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마카롱은 곧 황성으로 돌아왔다. 고고한 하얀 성들이 하늘로 뻗어 있는 일라베니아 황실 성은 미관상 보기에는 좋았다.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게 주관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카롱은 이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짜증나고, 어딘가 껄끄러웠다. 자주 밖을 떠돈다고 해도, 그 껄끄러운 장소를 집이라도 되는 양 꼭 돌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로젤린 때문이었다.
수풀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붉은 잡초를 보고는, 색이 예뻐 먹고 싶다며 고민하던 로젤린이 떠올랐다. 그 모습만 생각하면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독수리는 밤하늘을 날다가 에휴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의 방. 큰 창을 뒤덮는 그림자는 곧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네발짐승으로 변했다. 마카롱은 앞발을 할짝거리고 세수를 했다.
커다란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니 헤사가 들어왔다. 시트를 갈고 고양이 미미를 실컷 만진 소년이 뿌듯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후에 로젤린이 돌아왔다. 미미를 발견한 로젤린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갔었어.”
“아, 칼릭스한테.”
“뭐 했는데?”
“뭐 좀 먹고 왔어.”
‘파편’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로젤린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나를 두고 혼자 뭘 먹고 왔다고? 딱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고양이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어린애는 먹는 거 아냐.”
“나 다 컸어. 스물세 살.”
“이게 어디서 먹히지도 않는 공갈을 쳐. 통할 사람한테 하자.”
로젤린이 칫 하고는 다시 마카롱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마카롱이 골골대고 있자 로젤린이 아차 하며 일어섰다. 다급하게 찬장에서 꺼낸 물건은 샴페인이었다. 그녀가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 기사들이 마시던 종류였다.
마카롱이 반색하며 잽싸게 인간 여자 모습으로 의태했다. 두 사람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커다란 샴페인이 금세 동났다. 취하지 않는 두 사람은 입맛만 다셨다. 취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상큼한 과실 향을 맡으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로젤린은 정말 취한 인간처럼 좀 들떠 보이는 기색이었다. 왜 기분 좋아 보이냐 물었더니,
“전하가…… 진짜…… 너무 아름다워.”
라는 답변이 돌아와 마카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심심한 반응에 열성적으로 리카르디스의 어디가 아름다운지 설명했다. 반짝거리는 눈가가, 오뚝한 콧날과 각진 턱선이, 탄탄한 가슴이, 복사뼈가!
“…….”
마카롱은 복사뼈가 어떻게 생기면 아름다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서는 창문을 통해 나갔다. 또다시 리카르디스에게 간다고 했다.
고요한 방이 밤에 잠겼다. 로젤린이 나간 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인간 마카롱은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
고양이는 소파에서 테이블로 풀쩍 뛰었다. 달큼한 과일의 잔향에 꼬리가 절로 살랑거렸다. 마카롱은 쓰러져 있는 샴페인 입구를 할짝거렸다. 이상하게 잠이 몰려왔다.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한 마리의 고양이가 탁자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 * *
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깨어난 마카롱은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감싼 공기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 안쪽이 무서울 정도로 박동하고, 온몸이 당장 흩어질 것처럼 떨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귓가에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도망쳐야 해! 숨어야만 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이 다급한 뜀박질은 그 목소리를 따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누가 쫓아와서? 뭐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이 보였다. 헛구역질이 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머리를 숙이자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런데 뭐지, 이 피 냄새는. 어디서, 어디서 계속 피 냄새가…….
얼굴 위로 흐르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숨어야 해. 도망쳐야…… 더 깊은 곳으로……. 그런데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이었더라. 머리가 멍했다. 생각 위로 목소리가 덧대어졌다.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금속 무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가슴을 두드리고 헤집었다.
아이들이 엉엉 운다. 그 소리에 가슴이 저며 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있지? 둘러보아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둑한 숲길이었다.
빨리 가자. 빨리 도망가자. 더 멀리.
아, 피가.
자꾸만 피 냄새가.
* * *
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환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의 등불이 하얀 성을 둘러싸고 빛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나,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귀족들은 번번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모아 찬사했다. 밤에도 영광으로 빛나는 일라베니아!
“아름다워.”
