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올 쯤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클로에에게 선물로 받은 부채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 너머에 월장석 성이 보였다. 레티시아는 거리에 살 것이 있다며 아까 전에 헤어진 터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로젤린뿐이었다.
그녀는 기숙사로 향하다가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헤사였다. 로젤린이 가까이 다가가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에도 고양잇과 맹수들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 기척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러 무게를 실어 소리를 내자, 헤사가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 경.”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헤사는 땅을 짚고 일어섰다. 어린 얼굴에 고뇌가 잔뜩 담겨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 별일은 아닌데요…….”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시선은 마주칠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어두운 수풀을 향했다가, 다시 바닥. 로젤린은 자세를 낮춰 헤사와 눈을 맞췄다.
“무슨 일입니까.”
헤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낮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혹시…… 같이 찾으러 가 주실 수 있나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사는 월장석 성에서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는 성 밖에 위치한 화려한 정원이었다. 등불이 비추는 장식물과 분수대는 낮의 햇살을 받을 때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로젤린이 호오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까지 나왔었군요. 뭘 잃어버렸습니까?”
헤사의 눈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레이몬드에게 선물 받은 자신의 잔을 깨트렸을 때, 또한 서류를 분실했을 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소년은 발치만 바라본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지금처럼.
대체 뭘 잃어버렸기에! 로젤린의 마음에도 슬쩍 걱정이 자리 잡을 때였다. 헤사에게서 돌연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헤사?”
무언가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없었다, 어떤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닌, 목적성 없는 마력은 로젤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더니 갑자기 마력은 왜 사용하는 것일까?
그 순간 로젤린은 정원 저 멀리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의 기척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여기. 헤사와 그녀가 있는 분수대 앞으로.
헤사가 고개를 휙 들어 로젤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채우고 있던 모습과 달랐다. 눈썹을 찌푸리고는 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얘기를 들어 주세요 로젤린 경. 그분은 분명 일라베니아의, 2황자 전하의 적이기는 하지만…….”
로젤린은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벅저벅. 사방에 포진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뜬금없이 소년의 몸을 휘감은 마력. 그것을 기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빤하지 않은가. 마인이라는 뜻이었으며, 로젤린이 알기로 자신과 헤사를 제외한 수많은 마인들의 정체라면…….
“로젤린.”
하카브의 호위들밖에 없었다. 남자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구릿빛의 사내가 두 사람만 있던 장소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분수대를 둘러싼 미로 정원의 수풀 벽 바로 너머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포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카브가 헤사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헤사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배경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젤린 경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대로 말씀드리면 오지 않으실 것 같아서…….”
입술을 짓이기는 행동에서 소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한숨을 푹 쉰 다음에 헤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헤사가 이마를 붙잡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던 소년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먼저 기숙사에 가 있으세요. 나는 조금 있다 갈 테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헤사는 이마를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로젤린이 앞에 있는 하카브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던 건 그림자 진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
헤사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녀를 대단한 명화라도 되는 듯 황홀한 눈빛으로 감상하던 하카브가 움직였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오랜만이다, 로젤린.”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하카브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왔다. 뭘 할지 알 것 같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쯤, 로젤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하카브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하기 싫습니다.”
“그사이 교육을 했나 보군. 치사한 사람들 같으니.”
“일라베니아에서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친밀한 사이가 되면 불필요한 접촉을 해도 괜찮은 건가?”
로젤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도.”
하카브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거 희소식이군.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특별한 용건이 있어. 로젤린.”
하카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거슬려 표정 없이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우선 자세를 바꿀까. 그대의 목이 고생하는 중이니. 이렇게.”
하카브가 몸을 숙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의 상황과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제는 하카브가 로젤린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음, 이거 좀, 느낌이 이상하다. 남자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어때.”
“매우 불편합니다.”
“목이?”
“아뇨. 전하의 행동이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딱 부러지게 교육 잘 시켰군. 그냥 즐기도록 해, 로젤린. 나를 그 위치에서 보는 사람은 힉살라 아돈뿐이다. 병을 앓고 계시니 얼마 뒤에는 아무도 없을 테고.”
로젤린은 열심히 고민하다가 알맞은 답변을 찾아냈다.
“유감입니다.”
하카브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로젤린. 그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아, 네. 기쁘시겠습니다.”
하카브가 잠시 자신의 눈을 덮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흐른 후, 드러난 흑갈색 눈동자는 등불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약간 물기 어린 걸 보니 조금 운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기쁘다. 곧 모두가 나를 이렇게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이, 치가 떨릴 만큼 기뻐. 하지만 로젤린.”
하카브가 대뜸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얼굴 쪽으로 가까이 끌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행까지 벌였다. 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
“아니오? 딱히 원하지 않습니다.”
단조롭던 대답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뭔 소리신지? 라고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아니라는 대답이야 대충 유추했더라도 상대방이 이렇게 헛소리를 들은 듯한 반응을 하니, 하카브도 약간은 상처받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남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고르는 중인 듯했다.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
하카브는 조금 더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단어들은 물러 두었다. 현재 일라베니아 황실 소속의 기사에게 일라베니아 욕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때가 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로젤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걸고 있었다. 하카브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가 리비타에 가면 문을 열어 주신다고.”
하카브가 쿡쿡 웃었다.
“청혼하는 거야. 내가 그대에게.”
청혼? 혼인 전에 남자가 여자에게,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상대의 허락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하카브와 자신의 결혼? 상상도 가지 않을 뿐더러 살짝 불쾌하기까지 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싫다 말하려 했지만 하카브가 말을 덧붙이는 게 빨랐다.
“나는 내 말에 부정하는 답을 듣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로젤린. 그러니 그대에게……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하도록 하지. 그대는 권력이나 재물에 욕심이 있는 부류가 아닌 것 같으니…… 좋아.”
하카브는 말하는 중간중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젤린은 그 만행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뒷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쿵! 머리를 세게 한대 맞은 것 같았다. 하카브는 적이었고, 그녀는 어지간해서는 적을 앞에 두고 제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악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용의 중대함을 체감한 것이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때’와 같은 입 발린 동맹이 아니야 로젤린. 이건 정말…… 나로서도 큰 결심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또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하카브가 로젤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꾹, 한번 누르고 떨어진 입술은 다시 그녀의 손마디에 닿아 더듬듯 천천히 내려왔다.
“그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