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정략혼이라. 뭐 흔한 일 아닙니까.”
“귀족 세계에서는 뭐…… 그렇지.”
상급 기사 카일로와 파르딕트가 나란히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파르딕트의 등에 걸터앉고, 카일로의 등에 발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나, 하면 내려가고. 하나, 하면 올라왔다. 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재밌었다.
“카일로 경은 혼인하셨습니까?”
“하나, 아직이지만 약혼녀는 있습니다. 정략 관계이긴 하지만…… 뭐 나름 사이는 좋습니다.”
“파르파르는?”
“하나, 애가 셋이다.”
“정략혼?”
“참나, 이 얼굴을 봐.”
음. 정략혼이군. 연애를 할 수 있을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십 번째 팔굽혀펴기를 한 카일로가 팔을 편 채로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연애에서 결혼까지 성공했다고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는 유명합니다.”
로젤린은 헉하고 제 입을 가로막았다.
“징그럽게 쫓아다니고 추하게 매달렸다고. 부인께서 얼마나 노고가 크셨을지…….”
파르딕트가 벌떡 일어서 카일로를 덮쳤다. 두 사람 위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튕겨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뒤 구르기를 하고는 편안하게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구른 사람 같았다. 로젤린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남자의 싸움을 구경했다.
막 연무장에 발을 들인 레이몬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 바닥에 앉으면 옷 더러워지잖아.”
보자마자 잔소리였다. 로젤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어 깔고 앉았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두 남자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흘끗흘끗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레이몬드가 온 김에 물어볼까? 로젤린이 생각할 즈음 그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내뱉었다.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 없니, 로젤린!? 그냥, 뭐 사소한 고민거리라던가, 음. 그런 거 있잖아? 사소한 자신의 미래라던가…… 하는 그런…….”
로젤린은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하카브가 어떤 존재인지 쯤은 알고 있던 터라, 조금 둘러 말하긴 했다.
귀족 세계에서 흔하다는 정략혼. 조건과 조건만 맞으면 결혼하지 않나. 본인의 목적과, 그 조건이 맞아 떨어진다면 하는 쪽이 나은 것일까? 목적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정략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철없는 일이겠지? 다들 하는 건데 너무 껄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딱 그 정도.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애써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로젤린 무슨 소리야. 요즘 세상에 고리타분하게 정략혼이라니.”
“요즘도 많이 하잖아.”
“당연히 하는 사람들이야 있지. 가문의 세를 불리거나 동맹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 없이. 그저 조건만 보고! 하지만 로젤린, 결혼은 신성한 거란다!”
레이몬드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일생에 한 번뿐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앞으로 하나의 길을 걸어가리라 약조하는 그 기회를 단순히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고? 심지어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건 팔려 가는 거야. 결혼이 아니라!”
“맞아, 맞아. 사랑이 전부가 아니겠어.”
어느새 싸움을 끝낸 파르딕트가 레이몬드를 옹호했고, 그의 뒤에서 카일로가 툴툴거렸다.
“연애결혼한다고 정략결혼하는 사람 너무 무시하시네.”
레이몬드가 잠시 카일로를 이끌고 저 멀리에 있는 큰 나무 뒤로 쏙 들어갔다.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것 같아 청각을 강화해 가면서까지 귀를 쫑긋 세웠으나, 어떤 작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신호로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몬드와 다시 돌아온 카일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정략혼은 쓰레기입니다, 로젤린 경.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그런 끔찍한 단어는 입에도 담지 마시죠. 소름 돋습니다.”
“…….”
뭔가 아까랑 말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그걸 제안하는 놈들도 똑같이 쓰레기입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어우, 그건 좀……. 말이 심하시네요, 카일로 경……. 아무튼, 카일로 경도 이렇게 말하잖아 로젤린. 내가 뭐라 했어!”
“……바닥에 그냥 앉지 마라?”
“아니, 아니 뭐…… 그것도 맞긴 한데.”
