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12화 (112/220)

112화.

“기사단장님이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스타스 경이 매우 현명했군. 알겠다.”

두 사람이 몇 발짝 멀어졌다. 진행자는 참가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옆에서 벌벌 떨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이 울렸다. 충돌은 없었다.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만 일어났다. 마르틴과 로젤린이 대치 상태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침만 삼켰다.

로젤린이 자세를 낮췄다. 격돌 전, 마르틴은 그녀의 기세를 읽고 몸 앞에 검을 세워 방어 했다. 캉!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의 검을 막은 마르틴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거대한 짐승에게 치인 것 같은 궤도였다.

마르틴은 금속 가루가 탁탁 튀어 오르며 빛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가운데 그녀의 인영만 다른 시간을 걷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촤아악, 마르틴의 부츠가 바닥을 긁었다. 잽싸게 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덕에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한 발자국 뒤에 경기장의 끝이 있었다. 경험이 빛을 발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용했다. 아직까지도 충격에 손과 검이 징징 떨렸다. 이것이 그녀의 힘? 대단했다. 굉장하다! 마르틴이 웃었다. 그가 쏜살같이 대전자를 향했다. 로젤린도 한걸음 나아갔다.

챙!

두 번째 충돌이었다. 마르틴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재빨랐다. 로젤린이 평가해도 그 정도였으니, 인간으로 친다면 최상급이었다.

왼쪽, 오른쪽, 허리, 심장, 다리. 굵은 혈관이 있는 지점을 날카롭게 베어 내려 했으나 그 어떤 공격도 그녀를 스치지 못했다.

45초. 로젤린의 대전자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르틴은 방금 그 시간을 넘어섰다. 공방은 생각보다도 지속되었다. 적당히 하라는 스타스의 경고를 잊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검을 나누고 있는 이 시간이 순수하게 즐거웠다. 마르틴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근육의 질은 훌륭하고, 체격이 너무 크지 않아 검도 재빨랐다. 남성의 이점을 챙겨 일격, 일격이 가볍지만도 않았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겨루고 있지는 않았으나, 수습 기사들과의 대련처럼 완전 봐주는 것도 아니라 좀 신이 났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마르틴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검의 간격 안쪽, 마르틴의 품이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로젤린은 남자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순식간이었다.

“항복하시겠습니까?”

마르틴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작 오 분도 안 되는 새에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마르틴은 씩 웃더니,

“한번만 봐주지 않겠나?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데.”

라고 했다.

어, 의외의 반응인걸. 보통 이러면 졌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진행자가 승리자를 외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 보통 이쯤에는 졌다고 하던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봐달라고 하고, 알아서 봐준 다음에 2차전을 준비하는 지금의 상황을 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관중석도 술렁였다.

두 사람이 다시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곧 빠져들어 관전했다.

마르틴은 몇 번이나 한번만 더 봐달라고 했으며, 로젤린은 몇 번이나 그 제안을 승낙했다. 심지어는 검을 제외한 박투도 실행되었고, 달리기 시합과 팔씨름까지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행자의 얼굴이 볼 만했다. 딱히 팔씨름을 하지 말라 규정되어 있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다.

결승전, 우승자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 소속)

대전 시간, 1시간 13분 29초 (대전자 마르틴이 허벅지 씨름 후, 근육 경련으로 항복)

* * *

리카르디스는 힐끔 눈알만 굴려 옆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유례없이 이상한 결승전을 목격한 황제의 표정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허벅지 씨름은 그래도 좀 버티는 것 같더니, 아깝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못해 굉장히 즐기기까지 한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눈웃음 지으며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로젤린 경이야 마력이라는 수단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치더라도, 마르틴 경은 정말 훌륭하군요. 역시 폐하의 호위 기사답습니다.”

기분 좋은 듯 허허 웃는 황제를 보며 리카르디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음창의 부단장이 무투 대회에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얼음창은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집단이었다. 로젤린이 승리하는 경우 황제의 심사가 크게 뒤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행히 경기 내용이 이상하게 튀는 덕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상황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리카르디스, 엘피디오마저도 넋을 빼놓고 관전했다. 반복 달리기 시합을 할 때에는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사람들 다 모여 있는데, 경기가 이게 뭡니까.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겠습니다.”

