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5화 (125/220)

125화.

“로젤린. 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리카르디스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목뼈를 문질렀다.

“로젤린.”

“……예.”

“로젤린 에스터.”

“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예.”

“가장 날카롭고 가장 빛나는.”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려 내었다. 자신이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적, 황제에게 했던 입 발린 문구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카브의 목걸이에서 벗어난 시선은 그보다도 빛나는 사람을 담았다.

“나의 검.”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아프지는 않지만 아주 단단하게. 로젤린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힘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펼쳐진 손은 점점 웅크려졌다. 그녀의 손 안에 있던 하카브의 목걸이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강해져라.”

그리고 기어코, 로젤린의 손은 온전히 무언가를 잡아 낸 모양새가 되었다. 더 이상 찬란한 금색으로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던 남자는 한 꺼풀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결코 무르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위해 강해지겠다.”

리카르디스의 말로 작게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다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로젤린의 안에 가득 차 있던 우울이 울컥울컥 밀려 나왔다. 눈가가 살짝 젖었다.

리카르디스를 잃는 상상만 해도 사고를 멎게 만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카브의 제안에 갈등한 이유였다.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과거 ‘로젤린’으로부터의 학습. 가슴 안쪽을 할퀴어 그 상처마다 뜨거운 쇳물을 들이붓는 듯 녹아내리며 타오르는 감정. 두 번은 버텨 낼 수 없을 거라, 어리숙한 그녀의 사고보다 그녀의 본능이 먼저 깨달았다. 제안을 거절하겠다 결정했지만, 하카브의 목걸이를 손이 닿는 곳, 언제고 다시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까득…….

그녀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비벼지다 못해 강한 압력에 서로 쓸릴 때 나는 비명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로젤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이 그녀의 혼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꽉 쥐어져 있는 주먹에 뼈가 도드라졌다. 서로가 서로의 틈에 들어가던 장신구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탕!

쇳더미 위로 쇠가 떨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공간을 파도처럼 덮쳤다가 사라졌다. 귀에 이명이 일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서 후드득 목걸이의 잔해가 떨어졌다. 반쯤 구겨진 펜던트와 부속물들이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에 반짝거리며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이 주먹을 쥔 채, 그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예, 전하.”

15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광경에 칼릭스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알몸의 남자가 방 안을 배회 중이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칼릭스는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알몸의 남자와 단둘이 있기 위해 서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돌이켜 본 칼릭스의 얼굴에 회의감이 짙게 드리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레이몬드만큼이나 장신인 잿빛 머리의 남자는 태평하게 돌아다니다가 와인장을 발견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오, 비싸 보이는 게 많은데.”

남자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와인장에 진열된 것 중 가장 비싼 와인이었다.

남자가 손날로 병의 목을 퍽 소리 나게 쳤다. 윗부분이 칼날로 잘린 것처럼 예리한 단면을 보이며 떨어져 나갔다. 유리 조각이 들어가는 걸 염려한 것인지 단면을 후후 불던 남자가 와인을 들이켜고는 크으,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아끼는 와인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음에도 칼릭스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이없어서.

“……마카롱 님.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 빨리빨리 좀 다니자.”

마카롱이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편해 보였으나 꼴 보기 싫었다. 알몸이다 보니 유독 중심이 눈에 띄었다.

“옷을…… 드릴까요?”

입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아니. 곧 날아가야 해서 귀찮고.”라는 마카롱의 대답에 무산되었다. 정말 보기 싫었다. 칼릭스는 그를 최대한 외면한 채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물건이 도착했거든요.”

칼릭스가 서랍을 뒤적여 가죽으로 감싼 물건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마카롱은 와인 병을 대충 소파에 던지고 그것을 냉큼 집었다.

“그거 맞네.”

칼릭스는 소파에 번지는 붉은 자국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파편’입니다.”

사냥 대회 당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예전에 로젤린에게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협조로 얻어 낸 암기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내에 있는 성에 줄곧 보관 중이었다.

몇 주 전, 마카롱이 ‘파편’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겠냐며, 없어도 구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만 하지 않았더라도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파편’의 위험성이 가장 대두되었던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왜 지금 ‘파편’을 구해 달라고 한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금세 풀렸다. 황성에 또다시 위험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발타의 사절단이라는.

