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 부족했습니다.”
“또한, 몸이 움직이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미묘한 변화를 예상하고 조절하면 좋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헤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검술 훈련이라기보다는…… 마치 암살 훈련?
로젤린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하급 기사로 승급하자마자 훈련 내용을 조금 바꾸었다. 로젤린의 습격을 막는 훈련은 그대로 두되, 그들 또한 로젤린을 공격하는 것으로.
정공법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로젤린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하급 기사의 몸짓은 미묘하게 암살자를 닮아 가는 중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 했던가. 정확하게 아는 만큼 보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 빈틈.”이라던가 “지금이면 죽일 수 있어.” 따위를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공격하기 쉬운 최적의 상황과 때를 깨우쳐 갔다. 무고한 하인 몇 명과 기사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상황이 발생한 후, 두 사람은 무심코 말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헤사 또한 제 선임자들이 그러했듯, 하루에도 몇 번씩 습격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로젤린뿐만 아니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에게도. 하지만 헤사는 예전의 아기 사슴 같던 그들보다는 훨씬 훌륭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공격은 10에 8을 막고, 로젤린의 습격도 높은 수준으로 알아챘다.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했지만.
헤사에게 부족한 부분은 정통 검술이었다. 로젤린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랬다며 그를 위로했다. 기초 검술을 레이몬드에게 배웠다고 하니, 옆에 있던 레이몬드가 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 했다. 마침 지나가던 큰뿔산양 후작이 자신은 선대 후작에게 배웠다고 해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저 기초에 불과한 검술이 몇 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대단한 비법처럼 탈바꿈되었다. 헤사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대 큰뿔산양 후작님께 누가 안 되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후작이 흐뭇해하며 헤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갔다.
이상하게 제 가문이 엮여 버린 레이몬드는 로젤린과 함께 헤사를 열심히 가르쳤다. 덕분에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더 암살 훈련인지 뭔지를 반복하던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훈련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헤사도 덩달아 놀라 로젤린이 챙겨 가야 할 간식 바구니를 잽싸게 챙겼다.
“다녀오세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소년은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조용해졌다. 헤사는 뻑뻑한 눈을 몇 번 비비고, 여기저기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팔을 위로 쭉 늘렸다.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정을 몇 주간 반복하다보니 피로가 축적된 듯했다.
‘아!’
주방에 잼을 졸여 둔다 올려놓고는 깜박했다! 헤사는 황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헤사는 빠르게 업무를 익혔다. 로젤린에게 맡겨진 일부터 시작해, 그녀의 머리 모양을 어떻게 다양하게 예쁘게 할 것인가에 이르는 소소한 일까지.
꽉꽉 짜인 하루 24시간 중 뺄 수 있는 시간은 수면 시간뿐이었으니, 최근 줄어든 잠과 반대로 실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선물한 찻잔을 깨트리기도 했고,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려 그녀의 상심한 표정을 보기도 했다.
이번 잼을 졸일 때에도 로젤린이 뒤에서 서성이면서 기대하는 티를 팍팍 냈는데, 이것마저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젤린이 울상을 지으며 탄 밑 부분은 그대로 두고 위의 잼을 떠먹으려는 장면이 연상되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헤사는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발타에서 온 사절단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는 손님들이 머무는 성과 한참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력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족쇄가 끊긴 것처럼 가벼워져, 바닥을 딛는 간격이 넓어지고 빨라졌다. 돌아서 가야 하는 길도 벽을 타고 훌쩍 넘었다.
바닥에 착지해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순간. 헤사는 바로 뒤에서 덮칠 듯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으나 그보다도 뒤에 있던 사람이 헤사를 찍어 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퍽!
얼굴이 바닥에 세게 부딪혀 머리가 울렸다. 입이 가려지고 뒷목을 잡힌 채 짓눌렸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식은땀부터 흘렀다. 떨고 있던 헤사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저벅. 누군가가 가까이 걸어왔다. 얼굴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헤사는 자갈 위를 기어가는 개미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코앞에 신발이 보였다. 일라베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니었다.
