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20화 (120/220)

120화.

손톱 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았다. 목 뒤로 돋은 소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카브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으로 일단 용건은 끝.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딤라에, 리카르디스에. 하여간 얼마나 꽁꽁 숨겨 두던지. 치사하게 말이야. 하카브는 짐짓 인상을 쓰며 제 노고를 더 설명하려다, 빙그레 웃는 것으로 그 말을 대신하기로 했다.

언제나 무심하게 다른 사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변했다. 로젤린의 평정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간절히 바라보는 그 모습에 하카브는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거…… 생각보다도 기분 좋은걸.’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펜던트였다.

“자아, 이건 맹세의 증표로 주도록 할까.”

하카브의 한쪽 손이 그녀의 제복 단추를 풀어 냈다. 로젤린은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곧바로 분수대에 막혔다. 남자는 멀어졌던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제복 안, 셔츠의 단추까지 두세 개 풀어 냈다. 목이 드러나자 하카브가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로젤린은 입을 다문 채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맡아 두도록 하지.”

“아…….”

로젤린의 셔츠 안쪽 걸려 있던 싸구려 목걸이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축제 때, 리카르디스의 눈동자 색과 비슷해서 샀던 펜던트였다. 망설이는 사이 하카브는 그녀의 목걸이를 자신의 소매 안쪽에 쑥 넣었다.

돌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제 쇄골 아래 늘어진 차가운 금속을 만지고 있자, 달 아래의 검은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목을 훑었다.

“잘 어울리는군. 아름답다 로젤린.”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던 하카브의 뒤로 또 다른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하.”

하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눈치챘다. 평범하게 정원을 산책하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은 듯했다. 아쉬워하던 하카브가 수풀 벽에 나 있는 꽃 한 송이를 뽑아 그녀의 귀에 꽂았다.

“좋은 답을 기다리겠다.”

연신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남자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쌌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넓게 퍼지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하카브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멍했다. 벌어진 셔츠와 제복 단추를 다시 꼭꼭 여몄다. 목걸이를 걸어 주던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뱀같이 느릿하게 피부 위를 흐르던 손길. 로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원의 입구에서는 아까 전,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왔을 때에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그림자가 작달막했다. 로젤린은 코로 숨을 후 내쉬었다. 헤사가 후다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검은달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헤사?”

“예? 절대로 아닙니다!”

눈동자, 심장 박동, 얼굴 근육의 미세한 반응은 헤사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왕자 전하께서 뭐라 했습니까.”

“……경께서는 2황자 전하와 황실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칠 테지만, 과연 황실도 그러하겠느냐고요. 몇 세대 전만 해도 마인 사냥을 주도 했던 나라의 성질이 과연 시간이 흐른다고 변하리라 믿느냐고…….”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일라베니아의 마인이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받는지. 나는 일라베니아와 2황자의 적이긴 하나, 결코 그녀의 적은 아니다.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2황자의 입지는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허상에 불과하지. 황제는 사지로 제 아들을 몇 번이나 집어넣은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런 위험한 길을 걷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로젤린이 있다는 것. 여차하면 그를 대신해 죽을 각오로 말이야. 내 말 이해하나? 그의 곁에 있으면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다.]

로젤린은 다소 기형적일 정도로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자라 왔다. 황실을 지킨다.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 반짝이는 사명을 황실은 단순한 화살 받이로 이용할 뿐인데, 어찌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른 길도 있노라 알려 주고 싶을 뿐이라고.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숨겨 두어 만날 방도가 없는데 어찌하겠느냐. 네가 진정 로젤린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그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구구절절하고 애절하게 말했었다.

입 발린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무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카브가 짚은 점들을 헤사 또한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로젤린은 나라의 영웅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그 또한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 그 위치가 어떤지 헤사는 뼈저릴 정도로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수작질에 동조하게 되었는데…….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쳐다보는 로젤린을 보노라니, 시간을 되돌려 했던 짓을 취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와, 왕자 전하께서…… 무어라 하시던가요……?”

로젤린이 그의 양 어깨를 꽉 쥐었다.

“헤사. 나를 걱정한 건 좋지만, 하얀밤 기사단의 모두는 리카르디스 전하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번 일은 헤사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의 끝이 흐려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렇다면 하카브의 위험성을 아예 배제 하는 것을 넘어, 그의 힘을 리카르디스에게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기사 로젤린.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를 지키는 자신은…….

왜 그 제안에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왜 리카르디스의 얼굴만 떠올랐던 걸까.

헤사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로젤린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하고 멋있는, 바닥만 바라보는 자신과 달리 언제나 앞을 보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헤사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로젤린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후회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했어요…… 로젤린 경.”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소년의 물기 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로젤린은 끝내 위로하지 못했다.

* * *

유난히도 밝고 선명한 밤이었다. 하늘이 맑게 개어 별빛 달빛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받은 서류를 뒤적였다. 주전파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와 있는 지금의 좋은 기회를 그들이 그저 손 놓고 있을 리 없었다. 어느 뒷골목으로 돈이 흘러 들어갔다는 걸 보니 암살이라도 할 요량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성질을 못 이기고 서류를 집어 던졌다. 죽이지도 못하고 벌집만 들쑤시는 꼴이 될 것이 빤한데, 이 멍청한 자식들이…….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에 호위 병력을 더 붙여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욕을 뇌까렸다. 멍청한 놈들 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게 생긴 셈이었다.

‘아니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따위로 시작할 감사 인사를 하카브에게 들을 생각만 해도 혈압이 올랐다.

리카르디스는 성질내며 와인 잔을 크게 기울였다. 몇 번 더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병이 비어 있었다. 취기가 도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던 그의 발길이 테라스에서 우뚝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창을 열고 나가 나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로젤린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쯤 성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한참 더 밖을 바라보다가 몽롱한 기운에 눈이 스르륵 감기려 하자 그때야 발길을 돌렸다. 푹신한 침대에 폭 빠진 몸이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방에 발을 들인 것은 그가 깊게 잠든 후였다. 방 안에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림자에 어두워진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남자를 훑었다. 감고 있는 눈. 달빛에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긴 속눈썹. 하얀 피부. 평소와는 다른 편안한 차림새. 흐트러진 셔츠 자락, 그리고 그 사이의…….

로젤린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느슨하게 풀려 있는 셔츠 안쪽,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자락을 벌렸다. 숨어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잎을 닮은 푸른색.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은 펜던트였다.

그걸 보는 순간 로젤린은 제 가슴이 덜컥 멈춘다고 생각했다. 손이 떨렸다.

[잘 어울려, 아름답다.]

제 목덜미를 만지던 구릿빛 사내가 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만졌던 부분을 지우듯 따라 더듬었다. 서늘한 금속이 만져졌다. 하카브가 청혼을 하며 준 목걸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이 보였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금색의 화려한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로젤린은 어느 정도 자신의 강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강하다고 하는 인간들보다도, 그런 인간들의 합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로젤린은 사절단 일을 겪으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리카르디스를 지키지 못하는 때가 오리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리카르디스를 둘러싼 위협은 단순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던 이때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거대한 집단과의 동맹이 체결되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말 한마디. 좋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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