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사귀자고 먼저 말한 사람도 레이몬드고, 먼저 청혼한 사람도 레이몬드예요.”
“혹시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라도 있습니까?”
“어머? 설마요. 정말 재밌는 분이라니깐.”
말을 말자.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옮겼다.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하는 로젤린이 보였다. 가까운 관중석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자리 싸움에 져서 무력하게 밀려나 있었다. 승리자들은 그 남자 군단의 반이나 될까 싶은 가느다란 아가씨들이었다. 다들 손수건과 꽃다발 따위를 로젤린에게 내밀고자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상태였다.
“로젤린 경! 여기 한번만 봐 주세요!”
“경! 제 손수건을 받아 주세요!”
“로젤린 경!”
여자들에게서 전운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맹수들의 격돌 같았다. 그리고 난간은 맹수들의 거친 싸움을 버텨 낼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난간 한 쪽이 우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리를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두었던 여자 두 명이 비명을 질렀다. 치마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가느다란 몸뚱이가 바닥을 향했다. 칼릭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갖은 환호와 소란 속에서 로젤린은 난간이 비틀리는 소리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인간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약한 생물이었다. 염려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터라, 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었다.
꺄악, 꺅. 소리가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로젤린은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미끄러지는 듯 난간 앞에 도달한 로젤린의 위로 여자 두 명이 떨어졌다. 한 명은 왼쪽 팔로 받고, 한 명은 오른쪽 팔로 감싸 안았다. 눈을 질끈 감은 여자들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굉장히 놀란 듯했다.
‘음. 좋아. 잘 받아 냈어.’
로젤린은 내심 흡족했다. 일순 크게 비명 소리가 울렸던 사고 현장이 조용해졌다. 여자들이 눈을 떴다.
“악! 로, 로젤린 경!”
“꺄악!”
로젤린의 팔과 어깨에 걸쳐진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앞선 비명보다 높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다시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봤어? 와……. 여자 두 명을 그냥 깃털처럼 드는구만!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 남자들이 제 빈약한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 갔다. 좋은 향기…… 부드럽고…… 멋있어…….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을 느낀 로젤린이 흠칫 몸을 굳혔다. 곧 안전하게 바닥에 도착한 여자들이 달콤한 한숨을 내뱉었다.
“난간에 기대면 위험합니다.”
난간에 붙어 있는 문구를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으나, 여자들은 크게 감명 받은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두 번 다시는 난간에 기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사람들 같았다.
로젤린은 한 명의 치마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치지는 않았지만, 깊게 찢어져 허벅지가 보일 정도였다.
“옷이 찢어졌습니다.”
“어, 어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당황한 여자가 가려 보려 했지만, 크게 찢겨 나간 조각이 있어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제복 겉옷을 벗으며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로젤린이, 그 유명한 기사가 자신의 허리에다 제복을 묶어 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로젤린의 얇은 셔츠 깃이 여자의 볼을 간지럽혔다. 칼릭스는 멀리서 여자의 눈을 보고 말았다. 아, 안 돼.
로젤린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찢겨진 부분이 가장 잘 가려지는 위치를 찾아 냈다. 하얀 제복이 여자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로젤린 경. 이 보답을 어찌 해야 할지…….”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경…….”
여인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수습 기사들이 떠오르는 맑은 눈망울들이었다. 로젤린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들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안 돼요 누님! 그만, 그만하세요! 칼릭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로젤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무사하신 걸로 됐습니다.”
로젤린은 살짝 묵례한 후 돌아섰다. 여자들은 아쉬워하며 멀어지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몇 걸음 가던 그녀가 멈춰서 고개를 살짝 틀었다. 옆 눈으로 여자들을 흘끗 다시 바라본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옷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여인들과 로젤린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난간 위의 여자들이 들고 있던 꽃송이에서 꽃잎이 날아왔다.
