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대전자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마련이었다. 신관이 언제나 대기 중이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몇십 분 동안 생사를 건 격투로 소모된 심력을 채울 수는 없었다.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며칠이나 걸리는 이유였다.
오늘은 16강전과 8강전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이틀 전 구매했던 표는 그 당일에만 사용 할 수 있기에, 오늘은 새로운 표를 사야했다. 덕분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도 돈인데, 구하는 일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웠다. 평민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하지만 몇몇 귀족들과 건국을 축하하러 온 타국의 왕족들은 초대권이 있었기에 자리싸움 따위는 먼 얘기…… 여야 했는데. 싸움은 치열하면 더 치열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누구 옆에 앉느냐’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전에 치러진 16강전 뒤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돌아왔다. 비어 있던 자리가 하나둘 채워질 쯤 그들은 유달리 눈에 띄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선 경기에는 없던, 발타의 유력 후계자 하카브 왕자였다.
하카브의 오른쪽에는 그의 동생 간제가 앉아 있으나, 왼쪽 자리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힐끔힐끔 눈치 보던 작은 왕국, 마람의 왕세자가 그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갔다. 비어 있는 왼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카브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간제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망설이던 왕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격조 하였습니다, 하카브 왕자.”
하카브는 그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격조라. 저희가 만난 적 있습니까?”
남자의 얼굴이 발개졌다. 과거 타국에서 만난 적 있으나 그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자기소개부터 다시 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을 때 하카브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입니다. 알세 마람. 왕세자의 얼굴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마람의 왕세자는 불쾌한 농담에도 불구하고 하카브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색을 지었다. 간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카브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에 쥐락펴락. 아주 가지고 논다 놀아.
그사이 알세 마람은 하카브에게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느냐 물었다.
“이런, 왕세자. 미안합니다. 자리를 잡아 놓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쯤 알고 있으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해해 줄 수 있습니까?”
“아, 그, 그럼요. 하하.”
“어찌나 배려심 깊은지. 연회 때 뵈면 마저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아, 그…….”
“즐거운 시간되시길.”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왕세자를 쫓아냈다. 왕세자는 떠나는 중에도 그를 흘끗흘끗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하카브가 다시 간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이후로도 마람 왕세자가 거의 잡상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몇 명의 도전자가 하카브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일 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떠나야 했다.
옆이 소란스러운데도 간제는 팔짱을 낀 채 무투회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카브가 간제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대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구나. 뭘 그리 보니, 간제. 아직 시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냥요.”
“그냥 뭐?”
하카브가 그녀를 감싼 어깨에 힘을 줬다. 간제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떨쳐 내었다.
“사람들의 머리통을 구경중이에요. 방해하지 마시죠, 오라버니. 거슬려요.”
“머리통? 왜. 따다 주련?”
“알록달록해서 신기하잖아요. 리비타에는 검은색뿐이니.”
“그렇지? 나도 사실 적응이 안 된다.”
하카브는 뭐가 웃긴지 호탕하게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간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곱게 정리했다.
“간제. 내 옆에 누가 앉을지 맞춰 보겠느냐?”
“바이페렘.”
“똑똑하구나.”
“모르는 쪽이 멍청한 거지요.”
“그러게 말이다. 멍청한 놈들이…… 너무 많아.”
하카브는 흠 숨을 짧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를 탐내는 눈빛들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간제는 그의 웃는 표정의 진정한 뜻을 읽어 냈다. 아까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머리통을 죄 따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바이페렘.”
하카브가 아까 하던 말을 이어했다.
“어느 쪽을 말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 간제가 말한 ‘바이페렘’은 당연히 딤라였다. 현재의 바이페렘 관디테가 딤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지금 제 오라비가 말한 ‘바이페렘’이 딤라가 아닌 관디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린애를 기다린다고? 간제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말을 할 줄 아는 나이긴 한가요?”
