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14화 (114/220)

114화.

“로젤린! 요 예쁜 것! 역시 내 제자야!”

레이몬드가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올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재밌어.”

발이 붕 뜨는 감각이 즐거웠다. 로젤린이 재밌다고 하자 레이몬드가 “그럼 한 번 더!” 하고 뱅글뱅글 돌렸다. 다들 로젤린의 발에 맞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거나 도망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레이몬드를 욕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는 로젤린에게 단련된 탓인지 갑작스러운 공격을 능숙하게 피했다. 과연 내 제자들. 틈을 타 로젤린이 흐뭇해했다.

“로젤린 경!”

여기저기에서 그녀를 불렀다.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경기 멋있었다! 등을 퍽퍽 두드리는 섬세하지 못한 손길이 쏟아졌다.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헹가래를 했다가, 볼을 꼬집기도 하고. 정신이 아주 쏙 빠질 정도였다.

로젤린의 머리 위로 샴페인이 쏟아졌다. 범인은 파르딕트였다. 좋다고 웃고 있던 그는 레이몬드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헤사와 칼릭스도 매섭게 파르딕트를 노려봤다. 수건을 들고 와서 로젤린의 머리를 닦았지만 곧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장난기 넘치는 기사들이 마구 술을 뿌려 대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젖고 바보처럼 으허허 웃어 댔다. 다 큰 남자들이 취해서 휘청거렸다. 로젤린이 오기도 전에 일차적으로 술판이 벌어진 탓이었다.

“마르틴 경도 강하지만 역시 로젤린 경이지.”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제일 강합니다.”

그녀가 하면 잘난 척도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잠시 들어왔다가 술 냄새 나는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질색했다.

“이 미친 인간들!”

다들 우헤헤헤 웃는 꼴이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잇세리온은 급하게 돌아 나가려 했지만, 곧 산만 한 기사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샴페인 마사지를 받아야만 했다. 잇세리온의 친 동생인 르원이 주도적으로 했기에 모두들 마음 놓고 부었다. 로젤린도 소심하게 한 컵 분량을 계량해서 동참했다.

“로젤린.”

“응.”

“잘했어. 멋있었어.”

레이몬드가 바보처럼 웃었다. 로젤린은 그로부터 꽃목걸이와 샴페인 한 병을 받았다. 목걸이도 걸고, 샴페인도 터트렸다. 뻥! 소리가 나며 거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로젤린이 그 샴페인을 제 머리 위에 뿌리며 눈을 감았다. 뜨겁던 머리가 식어 갔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이 바닥을 뒹굴고 술에 흠뻑 젖었다. 취한 남자들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화려한 검집을 밟고 차고 다녔다. 로젤린도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흥이 오른 남자들이 윗옷을 벗었다.

“넌 안 돼.”

레이몬드가 경고했다. 칼릭스도 문득 불안한지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자리를 준비해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로젤린과 마르틴의 경기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파르딕트가 잇세리온을 이겼다. 고래와 토끼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가 이겼군요, 수석 비서관님!”

“당연히 그러시겠지!”

억지로 팔씨름을 다섯 번을 더 해야만 했던 잇세리온의 말이었다. 로젤린이 아하하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에게 팔씨름 신청을 받고 다시 버럭 화냈다.

“제가 그걸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이 상황이 웃겨서 까르륵하며 반쯤 넘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상급 기사들이 잇세리온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질척거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어느새 고양이 한 마리가 대기실에 들어와 바닥에 흘려진 샴페인을 할짝거렸다.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다른 기사들 모르게 한 병을 슬쩍 숨겨 두었다.

그때, 누군가가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모두 웃고 즐기는 와중에도 경계를 놓지 않고 있었기에 작은 소리를 포착해 내었다. 상체 탈의 후 근육을 자랑하던 파르딕트가 문을 열었다.

“억!”

그러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거구로 가려져 열린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으나 무언가를 직감할 수 있게 하는 반응이었다. 남자들이 벗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런……. 좋은 때를 방해하였구나.”

오랜 세월을 보내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기사들은 방문자의 정체를 깨닫고 미친 듯이 몸단장을 했다.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파르딕트면 족했다.

로젤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폴짝 내려왔다. 파르딕트는 여전히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로젤린이 그의 등짝을 찰싹 쳤다.

“비켜, 파르파르.”