“이런, 놀랐나 보구나.”
자상한 목소리였다.
“풀어주어라, 아순.”
등 뒤에서 압박하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헤사는 덜덜 떨며 바닥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황금빛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악!”
하카브가 헤사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불쑥 일으키자 소년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얼굴이 조금 상했구나. 괜찮느냐.”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칠게 다뤄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놀라서 말이지.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보게 될 줄이야.”
하카브는 헤사가 친한 동생이라도 되는 듯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볼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헤사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깜박 거리기만 했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나쁜 놈, 죽일 놈, 무서운 놈이라는 평가와 대비되는 행동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긴가민가했다.
“어린아이가 고생 많이 했겠구나, 이곳은 마인들에게 사나운 곳이니 말이다.”
사탕이라도 주며 꾀어낼 것 같은 상냥한 말에 헤사는…….
‘무슨 헛짓거리지?’
전혀 넘어가지는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보다 웃으며 접근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헤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년의 경계를 읽은 하카브가 씩 웃었다.
“우선적으로 할 얘기부터 해 볼까……. 헤사 군.”
알려 준 적 없던 이름이 낯선 이의 입에서 나왔다. 헤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오늘은 수도에 있는 큰뿔산양 후작의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창문을 열어 두니 마차 안으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왔다. 로젤린은 창문 턱에 팔을 건 채 밖을 구경했다.
기분 좋아 콧노래를 부르니 레이몬드가 엉망진창인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사슴 고기 스튜, 버터크림 샌드위치, 과일 소스 스테이크, 어쩌고저쩌고. 음식의 이름을 나열했을 뿐인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실력 덕분에 훌륭하기까지 했다. 마차는 엉터리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덜컹이며 달렸다.
큰뿔산양의 저택은 웅장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고풍스러운 감은 있어도 세심하게 관리되어 도리어 그게 멋스러웠다. 그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분수와 화단이 촌스럽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을 반기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저택을 떠올렸다. 정말 구색만 맞춘, 큰 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큰뿔산양 저택이 예뻐 부러웠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이 구경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아니 신나서 그녀를 끌고 다니며 설명했다.
중앙에 큰뿔산양 동상이 하나 있는데, 뿔 한쪽만 새것이었다. 이거 내가 어릴 적에 타다가 부러트려서 이 부분만 새로 해서 붙였잖아. 하고 레이몬드가 낄낄거렸다. 로젤린도 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안 됩니다.” 하고 정색했다. 레이몬드도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나서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미련이 남은 듯 큰뿔산양 동상을 주시하는 로젤린은 두 남녀에게 질질 끌려갔다.
집사와 하녀장, 하녀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큰뿔산양 후작가는 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역사가 깊은 후작가에 어울리는 점잖은 태도였다.
펑!
레티시아는 감탄하다가 갑자기 터진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꽃잎과 종이 조각이 2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레티시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꽃비를 아연하게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1층으로 옮겨 왔다.
아까까지 점잖게 두 손을 앞에서 모으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박자를 쪼개는 금속 악기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몸을 들썩이고 머리를 휘둘러 가며 격렬하게 연주했다. 광란의 음악 연주회 한가운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저 위의 계단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내려왔다. 레이몬드와 꼭 닮은 남자였다.
노래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복식을 한 여자와 남자들이 화음을 쌓으며 등장했다. 눈 감는 것 하나, 팔을 뻗는 동작 하나하나가 똑같은 것으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로젤린에게 화관을 걸었다.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레, 레이몬드 부관님.”
레티시아가 애타게 상사를 찾았다.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좀 어떻게 해 보라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었다. 종이 조각과 꽃잎으로 시야가 어지럽고, 가득 찬 악기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었다. 한참 둘러보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레이몬드는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신나게 연주 중이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아, 우리 형.”
전혀 알아채지 못했구나. 레티시아는 탄식했다. 누군지 궁금했던 게 아니라, 아니. 누구라고? 우리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