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껄끄러운 침묵에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봤다.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턱을 괴고 있는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로젤린의 허리에 큰 손이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힘을 줘 로젤린을 자신의 쪽으로 쭈욱 끌어당겼다. 시트가 두 사람 사이에서 구겨졌다.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코 앞까지 끌려갔다. 어, 약하고 여린 우리 전하께서 힘이 생각보다 세다!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더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아 꾹 눌리자, 그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경직된 초록색 눈동자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비쳤다. 실크처럼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한 가닥 아침 햇살에 빛났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려 깔며 웃었다. 로젤린의 숨이 멎었다. 미모에 넋을 잃고 있어 미처 몰랐는데, 거리가 좀…… 많이 가까운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로젤린이 깜짝 놀라 한쪽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셔츠 자락이 벌려져 있는 탓에 손바닥에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닿았다. 로젤린은 더 당황해 버렸다. 피부가 부드럽다 못해 매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가, 자신이 왜 그 가슴에 손을 대었는지 깨닫고는 다시 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황해서는 떼었다가, 아차 맞다 하고 또 꾸욱 밀었다.
뭘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지.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로젤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전하 뭔가 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만류, 그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허억,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이, 이상한 것 같…….”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공기 속으로 녹아내릴 듯 아련한 미소였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한줄기 햇빛이 드리운 자연 광경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믿을 수 없는 외모에 쩍 굳어 버렸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야심찬 남자가 ‘리카르디스’를 패로 걸었다니. 대항마로 세울 수 있는 것 역시 ‘리카르디스’밖에 없지 않겠는가.
* * *
월장석 성의 시녀장, 한나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예,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부쩍 귀가 어두워진 터라…….”
“아니,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똑바로 들은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치명적인 느낌으로 치장해 달라 말씀하신 것이…….”
“정확하다. 그 느낌으로.”
시녀장은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명령에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녀장도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잇세리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한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치장은 무슨. 얼굴에 뭐 하나 바르는 것도 질색하시는 분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러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잇세리온 비서관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미 희미한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하지만,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느낌을 지니고 계신걸요. 금강석을 깎아서 금강석을 만들어 달라는 말과 진배없습니다.”
“…….”
그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툴툴거렸다.
“이것 봐, 한나. 잇세리온은 말이 통하지를 않아.”
확실하게, 말도 뜻도 통하지 않았다. 한나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시녀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리카르디스가 말한 내용을 다시 반추했다. 따스한 봄 햇살. 그 연약한 무형의 기운에도 스러질 만큼 연약하게. 애처롭게. 하지만 그 속에 짙은 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장미…….
척 봐도 연애다. 월장석 성에서 일했던 10년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주인의 연애 기류! 한나는 전율했다. 드디어, 월장석 성에도 봄이 오는가!
한나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황급하게 시녀를 모두 끌고 나갔다. 보물 창고를 털어올 기세였다. 시녀들이 빠진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르원이 제 턱을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잇세리온과 르원 형제도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연애하시나? 월장석 성에도 꽃이 피는 거야? 은근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를 먼저 불렀다.
“르원.”
“어…… 예?”
“어제 로젤린 경이 누구와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알아 와.”
꽃은 무슨. 자라난 꽃도 칼로 베어 낼 것 같은 차가운 눈이었다.
“또한, 오늘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하는지까지도.”
팔짱을 끼고 저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글쎄…… 장미의 치명적 어쩌고에 가깝긴 했지만 봄 햇살에 아련하게 흩어지는 어쩌고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로젤린 경. 대체 무슨 짓을 했나. 르원이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헤사라 했던가.”
“헤사가 누굽니까?”
“로젤린 경의 새로운 수습 기사. 불러와라. 그녀 모르게.”
르원은 머릿속으로 명령을 다시 되새겼다. 로젤린 경이 어제 한 일. 로젤린 경이 오늘 할 일. 로젤린 경의 생활 전반을 돕는 수습 기사.
“레이몬드 경도.”
심지어는 보호자까지.
‘진짜 무슨 짓을 한 건지…….’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잔뜩 들뜬 걸음으로 돌아오는 시녀장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나의 기대대로 연애가 조금은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연애 초기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각종 술수가 난무하는 치정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나가 과연 그걸 바랐을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길이 없어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걷던 사람 같지 않았다. 로젤린은 비틀거렸다. 취객이나 배고픈 강아지처럼 비실거리는 걸음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멈췄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멍하니 있다가 기숙사 건물을 지나치기도 했다. 목적지를 지나쳤다는 것도 이십분 후에야 알았다. 그러다 보니 기숙사 방의 문고리를 잡은 것은 리카르디스의 방에서 나오고 정확히 한 시간 사십구 분 후였다.
달칵.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정돈된 방 안. 거대한 침대 아래에 헤사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본인의 방에서 안자고 왜 바닥에서…….
‘아…… 맞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소년을 본 순간, 로젤린은 여태껏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하카브가 건넨 목걸이, 그와 함께 받은 제안, 심지어는 하카브의 존재까지. 아침의 리카르디스가 너무 충격적인 탓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 헤사에게 살포시 덮어 주었다. 침대 위로 옮겨 주고 싶었으나, 소년은 두 선임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민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드리는 그 순간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로젤린은 바닥에서 자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대가 나에게 오는 그 순간부터…….]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하카브의 제안 위로 리카르디스의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뭘 고민을 해 보려 해도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목걸이가 신경 쓰여 한번 꺼내 보아도, 아까 닿았던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가슴이, 이번에는 진짜로 고민 좀 하자 싶어도, 자신을 끌어당기던 큰 손과 이마에 짙게 눌러진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까지!
온 머릿속이 리카르디스였다. 로젤린은 제 허벅지를 꾹 눌러 보았다.
‘뭔가 이것보다…… 탄력 있고 피부 결은 부드러운데 단단하고…….’
탄탄한 가슴의 감촉이 선연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눌러 보고 싶었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언젠가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도 공감했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얼굴이 화끈하고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았다. 여태껏 그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로젤린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 안쪽에서 금속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맞다.’
하카브. 또 까먹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번에는 집중해서 잠깐 그의 제안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혼인하면 리카르디스를 건드리지 않을 뿐더러 지켜 주기까지 하겠다. 혼인…… 혼인이라.
[이델라브힘께서 왜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누님?]
[……어…… 음….]
[혼자서는 그릇된 행동이나 결정을 내릴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문에 종종 실수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걸 서로서로 도우며 보완하라 신께서 저희들을 함께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누님, 어떤 일이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마시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그 생각을 나눠 보는 게 어떨까요. 사람 머리 하나보다는 사람 머리 둘, 둘보다는 셋이 나은 법이죠.]
물론, 칼릭스가 말한 내용은 성전에 서술 된 바 없으므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제 누이가 발타에서 단독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죄다 알게 되었고, 기겁했다. 한 번 더 강하게 경고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대한 세계를 이루는 신을 끌어들여야 하는 정도의 규모로.
덕분에 인상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으려니 칼릭스의 조언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고민해서 무얼 하겠나. 답이 나오지를 않는데.
마카롱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제부터 통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