입 벌리고 볼 때는 언제고, 엘피디오가 정신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황제의 제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하, 비약이 심하시군요 형님. 일라베니아 황실의 권위가 고작 기사 두 명 때문에 흔들리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마르틴 경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많은 자들을요. 더군다나 무투 대회에서 만나는 참가자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두 사람은 검으로 얘기하고 땀으로 우정을 쌓았습니다. 건국제의 흥을 돋운다는 그 취지에 적합한 경기가 아니었습니까, 폐하?”

“그렇지, 그렇지. 다들 즐거워하니 되었다.”

엘피디오가 그게 뭔 개소리야. 라는 눈빛으로 리카르디스를 흘겨보았다. 입에서 흐르는 게 말인지 유수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르르 웃었다. 엘피디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피디오와 리카르디스가 기싸움 하는 광경은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디에즈는 어린 황녀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젤린 경은 팔굽혀펴기를 몇 개 쯤 더 하실 수 있을까요, 오라버니? 백 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정말요. 정말 대단하네요. 혹시 저를 목마 태워 주실 수도 있을까요? 저 요즘 무거워졌는데. 로젤린 경은 힘이 세니까 되지 않을까? 나눠받는 말들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하인들이 분주히 경기장을 치웠다. 곧 우승자를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나설 차례였다.

“감개무량합니다 폐하. 황실의 기사가 우승하는 것이야 자주 있던 일이었으나, 이번은 더욱 그 승리가 크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을 지닌 자가 승리하였으나, 그녀는 붉은수레바퀴.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의 충실한 기사입니다.”

리카르디스의 큰 재주 중 하나였다. 헛소리, 빤한 아부를 굉장히 진정성 있게 들리게 하는 능력. 클로에는 “전하의 호소력은 얼굴에서 나와요. 정말로.”라고 말했는데, 본인은 긴가민가 하는 기색이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완전 취해 버린 듯했다.

“마인을 품으시는 폐하의 자비로우심이 진정 하늘에 닿으셨는지요? 만백성이 칭송하며 우러러볼 위대한 업적입니다.”

황제는 감동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도 생긋 웃으며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챙. 유리가 울리는 소리가 청명하고 즐거웠다. 슬쩍 돌아보니 라헤안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막고 있었다.

‘형 비위도 참 좋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안 보는 사이 청포도 한 알을 뜯어 그에게 콱 던졌다. 라헤안시가 재주 좋게 입으로 받아먹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황제만 경기장에 내려가야 했지만, 과하게 흡족해 버린 탓인지 리카르디스도 같이 대동했다.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횃불로 밝혀진 몇 개의 복도를 지나쳤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황제는 양옆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과, 얼음창 기사단을 지나쳐 경기장 중앙에 있는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관중석에 있던 자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 일라베니아의 통치자. 대륙의 주인. 황제의 등장이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한 시간이건, 하루건 간에.

정적이 깔린 경배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부글부글 끓는 욕망이 느껴졌다.

가장 좋은 걸 먹고, 가장 좋을 것을 입고,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자는 배부를 줄을 몰랐다. 언제나 목말라했다. 그 끝 모를 갈증이야 말로 그를 황제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황제 라이노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자의 위에 서 있겠다는 음습한 욕망은 아름다운 권좌와 함께 대물림 되었으므로.

리카르디스가 볼 때에는 이성적인 척하는 반 미치광이였다. 가장 고상한 척하는 미친놈이 권좌에 앉아 있다. 하지만 권좌에 앉았던 자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니. 그렇다면 전후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미친놈들이 권좌에 앉은 게 아니라, 권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신의 이름으로 빛나는 그 자리가 정녕?

“고개를 들라.”

근엄한 목소리에 로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확실하게 티가 났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그 로젤린이?

황제는 사나운 그녀의 인상에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없으니 웃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