마카롱은 성급한 손놀림으로 끈을 풀어 감싸진 가죽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녹슬어 있는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카롱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보지 못할 무형의 기운을 읽어 내었다. 단검에서 검고 붉은 것이 일렁였다.

마카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타에서 보았던, 인간들의 몸에 심어져 있던 검붉은 기운. 거칠게 박동하며 사납게 날뛰는 마력. 이것을 마력이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씨앗은 같으나 발아 과정과 꽃의 종류가 다르다. 인간들도 참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대?

마카롱이 단검을 얼굴 가까이 들었다. 칼릭스가 몸을 움츠리자 사납게 생긴 남자가 그를 비웃었다.

“쫄지 마라.”

“……네.”

“고분고분한 게 귀여운 맛이 있었네. 알았으면 진즉에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였는데. 아주 쪼금.”

“볼일이나 보시죠, 좀!”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그는 단검을 들고 샅샅이 훑었다. 남아 있는 ‘파편’의 양은 아주 적었으나, 이 정도로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라 했다.

‘흠…….’

잠시간 고민하던 마카롱이 단검으로 제 손등을 그었다.

“마카롱 님!”

칼릭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마카롱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지만 이미 상처를 통해 ‘파편’이 스며든 후였다.

“미쳤습니까?”

“이놈의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를 퍽 쳤다. 칼릭스는 옆구리를 붙잡고 인상을 썼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나한테 안 통하는 거 빤히 알면서 그러니. 오,”

마카롱이 손등을 보며 실실 웃었다. 좀 미친 사람 같았다.

“‘파편’이 주제도 모르고 사납게 날뛰고 있어.”

칼릭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카롱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 봤다. 로젤린이 ‘파편’을 결국 이겨 냈으나, 며칠간 생사를 오갈 정도로 마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마카롱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칼릭스의 혈압이 올랐다.

마카롱은 눈을 감고 몸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편’은 인간의 신체를 흉내 낸 겉껍질을 헤집고 날카롭게 내부로 파고들었다. 검붉은 마력이 혈관처럼 몸 안에 퍼졌다. 파고든 신체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지배하려던 ‘파편’은 곧 짙고 깊은 암흑 속에 발길을 멈췄다.

검은 바다가 ‘파편’을 도리어 뒤덮기 시작했다. 퍼졌던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춤추던 ‘파편’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나의 촛불까지 남김없이 집어삼킨 마카롱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칼릭스가 보였다. 마카롱이 씩 웃었다.

“별거 아닌데?”

칼릭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종족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인간들은 고작 이런 거로 난리가 나는구나…… 가엾어라…….”

마카롱이 애처로운 눈빛을 가장하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손등의 상처도 언제 있었냐고 말하는 양 말끔했다. 칼릭스는 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했는데…….

“약해 빠져 가지고서는…… 세상에, 애벌레랑 다를 게 뭔지…….”

열 받았다. 칼릭스는 마카롱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마카롱은 기분 나쁘게 히죽댔다.

마카롱은 펄떡펄떡 날뛰는 칼릭스와 놀아 준 후, 테이블 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녹슨 암기.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도 소용도 없는 것.

일정량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파편’은 잔존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그것을 보다가 일어섰다. 시야 정면에 마카롱의 신체가 한가득 들어와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카롱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피부색에서 갈색으로, 검은색으로 검게 물들며 무너졌다.

칼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흐르는 듯, 무너지는 듯, 흩어지는 듯, 연기같이, 밤하늘을 한 줌 떠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칼릭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온전한 ‘그것’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흐르는 구름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탁자에 있는 암기를 완전하게 덮쳤다.

칼릭스는 마카롱의 의도를 알아챘다. 약해 빠졌다고 놀리긴 했으나, ‘파편’이 인간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마카롱도 잘 알고 있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온전히 흡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검은 안개 안에서 무언가가 물결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마카롱의 표면에 닿은 손바닥에 간지러운 무언가가 스쳤다. 칼릭스는 용기를 내서 손을 더 깊이 넣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밀도 높은 공기 같기도 하고, 미세한 모래 입자 같기도 했다.

이게 마력인가? 칼릭스는 몸을 떨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보지 못할 종류의, 힘의 응집체. 경이로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검은 안개 뒤로 촛불이 아른하게 비췄다.

검은 하늘의 별같이 빛났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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