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4화 (124/220)

124화.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호위 기사가 급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워? 카일로 경……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잇세리온 비서관님도 너무했다.

눈을 내리깔며 말을 흐리는 남자의 미소에는 어딘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방과 이 성까지 모두 리카르디스의 것이었으나, 이 거대한 공간에 그만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였다. 로젤린의 가슴 한가득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차올랐다. 노을 지는 하늘보다도 어딘가 마음 한쪽을 시리게 만드는…….

리카르디스는 목덜미를 쓸다가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와 주어 기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리카르디스에게서 새벽의 차가운 비를 이겨 내고 마침내 꽃을 피워 낸 은방울꽃 같은 청초한 아름다움이 비쳤다. 로젤린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손을 잘게 떨었다.

겨우 정신 차린 그녀가 머뭇거리며 원래 호위하는 자리로 걸어가려 하자,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리 와. 아무도 없는데 뒤에 있지 말고.”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로젤린은 다른 사람, 기사단장, 기사단장 부관, 부단장, 부단장 부관, 수석 비서관에게 들키면 크게 혼날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의 옆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생긋 웃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커튼 틈으로 선명한 붉은 빛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유리잔에 반사된 노을이 그의 볼에 한 점 묻어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로젤린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고? 슬슬 그대가 올 때인 거 같아 미리 준비해 뒀다.”

테이블 위에는 스테이크와 갓 구워 아직 따끈한 식전 빵과 수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와 각종 과일이 꽃과 촛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걸 권할 때서야 음식의 존재를 눈치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지만 그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가슴 안쪽을 꽉 채운 감정들로 인해 배가 부르기까지 한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망설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포도 한 알을 떼어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 주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가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난생 처음으로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넣고, 씹고, 삼키는 행동만을 반복했다. 먹는 모습이 관찰당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리카르디스가 흐뭇하다는 듯 웃는 모습에 신경이 쏠려 그랬던 것일지도. 로젤린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체한다’라는 감각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로젤린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불편해하자 리카르디스가 옆에 두었던 서류를 들었다.

“편하게 들어.”

그가 씩 웃으며 손을 뻗어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쳐 내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로젤린이 굳어 있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었다. 서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지했다.

스테이크 한 점, 그를 한 번 흘끗. 빵 한입, 그를 한 번 흘끗. 열심히 일하는 로젤린의 입보다도 그녀의 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가 쳐다보고 있을 때에는 한 없이 부담스러웠는데, 시선이 떨어지니 이상하게 아쉬웠다. 그래도 음식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이제야 맛이 좀 느껴지기 시작해, 로젤린은 먹는 일에 금세 집중했다. 과일 한 조각 남기지 않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로젤린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손바닥을 마주해 삭삭 비볐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의 등에 팔을 걸치고 살짝 고개를 틀어 나른한 눈빛으로 서류를 읽어 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터질 것 같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로젤린은 오늘 여러 동료와 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얘기들로 결심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던 것까지도.

로젤린이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전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지금 바쁘…….”

“바쁘지 않다. 전혀.”

리카르디스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읽던 그 표정 그 자세 그대로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휙 뒤로 던졌다. 공중을 펄럭거리며 날던 종이 몇 장이 바닥에 착지했다.

“저 서류는…….”

“내 일기다.”

“아, 일기요.”

진지하게 읽어 내던 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업무만큼은 아니지만 일기도 중요했다.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꼬박꼬박 쓰라고 해서, 로젤린도 벌써 책 한 권 분량을 거의 다 채운 상태였다. 덕분에 나날이 글씨체도 예뻐지고 어휘력도 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유려한 글씨체 또한 일기로 단련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 무슨 일이지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끼어 꼰 다리 위에 올려 두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하카브 왕자한테 청혼을 받았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상냥한 표정을 유지 중이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음……. 뭐라 하면서? 최대한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 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라고 한 다음에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코웃음을 쳤다. 싸늘하게 냉소하는 표정이 평소의 그와 같았다.

“알만 하군. 로젤린,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 나는 일라베니아가 무슨 짓을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는 법이거든. 황실에 들어온 이래로 기대라는 것은 가져 본 적도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어. 도리어 하카브가 그대가 일라베니아에 실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를 꺼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됩니까?”

일라베니아의 황자 전하이신데?

“안 될 게 뭐가 있나. 생겨 먹기를 지긋지긋하게 생겨 먹은 곳인데. 그래. 그리고 또 무어라 하던가.”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하고 청혼하는 거라며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욕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어린애한테 사탕 주면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그랬군. 그것 참 불쾌했겠어.”

“예. 많이 불쾌했는데 참았습니다.”

빠른 대답에 리카르디스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로젤린이 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금색의 펜던트.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시선도 금색의 장신구를 떠돌았다. 잠시간 침묵이 깔렸다.

“전하.”

“그래.”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하카브 전하가 전하의 우군이 되어 준다 했습니다. 엘피디오 전하로부터, 황제 폐하로부터. 보호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이 조급했다. 실상 새벽부터 계속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뱉은 대답은 ‘하겠다’도 아니고 ‘하지 않겠다’도 아니었다.

“전하,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킬 겁니다. 하지만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금속이 흐르듯 움직였다. 자그락, 자그락. 불쾌한 소리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는 말하지 못한다.”

“사람은 너무 쉽게 다치고 죽습니다.”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로젤린은 꾹꾹 눌러 참고 있던 한마디를, 참고 참다가 내뱉었다.

“그게 두렵습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목걸이를 가만 응시했다. 거절하겠다 결심을 해서 풀어 내기까지 했음에도, 하카브의 제안은 아직 그녀의 손 위에 있었다.

연약하고 위태로운 리카르디스를 보니 문득 불안해졌다. 옆에서 꼭 붙어서 지켜야겠다는 결심과,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뒤섞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했고, 그에 따라 다짐을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가슴 안쪽 깊은 곳부터 느껴지는 한기는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아래서부터 로젤린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리카르디스의 손 위에 로젤린의 손이, 그리고 그 위에 하카브의 목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닿은 곳부터 따스해졌다.

“어제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이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 하나둘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기억했던 사람들도, 그 다음날에는 없다. 결국 내일에 남을 것은 나뿐이다. 괴로움의 몫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짊어져야만 하겠지. 죽음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고통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그 감정만이 나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에.”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로젤린’. 그녀의 끊어진 기억 속 리카르디스는 누군가가 떠나는 모습만을 보아 왔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던 때부터 사망자 명단을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때까지. 로젤린은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해’가 더욱 처절하게 와 닿았다.

“우리에게 잃는다는 것은 가깝고 또 익숙하다. 겪은 적 있기에 그게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알아. 그래서 피하고 싶고 두렵다. 그렇지?”

로젤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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