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칼릭스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 자신과 제 누이가 라고슈에 가는 일도, 또한 그녀가 다시 일라베니아에 방문하는 일도. 너무 멀어 희미해 보이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 긴 흐름 속에 딤라는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로젤린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칼릭스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두 남매의 이마가 꽉 잡은 딤라의 손에 닿았다. 딤라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남매의 볼에 한 번씩 키스를 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거라. 이것도 유언이다.”
“예.”
“……예.”
“밥은 세 그릇씩 다 비우고, 고기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이것도 유언이다.”
“예, 잘 먹습니다!”
“…….”
라고슈의 사절단이 떠났다는 얘기는 금세 퍼졌다. 남의 축제에 찾아와 놓고 즐기지도, 축하하지도 않고 떠난 그들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인 황제가 조용한 데다가, 내전이 종식되었다고는 해도 혼란은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중심을 잡아 줄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좀 늦게 방문해서 건국일에 맞추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문점도 물론 제기 되었다. 설마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축하해 줄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물어보지 않았고 답을 들어 보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정신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급하게 라고슈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 말은 무수했다.
물론 딤라는 부러 건국일을 피해서 온 게 맞았다. 누구 좋으라고.
14
뜨끈한 입술의 감촉이 볼 위에 오래 머물렀다. 실제로는 이 초 가량이었으나 엘피디오는 그에 배가 넘는 시간이라 느꼈다. 참아 보려 해도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마치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이 찧은 사람 같은, 짜증과 고통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하카브는 그런 얼굴을 보고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하카브 왕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엘피디오 황자.”
리카르디스보다도 생생한 반응이라 재밌었다. 엘피디오의 석영 성. 그 화려한 응접실에 두 나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무투 대회는 어떠셨습니까?”
“말로만 듣던 일라베니아의 무투 대회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잠도 설쳤습니다. 과연 부족한 수면이 불만스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들이었습니다.”
하카브의 반짝이는 눈은 엘피디오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경기의 내용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엘피디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마지막 결승전만 아니라면 훌륭한 경기가 많았다. 로젤린의 존재 때문에 참가자들 대다수가 검증된 강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무투 대회의 수준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결승전 후, 황제에게 검을 하사 받는 로젤린의 모습은 무척이나 멋졌다. 엘피디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독수리가 경기장을 둥글게 휘젓고 바람을 일으켰다. 이델라브힘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위엄 어린 등장이었다. 기분 좋아진 황제가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
엘피디오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카브는 조용히 분노를 곱씹고 있는 엘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과 얼굴에 욕망이 비쳤다. 욕망 또한 생각의 일부. 이렇게 생각을 내보이는 자가 쉽지 않을 리 없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로젤린 경의 무위는 말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눈으로 보니 더욱 대단하더군요. 일라베니아 제국의 미래가 환하게 빛나는 걸 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 이 자리에 다른 누가 있다고 이렇게 금칠 중인거지? 엘피디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쪽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엘피디오는 기어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 그대로 아쉬운 쪽은 하카브가 아니라 엘피디오였다.
“발타의 사절단 일로 큰 사고를 당한 내…… 동생. 리카르디스가 최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어 형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근심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군요. 검은달이 언제쯤 다시 뜰는지…….”
그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카브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탕하게 웃던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였다.
“검은달이라…… 그들도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강대한 마인이 일라베니아에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한 것 같더군요. 하하, 같은 일라베니아 사람들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요. 그래도 그렇게 철저하게 숨긴 덕에,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난 듯합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엘피디오가 이를 갈았다. 네 정보가 부족한 탓이 아니냐. 네 옆집에 마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뭐 했느냐 타박을 받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셨지요. 그러나 습격대를 물리쳤다고는 해도, 검은달은 건재하지 않습니까. 치밀하고 끈질긴 집단이니 고작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황자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크나큰 일을 벌인 자들인 것을요. 그게 실패로 돌아간 이상, 당분간은 정황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닐까요. 대륙의 모든 눈과 귀가 검은달을 주목하고 있을 테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제 살만 깎아 먹는 꼴이 되리란 걸 알겠지요. 그들의 우두머리도 머리를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는 머리가 없구나. 엘피디오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이 시기에는 타국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괜히 염려되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기회! 하하. 좋은 말입니다.”