레이몬드가 그녀의 두 어깨를 꽉 쥐었다. 로젤린은 어젯밤 자신이 헤사의 어깨를 잡고 훈계하던 때를 떠올렸다. 친구 레이몬드에게서 과거, 동경했던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 에스터. 넌 네가 가진 힘에 비해 소극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어. 네가 그 조건을 이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상대방의 손에 너의 목적을 쥐여 주려는 거야? 똑똑한 녀석이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우리가 검을 들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키려고?”
“기사의 귀감이라 눈물이 나올 뻔했네. 그것도 맞아. 하지만 본디 검은 무기야 로젤린. 적을 베고 찌른다. 싸워 이기기 위한 무기. 너는 그 무기를 쥘 자격을 지닌 기사고, 그렇다면 휘둘러야지. 싸워서 쟁취해 내야지. 지레짐작 두려워하지 말아.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만큼 기사에게 굴욕적인 일이 어디겠어. 너는 강한 아이잖아.”
로젤린의 질문은 그저 ‘정략혼’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자신이 그 대상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레이몬드가 말한 내용에는 그런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지만 로젤린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몬드와 카일로가 휴 하고 그녀 몰래 한숨을 쉬었다.
파르딕트는 계속해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거, 참. 부단장 부관은 입으로 되는감. 하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레이몬드가 그의 발을 퍽 찼다. 세 명의 남자가 다시 다투기 시작해, 로젤린은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푸른 하늘 저 너머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상급 기사 슈텐, 하급 기사 바스티안, 클로에와 네스터외에도 정원사와 주방장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덕에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정략혼의 기원이라든가 정략혼의 폐해. 수많은 실패 사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카브의 욕과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연애담까지.
로젤린보다 인간관계와 정략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로젤린은 단추를 풀었다. 옷 안쪽에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장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끌렀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니 잘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저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에, 그녀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 보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하루 종일 정략혼과 하카브에 대한 욕을 듣고 있을 때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상상 속의 리카르디스가 문 너머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차가운 문고리가 체온으로 데워질 때까지 가만히 잡고 있었다.
후, 크게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어?’
뭐지? 또 내가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
석양빛이 하얀 커튼에 투과되어 어스레 떠도는 집무실 안에 꽃이 잔뜩 장식되어 있는 탓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촛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흔들흔들 춤을 췄던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장식된 공간 속,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 남자가 오늘따라 더욱 청초해 보인 까닭이었을까? 로젤린은 몇 초간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서류를 보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
남자가 눈을 휘며 웃자 눈가가 반짝였다. 로젤린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이렇게 오늘…… 비, 빛나시는 거지? 혼란스러운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 리카르디스는 평소보다 빛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 갖은 장신구, 화장까지. 솜씨 좋은 시녀장의 손길을 거친 리카르디스는 그야말로…….
‘요정?’
요정의 왕 같았다. 같은 현실에 있다고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의 탄탄한 몸을 감싼 옷은 여느 때보다 노출이 심한 스타일이었고, 심지어는 옷감 자체도 하늘하늘하게 얇아 보였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자 헐렁한 옷이 가슴과 복근을 드러냈다. 날렵하게 꽉 짜인 근육의 결이 탄력 있어 보였다.
로젤린의 시선은 흘러, 부츠나 구두를 신지 않은 리카르디스의 맨발로 향했다. 사람의 발이 이렇게나 예쁜 기관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크고 발가락도 길쭉하고, 뼈대도 곧고 예쁜 데다가, 그 위를 가로지르는 핏줄까지도 예뻤다. 바깥 복사뼈에서 다리로 올라가는 선도 어찌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로젤린은 살짝 분홍색 빛이 도는 그의 복사뼈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로젤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던 로젤린은 이제야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위 기사들은 물론이고 잇세리온마저 없었다. 꽃과 촛불로 장식되어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말을 이었다.
“아, 오늘은 다들 급한 일이 있어서…… 나 혼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