하카브 또한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등불의 향연에 크게 감명 깊어 했다. 소파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보는 창은 마치 한 편의 명화라 보아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이따금 빛이 흔들거렸기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위명이 헛되지 않는군. ‘축복의 밤’이라……. 어둠을 몰아내는 영광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어. 디에즈, 그대도 구경하지 그래. 매년 보는 거라 감흥이 없나?”
디에즈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술을 따르고, 삼키고, 테이블에 놓고, 다시 따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말술인 건 알고 있지만 혼자서 두 병을 넘게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술 한 잔도 못 마실 것처럼 생겨 놓고서는.
“디에즈. 오늘따라 수심이 깊어 보여.”
“골치 아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왕자부터 시작해서.”
디에즈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 봤다.
“농담도 잘하긴.”
“진담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청혼을…… 하…… 설마 로젤린 경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실 테고.”
“생각보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 뒤에 있는 인물들이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기대는 살짝 접고 있다.”
“살짝이요?”
“한…… 이 정도.”
하카브가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살짝 접었다. 모서리를 새끼손톱만 한 정도로. 디에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카브가 피식 웃으며 포도를 집어 먹었다.
“시작이 반이라지 않나.”
디에즈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 한숨을 쉬었다. 항상 번듯하게 펴져 있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감정이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순간, 디에즈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운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그의 시선이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흘렀다.
“밤손님이로군요. 왕자의 피를 취하고 싶은.”
“이런. 며칠은 더 두고 볼 줄 알았더니. 성격 급한 사람들일세.”
디에즈는 테이블 위에 켜져 있던 초를 후, 하고 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방 안에 있던 불을 전부 소등했다. 방 안이 금세 어둠에 잠겼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호위들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기다렸다.
창문 밖에서 금속음이 연쇄적으로 울렸다. 창을 통해 내려다보니 복도에서 흰색 제복을 입은 자들과 어두운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싸우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멍청하기까지 해서 호위들에게 걸린 것 같은데…….”
하카브가 웃었다.
“최근에 리카르디스 황자가 성 주위의 병력을 늘려 줬거든. 나를 위해.”
“리카르디스가 서류를 던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그거 무척이나 보고 싶은걸.”
하카브가 정말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쨍그랑!
그때, 창문이 깨지며 파편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디에즈가 서 있는 창이 아닌, 테라스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멍청한 건 아닌가. 양동 작전이라…….
디에즈가 창의 커튼을 쳤다. 방 안은 한층 어두워졌다. 암살자들은 어둑한 내부에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커튼 너머로 비치는 희미한 등불의 빛으로 어렴풋이 형체만 알아볼 정도였다.
방 안에 서 있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검을 빼 들었다. 순수한 마인들로 이루어진 호위 부대였다. 디에즈가 암살자들을 향해 걸어가며 호위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서지 마세요.”
하카브가 포도 한 알을 더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어쩐지 웃음기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순. 디에즈 황자 전하께서 나서지 말라 하신다.”
두 명의 침입자가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달려왔다. 어설픈 위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법 훈련된 암살자인 듯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침입자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 공격을 바라보던 디에즈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부딪친 무기가 부서져 날아갔다. 암살자가 주춤 물러서며 당황했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디에즈의 손이 남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커헉. 비명은 짧았다. 순식간에 목이 뒤틀린 한 남자의 인영이 허물어졌다.
다른 암살자는 디에즈를 지나쳐 하카브를 향해 달렸다. 디에즈는 뒤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 탁자를 향해 찍어 내렸다. 탁자가 부서지며 과일이 사방으로 날았다.
디에즈가 부서진 나무 조각을 집고는 암살자의 머리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단단한 두개골의 저항은 그의 힘 앞에 의미 없이 무너졌다. 파삭,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와인이 튀고 피가 흐른 그 와중에도 디에즈의 옷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디에즈는 거울 옆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의 꽃을 뽑아 바닥에 버렸다. 화병 안에 남은 물이 찰랑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손에 물을 부어 전투의 흔적을 씻어 냈다.
디에즈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전투도 소강상태인 듯했다. 흰 대리석 위로 피가 너절하게 뿌려져 있었다. 창문 유리에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이 비쳤다. 디에즈는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미간의 주름을 폈다.
디에즈는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성 여기저기를 빛내고 있는 등불이 보였다. 밤하늘 별보다 밝고 환한 빛무리가 은하수같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빛나는 하얀 밤 속에서 기어코 어둠을 찾아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