그래도 비키지 않아서 쭉 밀어내야 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마주친 딤라와 관디테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이페렘! 섭정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던 관디테가 얼굴 표정을 겨우 가다듬고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우승을 축하한다 로젤린 경. 멋진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노라.”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딤라가 쯧 혀를 차면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왜 이렇게 젖었니. 찬기 들면 어쩌려고. 일라베니아의 축하 행사는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로젤린에게 샴페인을 끼얹은 기사들이 쥐죽은 듯 침묵만 지켰다. 칼릭스가 웃음소리를 내며 문가로 다가왔다.

“섭정관. 일라베니아의 풍습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 특유의 행사가 아닐는지.”

아니, 저, 저 인간이? 잇세리온이 뒤에서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딤라와 관디테, 로젤린과 칼릭스는 자리를 옮겨 한적한 복도 중앙에 멈춰 섰다. 딤라는 그새 구해 온 천으로 그녀를 둘둘 말았다. 로젤린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에 좋은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칼릭스와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같은 남매의 표정에 관디테가 웃었다.

“일라베니아를 떠나십니까?”

“그래. 더 빨리 떠나야 했지만, 갈라·제르타예의 아이가 큰 무대에서 활약한다는데, 그것은 보고 가야겠다 싶어 오늘까지 미루었지.”

이 시기에 일라베니아에 들리는 이유는 대개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투 대회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며, 건국일은 한참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플로에토를 끌어내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바이페렘께서 발타의 왕자가 아직 라고슈 내에 세력을 남겨 둔 느낌이라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 얘기가 아니더라도 남의 축제가 아닌 나의 상처를 돌봐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아직 여독이 쌓여 있으실 텐데……. 긴 여행길이 귀한 분의 몸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칼릭스가 걱정스레 딤라와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신관들을 부지런히 불러 여기저기를 손보았단다. 엄살을 피웠더니 멈추지 못하고 성력을 퍼붓다가 한 놈은 쓰러지기까지 했지 뭐냐. 덕분에 몸도 기분도 좋아졌구나.”

딤라는 악당같이 웃었다. 아, 며칠 성에서 나오지 않으시더니,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였던 것인가. 칼릭스는 안심도 되고, 웃기기도 해서 웃음을 흘렸다.

딤라가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손 가죽이 두텁고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훌륭한 전사의 손이야.”

“네. 오늘도 멋있게 이겼습니다.”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제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10살 먹은 관디테는 혼자 밖에 내보낼 수 있으나, 로젤린은 절대 혼자 내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일정을 바꿔야 하나 싶을 정도의 불안함은, 로젤린 전에 만나고 온 리카르디스를 떠올리고 나서야 가라앉게 되었다.

하얀 아기 새 때문에 잠깐 흐트러졌던 남자의 본 모습은 라고슈의 고요하게 눈 내리는 밤처럼 위험했다. 애초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 또한, 로젤린과 관련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외가의 힘이 강하지 못했으나 본인의 능력만으로 1황자 엘피디오와 비등한 세력을 거느리게 된 2황자 리카르디스. 명석한 머리, 시류를 읽는 눈과 귀, 처세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함, 죽음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온 운까지.

여러 가지가 뒷받침 되었으나 지금 리카르디스의 위치는 그러한 능력만으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집념과 악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현재 대륙에서 존재하는 사람 중 가장 성력이 강한 것 또한 그의 무기일 뿐,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칼날처럼 위험하고 날카로운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위험이 다가왔을 때, 또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때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 사내가 로젤린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보았으니, 로젤린의 위험이 리카르디스로 인한 것일지라도 어딘가 마음이 든든해지기는 했다.

“수많은 위험과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이 손으로 해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

딤라는 남은 한쪽 손으로 칼릭스의 손도 잡았다.

“칼릭스. 로젤린.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아.”

“예, 할머님.”

“예.”

“제르타예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어떠한 짙은 어둠도 밝히고, 세차게 불어오는 눈 폭풍 속에서도 영원하며, 흔들리고 작아질지언정 결국에는 다시 불타오른다. 너희들은 따뜻한 곳에서 자라났으나, 품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믿는다.”

딤라가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을 주었다. 주름진 손, 굽은 어깨. 작은 노인이었건만, 손아귀 힘에 손끝이 저릴 정도였다.

“이것이 내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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