관디테는 다가오는 생일에 11살이 되는 나이라 했다. 그 얼마 안 되는 나이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외양이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일고여덟 살도 말은 할 줄 알았다. 간제는 소녀를 갓난쟁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소녀가 말을 이해하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할 만큼 성장했느냐 의문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하카브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옹알이는 하던데 말까지는…… 글쎄. 우선 만나 봐야겠지.”
“섭정관이 있으면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힘들 텐데요.”
“어제 우연히 일라베니아의 신관들이 라고슈 사절단이 머무는 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었지. 섭정관의 건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라는 말을 담는 남자는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간제는 심사가 조금 뒤틀렸다.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꼴 보기 싫어요.”
“이놈 간제.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그때 입구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시종 몇을 데리고 온 바이페렘 관디테였다. 하카브의 예상대로 딤라는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를 탐색하는 관디테를 발견한 하카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다가서자 시종들이 관디테에게 한 발짝씩 더 붙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을 보이다 시종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시종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런, 바이페렘이 아니십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로군요.”
“왕자.”
소녀는 자신보다 근 두 배가 커 보이는 하카브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얼굴에는 경계의 빛이 올라와 있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자리를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소녀의 시선이 뒤에 있는 시종을 향했다.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깜박, 깜박. 관디테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서 손쉽게 갈등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카브의 위험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정중하게 건네 온 요청을 물리치자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왕자.”
하카브가 씩 웃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제 옆자리로 관디테를 안내했다. 하카브라는 껄끄러운 인물을 제외하자면, 키가 작은 관디테에게도 잘 보일 만한 좋은 자리였다. 문제는, 큰 의자에 앉으려니 그녀가 낑낑거리며 올라가야할 만한 높이였다는 것이다. 왕의 위엄과 체면이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관디테가 망설이자 하카브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바이페렘.”
그러고는 제 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무릎 위치쯤에 대었다. 누가 보아도 밟고 올라가라는 얘기였다. 관디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내드린다 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바이페렘. 제 어깨를 잡으시고 올라서면 됩니다.”
무릎을 굽히자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소녀가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하카브의 어깨를 잡고 밑에 있는 손을 밟았다. 관디테가 무게를 실어도 그의 손은 미동도 없이 소녀를 받치고 있었다. 하카브는 손을 올려 소녀가 앉는 것을 돕고 나서야 자리에 착석했다.
간제는 웃는 얼굴로 바이페렘에게 인사했다. 관디테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하카브는 두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을 보러 오셨습니까, 바이페렘?”
관디테는 흠칫 몸을 굳힌 일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도도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일라베니아의 용맹한 전사들을 보러 왔다.”
“그 어느 용맹한 자라 하더라도 혹한을 이겨 낸 라고슈의 전사만 하겠습니까.”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가 기쁜 듯 감정을 조금 내보였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아 관디테를 따라온 시종들을 흘겨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호자도 없는 저 어린아이를 독사 굴로 데리고 온 건지. 라고슈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운다더니, 빈말이 아닌 듯했다.
관디테는 경계를 아주 지우지는 않았지만, 나름 즐겁게 하카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려운 말과 정치 용어를 빼고, 자신이 본 라고슈의 눈 덮인 산, 굳어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결정, 해안가에 남아 있는 고래의 뼈 등. 그 놀라운 광경이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졌는지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 조곤조곤 풀어 냈다.
하카브의 얘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관디테는 동물처럼 바짝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을 누그러트렸다.
“테라스로 한번 나갔다가 위에서 얼어붙는 얼음덩어리……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군요.”
“고드름이다.”
“예, 고드름이 떨어져서 머리를 맞고 휘청거리다 얼어 있는 바닥을 밟아 미끄러졌지 뭡니까. 아무도 못 본 것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아하하!”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카브는 소녀를 따라 웃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날이 플로에토와 만난 첫 날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의 표정이 딱 굳었다. 유폐된 전 바이페렘의 얘기가 나오니 다시 경계의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