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10화 (110/220)

110화.

“저에 대해 많은 말을 들으셨을 겁니다. 위험하다, 나쁘다. 대륙에 피바람을 몰고 오는 자라고. 그 어떤 것도 변명하지 않을 테지만, 제가 구태여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플로에토, 그녀만큼은…….”

하카브의 눈동자는 저 먼 라고슈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 라고슈를 위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 거대한 대륙에 아버지를 자처하는 일라베니아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거대했고, 또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나라를 팔아먹은 여왕이라는 오명을 감수하고도 저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모두 라고슈를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라고슈의 행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슈의 위대한 뜻을 품고 있으나,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절자, 배신자. 수많은 오명이 플로에토를 둘러싼 지금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바이페렘. 부디.”

하카브가 제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녀를 용서하라, 어두운 곳에서 꺼내 달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플로에토가 왜 저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한번만 생각을 해 주시길 청합니다. 바이페렘께서 보셨던 라고슈는  어땠습니까……. 대륙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막 즉위하신 바이페렘께 이 이야기는 너무 가혹하리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라고슈의 추운 땅을 밟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형제.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킵니다. 그런 형제들이 하나둘 죽어 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바이페렘. 라고슈의 영원한 서약이시여. 그 소리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대사 준비해 왔나? 아주 말이 강같이 흐르네. 간제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괜 채 하카브의 헛소리를 감상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지금의 바이페렘 또한 플로에토가 실각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관련되어 하카브가 위험하다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처음 소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라고슈에 대한 얘기로 경계심을 조금 풀고, 금기나 다름없는 화제를 직접 꺼내어 어린 소녀를 흔들었다. 플로에토를 그리는 눈빛에서 모두가 위험하다 손가락질 한 남자의 진실어린-진실 어려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카브의 보기 역한 연극이 진심처럼 보이는 이유는 출중한 연기 실력뿐 아니라, 그가 한 말들이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많은 형제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아버지로 누릴 것은 누리되 죽어가는 땅을 외면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아득바득 모아 그러쥐고 남은 영광 한 톨 새어 나갈까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비단 라고슈뿐만이 아니었다.

관디테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카브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관디테는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래를 보던 시선을 하카브에게 옮겼다. 하카브가 애절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었다.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으셔도 되니, 부디 라고슈의 형제들을 살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두서없는 말로 바이페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시합을 알리는 사람이 나와 소식을 알렸다. 로젤린의 대전자가 기권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등장하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이 일시에 아쉬운 소리를 냈다.

관디테는 로젤린의 경기 소식에도 하카브의 얘기를 반추하는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카브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시든 만디라.”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카브의 표정이 의문스럽다는 듯 바뀌자 소녀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라고슈 높은 곳에서 자라는 만디라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만큼 귀중한 약초다, 왕자. 시든 만디라. 만디라가 시들어 봤자 만디라지. 조금 상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걸로 값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라고슈의 속담 중 하나다”

부연 설명이 있어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자에게 일라베니아는 시든 만디라인가 보군. 하기야 과거의 광영이 줄었을지언정, 쉬이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니. 형세는 비등한 것인가 왕자? 라고슈의 힘이 발타에 실리지는 못해도 일라베니아에 실리면 안 된다라…….”

하카브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옆에 있던 간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어린 영양같이 눈을 깜박이던 초식동물이 기세를 싹 바꾸었다. 하카브의 말에 경계를 내보이던,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모습마저도 전부 가장에 불과한 것 같았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 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러는지는,”

관디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알겠다. 섭정관은 나이 들고 라고슈는 아직 혼란하다 이 말인가. 전 바이페렘의 얘기까지 꺼낸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아직 완전히 그 일파를 뿌리 뽑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소녀는 표정 없이 하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 경의 경기가 취소되어 매우 상심할 뻔했으나, 오늘의 외출은 이 몸에게 값졌노라. 왕자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 준 덕이다.”

같잖지도 않은 연극 한 편 잘 보았다는 어투였다. 간제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제 입을 가렸다. 네 발로 걷던 애완동물이 두 발로 걷는 걸 본 느낌이었다. 관디테가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기대되어 새벽 늦게까지 자지 못해 피곤하다. 왕자, 내려가는 것을 도와다오. 이제 슬슬 이 몸의 낮잠 시간이다.”

하카브는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아까와 같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받쳐 주었다. 소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손을 밟은 후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감사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간제는 당장 쫓아가서 소녀의 볼에 키스하고 싶었다. 간제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때, 소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하카브를 보며 소녀가 생긋 웃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이 빚은 언젠가 갚도록 하겠다.”

아주 가까운 과거에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하카브는 총총 멀어지는 어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 후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딤라를 아주 빼다 박았군. 라고슈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정말 정이 안가. 내 아내들이 그립구나.”

간제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흐흑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몸을 떨어 대며 웃고 있자 하카브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 * *

첫째 날

32강전 4초

둘째 날

16강전 21초

8강전 0초(부전승)

셋째 날

4강전 23초

준결승전 45초

누가 승자가 될지, 누가 패자가 될지 알지 못해 두근거리며 가슴 졸이던 매해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4초 만에 승리한, 전무후무한 성적의 참가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부전승 제외하면 역대 가장 빠른 승리였다.

32강전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첫 경기 이후로 모두 확신하게 되었다. 믿기 힘들던 그 소문들이 진실에 매우 가깝다고. 정말 딱밤으로 암살자를 죽였단 말인가? 정말로 콧김을 불었더니 암살자들이 날아갔단 말인가? 물론 영 아니올시다 싶은 소문들도 여전히 섞여 있었으나, 다들 믿는 기색이 역력했다.

8강전까지 치러진 두 번째 개방일로부터 이틀 뒤. 다시 무투회장이 열렸다. 오늘도 로젤린은 4강전과 준결승전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32강전의 상대,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은 신성력은 뛰어난 신관이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로젤린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다음 경기부터는 조금 더 힘을 풀고 상대하기 시작했다.

21초, 23초, 45초. 모두 1분은 넘지 못했으나, 로젤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상대들을 많이 봐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45초의 결투 후, 로젤린은 다시 경례를 했다. 승리 이후에 항상 보이던 모습이었다. 몇몇 승리자처럼 물구나무를 선다든지, 한쪽 눈을 감으며 키스를 날린다든지 하는 요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모습보다 강렬하게 관중들에게 새겨졌다.

어린아이들이 그녀를 흉내 내어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고 눈동자는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올곧다. 강하고, 멋지고, 정의로운. 좋은 수식어가 잔뜩 붙어있는 자만이 쟁취해 낼 수 있는 자리였다. 동경의 대상이란 것이 대개 그러하듯이.

꽃비 속에서 경례하던 로젤린의 모습은 칼릭스가 봐도 설렐 정도였다. 개국 이래로 이렇게 멋진 기사가 있었나? 아마 없었을 것이다. 칼릭스는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뭐랄까…….

칼릭스는 말을 잃어버렸다. 다음에 커서 로젤린 경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소녀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아니 그 소녀의 어머니가 “신분 차이가 너무 커서 안 될 거야.”라고 얘기한 다음부터였던가.

아무튼 단순히 신분 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인지, 칼릭스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물들어 있었다. 울지도 자리배치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본 클로에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오늘도 그제와 똑같은 자리 배치였다.

“미래의 매형이 매우 아리땁네요, 칼릭스 경.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게 흠이 될까요?”

“……제국…….”

“제국 법상 동성혼은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말아요.”

칼릭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은데…….

클로에는 [남편이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이라 적혀 있는 천 조각을 들고서는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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