사를 듣고 있으려니 절로 열이 뻗쳤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나쁜 일을 당하면 안 된다는 것쯤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암살자들의 성공을 은근히 바라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카브는 국경을 넘은 우정에 감격하며 리카르디스를 끌어안았다. 심지어는 양쪽 볼에 키스하기까지. 리카르디스는 제 25년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살의가 넘친 적이 있던가 다시 삶을 돌이켜 보았다.

물론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변함없이 근사했다. 하카브가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었다.

“제국에 온 손님이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일라베니아의 축제를 위해 나쁜 일을 덮어 주신 배려는 감사하나,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처리할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가 봐야 합니다, 왕자. 식사 초대는 다음에 부탁드리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마음 잘 추스르시고 다음번에도 웃는 모습으로 반겨 주시길 바랍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힘써 주셨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물론입니다, 황자.”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두 손을 꽉 쥔 채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의 얼굴. 냉철함이 언뜻 비치는 그의 행동에서는 어떤 파문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카브는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를 줄곧 주시해 왔다.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으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순히 부하를 위하는 것치고는 과할 정도였다.

그것이 잘 갈고 닦아 날카로운 검을 아끼는 마음인지 다른 종류의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어쨌거나.

그러니 로젤린을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뺏어 오려 했다면 이렇게 웃고 있지만은 못할 텐데. 정말 그녀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한 것일까?

‘이런…… 정말 기대를 해 봐도 되는 것인지.’

하카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로젤린도 로젤린이지만 이 남자가 흔들리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때 리카르디스가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품을 뒤지더니 곱게 자수가 놓인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소란에 잃어버리신 것 같더군요, 왕자. 제 기사가 주워 온 물건입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한 겹의 천 안쪽에서 잘그락잘그락 굴러다니는 작은 금속의 더미가 느껴졌다. 하카브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거 참. 정말…….’

주머니 입구를 열어서 보니,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목걸이였다. 로젤린에게 줬던 청혼의 증표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카브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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