미친, 바람까지 왜 저래. 칼릭스는 절망했다. 심각하게 멋있었다. 심지어는 제 누이의 목소리가 제법 낮은 편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난간 안쪽에서 지켜보던 아가씨들의 눈빛도 몽롱해졌다. 어두운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 가는 로젤린의 뒷모습을, 그들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강하고 상냥한 기사님의 향기는…… 달콤했다. 로젤린이 실제로 경기 전에 달콤한 과자를 많이 먹고 왔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 * *
결승 상대는 황실 제 1기사단 ‘얼음창’의 부단장, 마르틴으로 결정되었다. 얼음창 기사단은 가장 강하고 가장 충성심이 깊은 자들이 있는 황제의 최정예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은 가진 충성심만큼이나 황제로부터 많은 영광을 하사받고는 했다. 이런 무투 대회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매년 많은 기사들이 무투 대회에 출전하고는 했지만, 얼음창 기사단에서 참가자가 나온 적은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는 그냥 단원도 아니고 부단장의 직위에 오른 자였다. 얼음창의 이름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영예로웠으며, 부단장쯤 되는 사람이면 무투 대회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욱 많을 수도 있었다. 출전의 이유가 모호했다.
32강전, 1분 12초.
16강전, 7분 45초.
8강전, 6분 22초.
4강전, (부전승)
준 결승전, 9분 59초.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경기 내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이름이 로젤린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 십 분을 넘기지 않고, 심지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길면 한 시간 넘게도 싸우는 것이 무투 대회의 일반적인 풍경이었건만, 얼음창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준비가 끝났다. 앞선 패자들의 붉은 흔적이 심란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르틴은 찝찝한 마음으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로젤린이 보였다.
2황자의 방패이자 창, 검, 화살, 뭐 이거저거 혼자서 다 해 먹는 주인공이 저기 있었다. 마르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눌렀다.
성력은 숱하게 접할 수 있었으나, 마력은 그렇지 않았으니. 검 좀 다루고 강하다는 말 좀 듣는 기사들이 몸을 들썩이며 하얀밤 기사단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틴도 그 수많은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로젤린과 검을 맞대고, 대련도 하고 결투도 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한가. 정말로 딱밤으로 암살자의 머리를 날렸는가! 마력은 얼마나 강하고 불길한 힘인가. 보고 싶었다. 기사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리고 권력 없는 자들의 출세 관문이나 다름없는 무투회장에 발을 들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무투 대회 이전에, 하얀밤 기사단에 공동 훈련 계획서를 찔러 넣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얀밤의 기사단장, 스타스는 얼음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따로 일정이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련만 한번 해 보겠다는데 무척이나 깐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르틴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높은 자리에서 관람중인 황제의 존재도 잊을 정도였다. 진행자가 다가오다 선뜩한 기운에 발을 잠시 주춤거렸다. 참가자 마르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미리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입니다. 미리 주의해 주세요.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마르틴은 제복에 슥슥 손을 문질러 닦은 후 로젤린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국 1 기사단, 얼음창 소속 부단장 마르틴이다.”
“하얀밤의 상급 기사 로젤린입니다.”
맞잡은 손이 작고 가느다래 놀랐다. 이 손으로, 이 체구로 어떻게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 근육의 구조가 다른가? 진행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려 했지만 마르틴이 말을 먼저 꺼냈다.
“로젤린 경.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예?”
“나는 경이 모든 경기에서 힘을 온전히 내보인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마르틴이 화색을 띠었다.
“봐주는 것 없이.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나를 상대해 주게.”
로젤린은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앉아 있는 그 어디쯤이었다. 그녀는 곧 스타스를 찾아내었다. 그는 갑자기 닿은 시선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부터 저었다. 먼 경기장에서 무슨 대화 내용이 오갔는지도 모르면서, 뭐든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안된다는데요.”
“누가! 아, 누구인지는 대충 알겠군. 아니 어째서!”
“제가 최선을 다하면 상대방이 죽는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마르틴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등골이 오싹했다. 교란을 위한 거짓말이나 허세가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