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17화 (117/220)

117화.

레티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극배우나 가수가 입을 법한 의상은 화려하다 못해 요란할 정도였다. 노래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 레티시아는 그가 이 환영 행사를 위해 고용된 가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큰뿔산양 후작의 장남, 아렌트였다니. 레티시아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한 가문의 후계자가 왜, 저러고 있어……?

아렌트는 레티시아를 발견하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꽃을 그대로 잡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 싫어. 레티시아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슬그머니 물러났으나,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렌트는 기어코 레티시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만 깜박이고 있던 로젤린도 손뼉을 치며 즐기고 있었다. 적응력이 경이로웠다. 레티시아는 존경의 눈으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아렌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계단에서 내려왔던 여자들이 로젤린을 둘러싸며 춤을 췄다. 장신구의 짤랑이는 소리가 화음에 녹아들었다. 로젤린이 웃으며 그녀들과 함께 춤을 췄다.

“로젤린 경……!”

과연 무예의 기재! 반복된 춤사위를 그새 외우고 완벽하게 추고 계신다. 헤사가 봤으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에 저장했을 광경이었다. 저택의 입구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렸다.

레이몬드는 기분이 고양된 것인지 무릎을 꿇고 이로 만돌린을 연주했다. 훌륭한 솜씨라서 더 어이없었다. 금속 악기가 차르르르 울리며 노래가 끝났다.

“환영합니다, 손님!”

다들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을 덕지덕지 단 채로 박수쳤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레티시아만 빼고. 아렌트가 으하하 웃으며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들 오게, 어서들 와! 오랜만의 손님이라 다들 신났지 뭔가!”

“갑작스런 방문에도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손님은 언제나 반갑지. 오랜만이로군, 로젤린 경. 요만할 때 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아렌트가 제 가슴께에 가상의 선을 그으며 얘기했다. 지금의 로젤린 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수준이었다. 아마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일 적에 봤던 모양이었다.

후에 레이몬드가 말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은, 둘 다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다 보니 제법 자주 만났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사냥 대회에서 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에도 만났다고 했다. 불과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고, 십 대 후반 들어 성장이 멈췄으니 아렌트가 말한 ‘요만한 때’가 마지막일 리 없었다.

아마 그의 기준에서 작달막한 소녀가 쪼르르 돌아다니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이리라 레이몬드는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로젤린과 언제 만나든 번번이 “로젤린 경. 많이 컸군. 요만했었는데.” 하면서 손녀 보는 할아버지같이 굴었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로젤린은 ‘로젤린’이 요만할 때에 그와 만났겠거니 생각하며 아렌트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짙은 나무 색 눈동자에 호의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렌트는 레티시아에게 아까 자신의 순발력이 어땠냐며 물었다.

“손님이 한 명 더 오는 걸 몰라서 화관을 하나만 준비했지 뭔가! 내가 아까 떨어지는 꽃을 공중에서 잡았을 때, 크으… 좀 멋지지 않았나?”

“……네.”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으하하!”

아렌트가 다시 한 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레티시아는 체한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웃었다.

레티시아는 그때서야 떠올렸다. 그녀의 가문인 서리나팔이 변두리의 작은 영지라 미처 접점이 없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큰뿔산양 후작가의 유별난 가풍은 유명했다. 흥도 많고 음악도 좋아하는 집안이라 주기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것은 예사였다.

레티시아는 이곳이 큰뿔산양 영지의 성이 아님에 감사했다. 만약 그곳에 방문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여행길에 올랐던 손님을 붙잡고 장장 세 시간의 축하 공연을 펼쳤다던가. 오싹했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레이몬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래 부르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잠시 사라졌던 아렌트가 화려한 무대의상을 벗고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왔다.

“형, 어디가려고?”

“황성에. 아버지가 점심 전까지 오랬는데 손님이 온대서 기다렸지 뭐냐, 으하하!”

“으하하학, 완전 지각이네!”

안부터 밖까지 아주 쏙 빼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정말 누가 봐도 형제였다. 하인과 하녀들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과 꽃을 치웠다. 작은 조각들이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박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안 뿌리면 되잖아.’

레티시아는 잠시 머리를 쓸다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넘겨 버렸다. 귓가에 꽂힌 한 송이 꽃은, 고민하다가 제복 상의의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넓은 응접실에는 이미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여성, 황금정원의 클로에였다. 레이몬드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볼에 입 맞췄다. 기사단 내에서도 장신인 레이몬드의 품에 클로에가 쏙 들어갔다.

“내 부드러운 우유푸딩.”

“내 달콤한 허니버터캔디.”

“……”

레티시아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상사의 연애는 눈앞에서 보고 싶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처음 보는 농도 짙은 애정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레티시아가 그녀의 눈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클로에는 레이몬드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서와요. 집안이 어수선한 상황이라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네요. 무례를 용서해요.”

레티시아는 오싹했다. 그 대단한 환대 공연이 제대로 맞이한 게 아니었다니. 로젤린이 가볍게 묵례했다.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 양.”

“감사합니다, 영애.”

클로에가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적막에 의문이 들 때쯤 클로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요?”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아까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짓는 클로에의 표정에서 로젤린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쌓아 왔던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성에 있을 당시에 치료에 쓰였던 귀한 약초들은 전부 클로에가 보내 준 것이었다. 입에 쓰고 맛도 없어 슬쩍 버리고 싶었으나, 약과 함께 동봉된 편지를 읽고서는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예쁘고 단정한 필체. 조곤조곤 안부를 묻는 평범한 내용에서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클로에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시피 했더라도.

그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마치 그 편지의 필체와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 같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 테이블 위에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아 보이는 다과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레이몬드는 결혼 준비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결혼식이 코앞임에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보는 약혼녀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몬드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계속 뒤를 돌아봤다. 결국 클로에가 일어서서 뽀뽀도 해 주고 엉덩이도 두드려 줘야 했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로젤린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레티시아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봐도 괜찮은 건가 이거.

클로에가 레이몬드를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로젤린은 쿠키를 먹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았기에 손에 들린 쿠키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클로에 양, 하나만 여쭤 보아도 됩니까?”

“어머, 그럼요.”

“방금 전에 레이몬드 경과 입을 맞춘 것은 어째서인지.”

클로에는 다시 “네?” 하고 되묻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렇게 입을 맞춥니까?”

역시 못 보게 했어야 했는데! 레티시아는 로젤린과 클로에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매끄럽게 대응했다.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상냥함이 비쳤다.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마에 하는 입맞춤도 비슷한 겁니까?”

클로에는 눈을 빛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거리상으로 많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느낌상으로 더 좋은 청중의 태도가 되었다.

“이마에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어요. 누가 경의 이마에 키스했나요?”

레티시아가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 로젤린 경…… 대체 누, 누가…….”

클로에는 눈짓으로 레티시아에게 타박을 줬다. 그래 가지고는 잘도 말하겠다는 식이었다.

로젤린은 방 안의 분위기를 대충 눈치챘다. 하카브 왕자가 볼에 뽀뽀했던 때에도 다들 무척 화내지 않았던가. 지금도 약간 그런 게 아닐까? 대놓고 말하면 혼나거나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로젤린이 머뭇거리자 클로에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재촉하거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로젤린의 마음도 조금씩 풀려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도 이상하게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가진 고민을 죄다 말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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