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13화 (113/220)

113화.

‘로젤린. 우승 축하한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지만 로젤린은 알아들은 듯했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얼굴 표정이 스르륵 풀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 라이노는 그나마 덜 사나워진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말을 편안하게 걸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황제 폐하를…… 훌륭한 경기였다. 건국의 달을 맞이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꽃과 꽃잎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제가 로젤린에게 검을 하사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였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가장 높이 계신 위대한 분. 황제 폐하께 이 자리를 바칠 수 기회가 오다니…….”

[이쯤에서 목멘 듯이 목소리를 좀 떨어 주면 돼.]

[목멘 목소리는 뭐야.]

[……목을…… 조른 것 같은 목소리?]

목멘 목소리가 졸지에 목을 맨 목소리로 둔갑해 버렸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둘은 열심히 토론했다. 마지막에는 목 아래를 꾹 눌렀을 때 답답한 그 느낌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합의를 봤다.

“붉은수레바퀴의 오랜 이름에도, 또한 보잘 것 없는 로젤린이라는 이름에도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쯤에서는 눈물을 약간 글썽인다.]

[눈물이 안 나면.]

[눈 오래 뜨고 있으면…… 될…… 걸?]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빨개지는 정도까지는 해냈다. 황제는 흐뭇하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에게.”

[말을 한번 더듬는다.]

[공적인 자리에서 왜 실수를?]

[……그런 약은 수가 필요할 때도 있단다, 로젤린…….]

“죽음의 위기가 저를 휘두를 지라도,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한 초석이었다면. 수 천 번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또 다시. 몇 번이고. 죽음을 넘어서라도.”

[<입술을 파르르 떤다> 별표.]

“아름다운 일라베니아.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 울타리와 방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빛나고 날카로운 황제 폐하의 검이 될 자의 이름입니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뜬다. 강렬한 눈빛> 밑줄 쫙.]

[강렬한 눈빛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래, 그거야! 잘하네]

그때 당시 로젤린은 그냥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고난 강렬한 눈빛에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모두가 칭송한 강한 무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황제는 흡족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붉은수레바퀴로구나!”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하늘 높이 치켜 세웠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로젤린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단하고 힘이 넘치지만, 은은한 부드러움이 날카로움을 상쇄시켰다. 관중들이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일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춰 같이 외쳤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꽃이 끊이지 않고 뿌려졌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삐이익---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그리고 하얀밤 기사단원들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마구 헤매었다. 사람들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휙휙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관중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 저기!”

독수리다! 누군가가 말하자 관중석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경기장 위로 높게 날아다니던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관중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묘기를 보였다. 와아아! 비명인지 환호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경기장 내부를 멋지게 휘젓던 독수리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하강했다.

그 독수리 또한 로젤린만큼이나 유명인사라, 얼음창 기사단원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고 구경했다. 독수리는 중앙에 와서 느릿하게 날갯짓했다. 휘잉. 휘잉.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눈을 빛내던 거대한 맹금류가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천천히 내려앉았다. 황제가 혼이 쏙 나간 얼굴로 독수리와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폐하의 곁에 머무시니 일라베니아는 영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로젤린도 은근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마카롱의 깜짝 이벤트인 모양인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제 주인이랑 똑같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율이 일 정도의 광경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 선명한 햇빛 아래 그의 영광을 노래하던 때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 높은 곳의 이델라브힘이 땅 아래를 굽어 살피는 것만 같았다.

일라베니아가 영원하리라는 승리자의 의례적인 말이 무한한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독수리의 날갯짓을 본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신의 이름과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는 말이었다. 그네들이 불길하다 박해하던 마인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모두 열기에 취해 있었다. 정말 망각이라도 한 듯이. 그 어떤 승리의 순간보다 무투회장은 크게 진동했다. 웅웅, 공간을 울리는 수백의 목소리는 사람들 마음 안쪽 깊은 곳의 무언가를 타오르게 했다. 황제 또한 분위기에 심취하여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외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거대한 공간, 군중의 목소리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채 바라보았다. 미소 띤 얼굴은 그 아래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충 마무리는 되었나.’

황제는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져 가는 로젤린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젤린이 보여 주기식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은 채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대게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황제도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꽃잎들 사이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군중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황제를 흘끗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러고는 하사받은 검을 슬쩍 가리키고, 리카르디스를 콕 집어 가리키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자신에게 영광을 바치겠다는 말일 것이다. 눈에 안 띄려 작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그렇게 웃는 건지 이해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마지막에는 빙그레 웃었다.

함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마카롱이 다시 날아올라 회장을 휘저었다. 로젤린은 비행 궤적을 눈으로 그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황제가 걸어왔던 통로. 그늘진 내부는 밖의 환희가 닿지 않는 듯 차가워 보였다.

그 속에 태양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도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남자가 서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누군지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익숙한 남자가 낯설었다.

사랑스러운 디에즈, 상냥한 디에즈. 모두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과 장면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이 순간에? 어째서?

“영광의 일라베니아!”

사람들이 환성과 꽃잎이 널리 퍼질수록 디에즈의 얼굴은 무섭게 구겨졌다. 칼날같이 서늘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양처럼 뜨겁게 일렁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눈물에 차갑게 굳어 가는 듯 보였다.

어째서? 멀리 있어서 묻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옆에 있었다고 한들 묻지 못했을 것이다. 디에즈 전하, 당신은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비참하다는 듯 울고 있습니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디에즈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에 놀라지도,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젤린과 빤히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 * *

로젤린은 꽃비가 내리는 공간을 벗어났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는 어두웠다.

그녀는 방금 목격했던 장면을 몇 번이고 반추했다. 환하게 웃는 디에즈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모습까지. 속이 쓰려 왔다.

디에즈의 눈동자는 그의 친부, 제국의 황제 라이노와 환성이 가득 차 있던 공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황제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라도, 그 공간의 환성이 다르게 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자신 또한 황제와 대면했을 당시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막연한 거부감. 일라베니아 황성을 처음 봤던 순간에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것 같았다. 황제가 리카르디스의 적이라는, 로젤린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유만으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주로 명확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화가 나면 화가 나고, 리카르디스가 예쁠 때는 벅차오른다. 그랬기에 로젤린은 자신이 대단히 이성적이라 판단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지도 못하고, 크게 겪어 본 적도 없는 감정이 제 집 마냥 속에 들어와 있으니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복잡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헤허헉!”

저 멀리 보이는 대기실에서부터 복도 끝까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졌다. 웃음소리와 괴성이 섞인 흥겨운 소리였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잠시 인지하지 못했던 듯했다. 로젤린은 어두운 복도를 후다닥 달려 방문을 열었다. 빛이 확 쏟아졌다.

“로젤린 경!”

칼릭스, 레이몬드, 파르딕트, 르원, 슈텐, 네스터, 바스티안, 클로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까지. 하얀밤 기사단원 중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사람만 빼고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넓은 대기실이 거구의 기사들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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