일라베니아까지 기어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 보라는 말에 엉뚱한 반응이 나왔다. 엘피디오가 미간을 좁혔다.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하카브는 기회! 기회.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찰랑이는 금빛 장신구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욕망이 일렁였다. 엘피디오가 의문을 가질 정도의 적나라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황자.”
하카브는 엘피디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탁자 언저리에 맴돌았다. 하카브가 느릿하게 제 턱을 쓸었다.
“저는 기회를 얻으러 온 겁니다.”
하카브의 눈이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경기 모습을 그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 * *
“아름다우세요.”
거울 속의 로젤린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헤사가 작은 거울을 들고 와 뒷모습도 비쳐 주었다. 머리카락이 머리 뒤통수에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사이사이 땋은 머리들이 같이 묶여 있는 게 멋스러웠다.
오늘의 머리도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도 제 머리에 철썩 맞지 않을 것이다. 로젤린이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헤사도 웃으며 끄덕였다.
헤사가 온 이후로 로젤린의 머리 모양은 다양해졌다. 땋기도 하고, 가르마를 바꾸기도 하고, 반 묶음을 해 보기도 하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와 머리를 펴기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녀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업무며, 검술이며, 성에서의 생활이며 배울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는지.
피로한 소년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은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피곤함도 싹 잊은 듯이 행복하게 웃었다.
지켜보던 레티시아가 감탄했다.
“나보다 솜씨가 훌륭해.”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서요.”
레티시아가 손을 내밀자 해사가 짝 소리 나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선임 두 명과 헤사는 처음보다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 하급 기사가 된 두 명은 괜한 텃세 따위를 부리지 않으며 동생처럼 그를 대했다. 로젤린 이외의 사람에게는 벽을 세우던 헤사도 점차 딱딱함을 허물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에버하르트와는 티격태격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귀여운 장난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하 웃던 레티시아가 무섭게 표정을 바꿨다. 손에는 소매에 가려져 있던 뭉툭한 나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로젤린의 목덜미를 향해 나무 단검이 쇄도했다.
로젤린은 고개만 까딱해서 뒤에서 오는 공격을 피했다.
레티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려찍었다. 어깨 쪽이었다. 로젤린은 휙 몸을 돌려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바깥쪽으로 크게 돌렸다.
“악!”
근육의 뒤틀림을 따라 레티시아의 몸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완전하게 등을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어진 나무 단검을 낚아채, 그녀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레티시아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졌습니다.”
풀려난 레티시아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거울 앞에 있는데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 보이는데.”
“설마 거울을 앞에 두고 공격하겠냐는 허를 찔러 보려 했습니다만…….”
“안 하는 게 좋겠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녀를 거울 앞에 앉혀, 위치가 뒤바뀐 상태로 아까의 상황을 재현했다.
“이렇게 하면 보이니까.”
로젤린이 레티시아의 뒤로 숨었다. 거울에 얼굴은 비치지만 몸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이 상태로 찔러야 효과가 있을 거고.”
그녀가 나무 단검으로 레티시아의 공격을 그대로 흉내 냈다.
“팔이 움직이는 게 보여 경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른손보다는, 왼손으로.”
왼손이 은밀하게 레티시아의 목 뒤를 찔렀다. 거울로 보아도 완전한 사각이었다.
“그리고 레티시아 경은 말을 끝낸 후에 공격을 하셨는데 좋지 않습니다. 웃음이 끊기는 지점, 말이 끊기는 지점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딱 좋으니, 기왕이면 말을 하는 도중 시도하는 편이 성공률이 높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