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1화 (121/220)

121화.

로젤린은 제 갈등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전하를…….’

침대 끝이 살짝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키고 싶어.’

리카르디스가 몸을 뒤척이더니 반대로 누웠다. 이제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은 뭔가 울컥 서러워졌다.

‘나는 전하의…….’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두운 방 안이 더욱 까맣게 잠겼다. 로젤린이 눈을 감았다.

‘곁에 있고 싶어.’

그녀 안에 새롭게 움튼 욕망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아직 새벽이 걸려 있을 때 리카르디스는 깨어났다. 술을 먹고 자서 그런지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듯 멍했다. 한기가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품에 있는 따뜻한 무언가를 끌어안았다. 제 두 팔 안에 폭 들어오는 따뜻한 것이 압박이 괴로운 듯 “으응…….” 하고 소리를 냈다.

“아…… 미안…….”

“네…….”

리카르디스가 팔에 힘을 풀고 안고 있는 무언가를 토닥였다.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겼다.

……부드러워?

번쩍 눈을 뜬 리카르디스는 한가득 펼쳐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향연에 소리 없이 경악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자신의 왼팔을 베고, 오른팔에 꼭 안겨 자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끌어안은 게, 로, 로젤린. 뭐, 그대가. 왜, 여기에. 아니 이불은 어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니, 아니. 왜 로젤린이 여기에? 꿈속을 헤매다 깨어났더니 더 이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눈동자를 마구 굴리며 당황스러워 했다.

바람소리도 읽는 예민함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로젤린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숙면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면 자그마한 자극에 일어날 것같이 보이긴 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등을 어린아이 어르듯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인데 잠을 깨울 수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가면서. 리카르디스의 손길에 로젤린의 찌푸려진 미간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그는 곧 아까와 비슷할 정도로 경악하게 되었다.

로젤린이 꿈틀대며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허리에 그녀의 팔이 턱 얹어졌다. 그는 헉 소리를 겨우 참아 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셔츠가 어제보다 더 벌어져 있는 탓에, 그녀의 이마가 쇄골 바로 아래 가슴에 찰싹 붙었다. 자고 있어 그런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맞닿은 피부의 온도가 당황스러웠다. 색 색, 숨이 맨 살결을 간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가슴부터 시작된 감각이 제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머리 끝까지 간질, 간질. 버틸 수 없을 만큼 등골이 오싹거렸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하늘에서 땅을 비추는 위대한 이델라브힘이시여. 성스러운 빛으로 어린 백성들을 이롭게 하시고…….’

리카르디스는 성서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암기했다. 그가 아는 것 중 가장 가슴을 차갑게 만들게 하는 문구들이었다. 다행히 소용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끼어 있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로젤린에게 덮어 주었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우물거리더니 씩 웃었다. 포근해서 기분 좋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하다가 다시 성서를 외웠다. 아니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둥그스름한 이마, 시원시원하게 쭉 뻗은 눈꼬리, 긴 속눈썹, 곧은 콧날, 먹는 꿈을 꾸는지 연신 오물거리는 입까지.

주위를 경계하며 암살자들을 척척 잡아내고 위험이란 위험은 다가오기도 전에 차단해 버리는 대단한 호위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기척마저 읽어 내는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완전히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방비한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여덟 시간이면 여덟 시간 내내 로젤린의 자는 모습만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제 슬슬 잇세리온이 일어날 때라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팔을 슬쩍 들었다. 그래도 로젤린은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고른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딱딱한 팔베개를 사용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햇살에도 문양의 굴곡을 따라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는 금색의 펜던트. 로젤린의 셔츠 안쪽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펜던트의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리카르디스가 모를 리 없었다. 따스하게 데워지고 있던 가슴 안쪽의 온도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현 힉살라, 아돈의 직계 혈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함의 증표는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인 발타인 중 하카브 왕자와 간제 왕녀만이 지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욕망이 떠올랐다.

‘하카브 위 리비타…….’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왕가의 표식을 줬으니, 단순히 내 부하로 오라는 둥의 시시한 얘기가 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 마력이 수준 이상이라고 하면 신분의 고하는 막론하고 왕실과 혼인으로 엮어 버리는 것이 그네들이 하는 일이었으니. 하카브가 무슨 말을 했을 지는 빤했다. 제 열네 번째인가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되라는 그런 얘기였을 테다.

그런 헛소리를 로젤린이 ‘아,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받은 목걸이를 고이 걸고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뭔가 혹할만한 제안이 있었을 텐데.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볼과 입술이 부어 통통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양 볼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은 채 씹고 있는 광경을 연상했다. 냠냠. 때를 맞춘 듯 로젤린이 또 꿈속의 무언가를 먹었다. 그녀의 입속에 머리카락 한 올이 무서운 기세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손으로 슥 빼내 줬다.

‘……설마 먹을 거라던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로젤린이 거기까지는 아니…… 겠지. 리카르디스는 미심쩍은 믿음을 기반으로 미심쩍게 확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뭘까. 로젤린이 왜 하카브에게 받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걸고 있는 것인지…….

그때, 스르륵하고 로젤린의 눈이 열렸다.

아침 햇살을 받는 눈동자가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풀잎 위에 고여 있는 새벽이슬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잠에 취해 있는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로젤린은 자신이 뭘 베고 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서 리카르디스의 반대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하지만 침대가 넓었기 때문에 굴러 봐야 침대 위였다. 로젤린은 엎드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 거리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으니 로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은 잘 잤나, 로젤린 경?”

“어, 아. 저는……그, 전하의 등을 보다가 잠시 앉아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 와중에도 정말 웃음이 나오긴 했다. 로젤린은 당황하다가, 제 목에서 흐르는 목걸이의 감촉을 느끼고는 펜던트를 잡아 얼른 옷 안으로 숨겼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뭔지 알고 있군.’

로젤린이 셔츠 단추를 잽싸게 잠그고는 힐끗, 옆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즈음의 리카르디스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나갔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로젤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거짓말이라고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별일 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을 바랐던 대답에 긍정만 돌아올 뿐이라, 리카르디스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목걸이를 숨기는 손길은 다급하고, 시선은 흔들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불안을 똑똑히 읽어 내었다. 로젤린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일은 몇 가지 없을 것이다. 먹을 것, 가족, 친구…… 그리고 ‘2황자 리카르디스 황자’의 안위까지.

리카르디스는 그중에서 분명 ‘2황자 리카르디스’가 하카브의 제안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 예감했다. 그녀를 흔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교만이 아니었다.

과거 ‘로젤린’의 영향 때문인지 지금의 그녀 또한 호위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집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같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배우고 성장했으나,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일관된 태도 덕에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로젤린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논을 하고 싶었다면 진즉에 말했을 것이다. 입을 딱 다물고 목걸이를 숨기고 있는 지금은 리카르디스도 인내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하카브의 수작질로 흔들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을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셔츠를 꼭 쥐고 있는 로젤린의 하얀 손을 계속해 담고 있었다. 소중한 물건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저 숨기기 위해 쥐고 있을 뿐이란 걸 알고 있었으나, 머리와 가슴이 각기 따로 사고했다.

차갑게 돌아가는 이성 아래 속은 활활 불타올랐다. 타고 남은 것은 검은 재였다. 거뭇거뭇한 감정의 흔적들로 속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황성에 들어 온지 십오 년. 수많은 사건을 거치고 울고 웃던 그에게 처음으로 낯선 감정이 생겼다. 눈동자가 바다 속 깊은 곳의 빛을 띠었다. 그것은 하카브가 로젤린을 볼 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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