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08화 (108/220)

108화.

“칼릭스 경. 저는 앞으로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지 알 것 같아요. 물론 모두 최후의 승자는 예상하고 있을 테지만, 그 과정까지 짚어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겠어요?”

“좀 힘든 일, 정도로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까?”

“그럼요. 생각보다도 황금정원의 귀는 아주 넓게 열려 있어요.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사람이 있는 곳에 정보가, 정보가 있는 곳에 돈이. 제 지론이에요.”

상단과 정보 단체를 이끄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저는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정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랍니다. 그 노력이 칼릭스 경께서 놀라워하신……이 대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했어요. 심지어는 오늘 만나지도 않은 레이몬드의 속옷이 연분홍색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답니다. 대단하지요?”

“아니요. 저는 그 정보, 알고 싶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정색하자 클로에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처져 더욱 순하게 보였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요? 칼릭스 경이 그런 어마어마한 행위를 강압적으로 그분에게 몰아붙일 것이라고! 저는 정말 상상도, 예상도, 짐작도 못했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행위라니. 굉장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자극적인 문구였다. 물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2황자 리카르디스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고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할 수 없기에 우회한 표현이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껄끄러웠다.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가 승리했다.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치웠다.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저는…… 예상 못한 요소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칼릭스 경.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잘 만들어진 배가 한 척이 있어요. 하지만 순항을 결정하는 것은 배의 능력만이 아니죠. 바다가 잔잔하길, 그 속에 송곳처럼 튀어나온 암초가 없길 바라야 해요. 여기서 우리는 그날의 날씨와, 암초의 위치를 습득해 폭풍과 암초를 피해갈 수 있겠죠. 하늘에 맡긴다, 운에 맡긴다. 저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늘에 맡길 때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낸 후 뿐이에요. 그리고 생각보다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폭넓고, 깊고, 끝없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클로에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암초같이 갑자기 튀어나온 칼릭스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피를 보는 것 자체도 불쾌한 듯 보였다.

“말이 길어졌네요. 요컨대, 칼릭스 경이 그분에게 갑작스럽게 밀어붙인…… 어마어마한 그 행위는…….”

“표현을 좀 바꾸면 안 됩니까?”

“어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무튼, 제국의 굵직한 일 정도는 제 노력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칼릭스 경은 그렇지 않았으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칼릭스는 그녀가 의문스러워 하는 부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후계자가 갑자기 길을 벗어나다 못해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 솔직히 그 자신도 살짝 미친 짓 같다 생각했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더욱 경악스러웠으리라. 충성 맹세를 했을 때의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위는 함성 소리로 시끄럽고 먹먹한 가운데 두 사람의 침묵은 그보다도 무거웠다. 한참 뒤 칼릭스가 대답했다.

“그분에게 이미 말씀드렸으며, 또한 그분 또한 이해하셨으리라 믿었습니다만.”

“건너건너 듣는 얘기는 생각보다 제게 큰 믿음을 주지 못하더군요.”

“건너건너 듣는 얘기로 판을 짜시는 분 치고는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군요.”

클로에가 씩 웃었다. 어찌 보면 건방질 수도 있는 말이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우가 다르니까요. 이것은 키를 쥐고 있는 선장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앵무새 역할을 맡고 있는 저에게도 중요하답니다. 배에 타려는 선원을 정하는 것은 선장이지만, 앵무새도 저 선원이 일을 잘하나 못하나 정도는 궁금할 수 있잖아요.”

참신한 표현이 웃긴지 칼릭스가 슬쩍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클로에가 타박하듯 부채로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탁. 소리는 당연히 묻혔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다들 울부짖는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등장이었다.

저 멀리 땋은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린 로젤린이 보였다. 건물에서 막 나와 햇빛을 받는 그녀는 노곤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클로에가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칼릭스는 주머니를 뒤지며 슬쩍 일어섰다. 로젤린의 등장에 펄펄 날뛰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그가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손에 들린 것을 쫙 펼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찾아보니 가판대에서 팔더군요. 몇 개 더 사 놨는데 필요하면 드리도록 하죠.”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하며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칼릭스가 체면도 버리고 열심히 천 조각을 흔드는 모습을 본 클로에는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이게 그 대답인가. 누이 사랑이 지긋하단 말이렷다. 생긴 것보단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무투회장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환호성 때문에, 시합은 진행되지 못하고 잠시 미뤄졌다.

* * *

로젤린의 상대는 불화살 용병단의 단원이었다. 용병단의 유명세와 더불어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자였다. 사절단의 일만 아니었더라도 카델, 그가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거구의 남자는 사나운 인상을 찌푸려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수염이 숭숭 나 있는 거친 남자들이 관중석에서 카델의 이름을 연호했다. 저 쥐방울만한 계집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 주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한껏 움츠러든 뒷모습이 초라했다.

넓은 경기장 위에 남자의 흉흉한 기세가 가득 찼다. 진행 요원이 진땀을 흘리며 카델의 눈치를 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과 더불어 조치에 들어갑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두 대전자 사이에 끼어 있는 남자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자기소개입니다……. 물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델이 껄렁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디 한번 그 잘난 솜씨 좀 보자고.”

남자의 협박을 멍하니 흘리던 로젤린은 그의 뒤쪽 관중석에서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칼릭스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카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왜 날보고 웃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로젤린이 손을 번쩍 들어 붕붕 흔들었다. 칼릭스가 천 조각을 바꿔 들었다.

[사랑해요 로젤린]

칼릭스가 있는 방향의 관중석이 난리가 났다. 날, 날보고 손을 흔드셨어! 날 보고 웃으셨어! 착각이 파도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카델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는 중이었다. 진행요원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집중해주세요…… 이제 시합 곧 시작 하겠습니다…….” 하고 말 안 듣는 두 참가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두 사람이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자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만이 올라와있는 경기장에 전쟁터와 같은 흉흉한 기운이 가득 찼다. 바람이 칼날을 지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뎅, 무거운 종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검을 들었다. 카델도 들고 있는 검을 꽉 그러쥐었다.

뎅, 두 번째 종이 울렸다. 눈과 눈이 서로를 포착했다.

뎅. 세 번째 종이 울리며 시합이 시작되었다.

쿠우웅…….

큰 타격음이 종소리의 여운을 뚫고 공간에 울렸다. 사각형의 경기장 밖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어?”

“지금 무슨 일이…….”

구경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경기장을 벗어나 벽에 처박혀 있는 게, 오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이 맞나?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위쪽에 박혀있던 카델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처참한 패배자의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카델이 맞다!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눈 깜짝할 새 승패가 갈렸다. 바람같이 돌진한 로젤린은 상대가 무기 한번 휘두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비! 저 극악무도함! 남자들이 온갖 괴성과 짐승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여자들도 비명을 지르며 들고 온 꽃을 경기장 안으로 던졌다. 앞선 경기들 또한 훌륭했으나,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승리는 오직 확연한 실력 차만이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므로.

진행자는 멍한 얼굴로 그녀와 카델을 번갈아 보다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스, 승리자는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에스터!”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로젤린은 몸을 곧게 펴고서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기사의 경례에 무투회장은 다시 한 번 터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병사와 신관, 의사가 카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뒤로, 로젤린은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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